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69강(눅7:11-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2. 6. 17:29

누가복음 강해 69(7:11-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7 12()

 

나인성 밖으로 과부가 죽은 외아들의 장례행렬을 따라나오면서 울고 있는 광경을 보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하여(7:11-17)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후반에 남쪽의 베다니에서 이미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부터 되살려내십니다(11:32-44). 그리고 공생애 초기에는 대표적으로 본문에서 있듯이 북쪽의 나인성에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되살려내십니다. 그렇다면, 가지 사건의 차이점과 유사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가장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인성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불과 10km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반면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감람산을 넘어서면 곧바로 위치하고 있는 근교마을입니다. 학자들은 3km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사도 요한은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5리쯤 되매”(11:18)라고 지근거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북쪽 나인성에서 죽은 자를 되살리신 사건은 고향 나사렛과 갈릴리 지역 그리고 사마리아와 인근 유대 땅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7:16-17). 반면에 요한복음 11-12장의 기록 그대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되살리신 사건은 유대교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11:45, 48, 12:9-11).

그러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12:1-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십니다(12:12-17).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자신이 무덤속에서 부활하십니다(20:1-9). 그러므로 베다니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살리신 일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직접 예고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공생애 초기에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살길을 마련해주며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변방의 백성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사건의 비슷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신 것은 고대의 율법사회에서 생계의 수단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과부를 불쌍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자만이 재산을 소유할 있는 고대사회이므로 외아들이 죽고나면 어머니인 과부는 재산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고서 앞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외아들이 죽은 슬픔도 견디기 힘든 노릇인데 자신의 생계수단마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도 예수님께서 친구 나사로의 여동생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빠가 남자이기 때문에 명의로 객점을 운영하고 생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그녀들입니다. 그런데 오빠가 죽고 말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재산을 소유할 수가 없는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제는 생계수단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빠가 죽은 것도 한없는 슬픔인데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눈앞에 닥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중적인 어려움을 보시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사로를 되살려주시고 있습니다(11:39-44).

물론 사건은 모두 예수님이 구속자 그리스도이시며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믿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은혜가 죽음을 맛보아야만 하는 인간들에게 죽은 다음에도 다시 만날 있다는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땅에서 다시 살아갈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실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와 같은 여러가지 측면을 함께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어머니의 독자 그의 어머니는 과부.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7:11-12);

(1)   나사렛 이북지역에서 주로 복음사역을 하시던 예수님 일행이 이남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12사도와 많은 제자들 그리고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무리들과 함께 일행이 되어 나사렛에서 동남쪽으로 25 정도 떨어져 있는 조그만 마을 나인성에 들어서시고 있습니다(7:11). 그때 장례행렬이 성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보시게 됩니다(7:12a).

(2)   누가 죽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장례행렬의 뒤를 따라오면서 마치 창자가 끊어져나가듯이 그렇게 슬프게 울고 있는 사람의 늙은 여자를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전후사정을 헤아리시게 됩니다. 과부인 그녀의 독자가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7:12b). 그러므로 과부에게는 하늘이 갑자기 차례나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과부인 어머니를 홀로 두고서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없어진 과부는 재산을 소유할 수가 없는 고대사회인지라 이제는 농사를 지을 있는 땅도 사라지게 됩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슬픈 과부의 신세입니다.

(3)   장례를 치르고 나면 과부의 재산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조그만 마을 나인성의 일가친척들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장례행렬을 많이들 따라오면서 여러가지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7:12c). 광경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가지 생각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닌데 영혼을 지니고 있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으며 더구나 영생이냐 영벌이냐를 판결하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5:24-29). 둘째, 땅에서 살아갈 소망이 사라지고 있는 늙은 과부에게 살길을 마련해주고 싶습니다(14:29).

둘째로,주께서 과부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7:13-14);

(1)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 영원한 긍휼을 베풀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33:19, 7:13a). 왜냐하면, 예수님의 긍휼은 말로 위로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대가를 직접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치르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제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7:27-28). 그러므로 예수님의 긍휼은 사함과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환언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기에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영원한 축복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고난의 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그렇게 자신의 공생애의 끝을 이미 바라보시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 늙은 과부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7:13b). 말은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장차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게 되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늙은 과부는 하나님나라에서 죽은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은총을 누리게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위로입니다. 둘째, 일시적인 위로가 땅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늙은 과부에게 살길을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3)   그런데 방법이 놀랍게도 죽은 외아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되살려주시는 것으로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7:14-15). 예수님의 공생애 3 6개월 동안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되살린 사례를(8:40-42, 49-56) 포함하더라도 겨우 3 발생하게 되는 희귀한 경우가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쨌든 여기서는 예수님이 장례행렬에 접근하여 관에 손을 대시고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7:14).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명령하시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사람이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요? 몸은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부르르 떨면서 절대자의 명령에 순종을 하려고 합니다.

셋째로,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이르되, 선지자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7:15-16);

(1)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관뚜껑이 떨어져나가고 있습니다. 죽은 청년이 벌떡 일어나 앉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7:15a). 놀라고 있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청년을 상여에서 내려오게 하여 늙은 과부인 모친에게 되돌려 주시고 있습니다(7:15b). 죽은 다음에 내세에서나 맛볼 있는 부활의 은혜를 지금 자리에서 일부나마 맛볼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사건을 일으키시고 있는 예수님의 속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옛날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의 경우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시절은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바알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풍조가 극심하던 때입니다. 아합왕과 이세벨 왕비가 얼마나 백성들을 영적으로 캄캄하게 인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왕상16:30-33). 이스라엘 10지파가 바알신을 열심히 섬겨서 풍요를 누리고자 합니다. 우상을 많이 섬겨서 운수가 대통(크게 형통함)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3)   그러한 시대이므로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각각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왕상17:17-24, 왕하4:20-37). 그것은 이방신과 우상들이 흉내도 없는 창조주의 능력의 발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백성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부디 사람을 살릴  없는 무능하고 허망한 우상을 섬기지 말고 생명을 온전히 살릴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4)   그와 같은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나인성에서 세상사람들에게 보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반응이 다음과 같이 뜨겁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이르되, 선지자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7:16). 그들의 반응은 사실 가지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구속자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쳐다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12사도와 제자들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단지 옛날의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 정도로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직접 가르침이 아니라 그저 말씀의 선포와 치유의 사역에만 참여하고 있는 일반백성들입니다.

넷째로,예수께 대한 소문 유대 사방 두루 퍼지니라”(7:17); 죽어서 관속에 들어가 있는 청년을 되살려내신 예수님의 또다른 의도가 이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남쪽으로 유대 땅으로 들어가시고 마침내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성전으로 들어가실 준비를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람의 발보다 빠른 소문이 남쪽으로 퍼져나가게 하십니다; “예수께 대한 소문 유대 사방 두루 퍼지니라”(7:17). 물론 소문은 북쪽으로도 퍼져나갑니다. 앞으로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한층 백성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게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한한 인생을 불편한 육신에 갇혀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인간들은 누구나 무한한 생명력을 자유스럽게 누릴 있는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육체의 유한성을 탈출하게 되면 한스러운 눈물도 닦여질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미래는 이루어질 없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당하게 되면 너나없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 본문에서의 늙은 과부는 슬픔과 더불어 이제는 살아갈 방도가 사라져버리는 이중적인 슬픔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냥 버려두게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은 완벽한 절망에 빠져서 창자가 끊어질 듯이 울부짖고 있는 과부를 예수님께서 돌아보신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죽음의 관에서 되살려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늙은 과부에게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시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과 심판 그리고 영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땅에서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구속자이며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땅의 백성들에게 알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다양한 의미를 생각하시면서 다시 본문을 음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기쁨을 모두 얻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