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 제55강(눅6: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6월 28일(화)
안식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안식일의 주인의 뜻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눅6:1-5, 삼상21:3-6, 마12:1-8, 막2:23-28)
안식일이 되면 선민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각 지역의 회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집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이며 율법에서 정하고 있는 안식일을 가장 경건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백성들에게 안식일에 집에서 성전이나 회당에 출석하는 정도의 왕복여행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안식일을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지내기 위하여 음식물은 그 전날에 미리 준비를 해둡니다(출16:5, 22-30).
그런데 예수님 일행은 좀 이상합니다. 안식일에 병자와 장애자로 고치십니다(눅4:31-36, 38-41). 그리고 자리를 들고 걸어서 집으로 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요5:7-10). 그러한 치유사역을 하다가 보니까 여행의 거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금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예수님에게 통쾌하게 그 잘못을 지적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바리새인들의 눈 앞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는 예수님 일행 가운데 크게 잘못을 범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한지 그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밀알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눅6:1).
여기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것은 회당을 오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비록 작은 일이라고 하지만 손으로 추수를 하고 타작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위반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 있게 예수님에게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눅6:2). 그러한 지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눅6:3-5).
한편,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는 마가와 마태의 자료가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는 율법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으며, 마가는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취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에 비해서 누가는 모두가 인용하고 있는 다윗의 경우만을 적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차제에 그러한 차이를 함께 생각하면서 본문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눅6:1-2);
(1) 안식일을 제정한 이유는 그날 하루만이라도 세상일을 내려놓고 온전히 예배와 말씀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창2:2-3, 출16:29-30). 그러므로 안식일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주된 관심은 백성들이 어떻게 경건하게 성전과 회당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하루 동안 하나님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가 하는 데에 집중이 되어야만 합니다(눅4:15-16, 31-32).
(2)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형식적이고도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①첫째,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 날 밀밭 길을 걸어서 어디로 향하고 계시는가? 회당일까? 아니면 다른 엉뚱한 곳일까? ②둘째, 안식일 날 혹시 생활율법이 금하고 있는 위반사항을 저지르지는 아니하는가?
(3) 그러한 부정적인 시선으로 예수님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바리새인들 앞에 좋은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척 시장했는지 그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대로 밀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밀알을 얻어 그것을 입에 털어 넣고서 오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눅6:1). 그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두 가지를 동시에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①첫째, 밀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추수를 하고 있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안식일에 금하고 있는 노동행위라는 것입니다. ②둘째, 전날 마련한 음식을 안식일에 먹어야 하는데(출16:23, 29) 안식일 당일에 밀알을 준비하여 바로 먹고 있으니 그것은 안식일 규례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4) 출애굽 이후 1,400년 동안이나 지켜지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안식일 규례를 무참하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지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해명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차스러운 변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일행을 궁지에 몰아넣고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입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답변이나 설명을 하시다가 더 큰 수렁에 빠져들기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눅6:3);
(1) 예수님은 히브리경전의 역사서에 들어있는 다윗의 기사를 가지고(삼상21:1-6)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사울 왕에게 쫓기어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과 그의 일행이 무척 굶주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눅6:3).
(2) 사울 왕을 피하여 다윗은 기브아에서(삼상10:26, 13:2) 남쪽으로 급히 도망을 치느라고 먹을 것을 챙겨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를 따라서 함께 도망자가 되어버린 부하들의 굶주림이 심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다윗은 당시 여호와의 법궤가 머물고 있던 놉(느11:32, 예루살렘에서 스코푸스 산을 넘어 북동쪽 2KM이며 베냐민 지파의 성읍임) 땅으로 들어갑니다.
(3) 기브아와 예루살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놉은 고원지대이며 그곳에는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많은 제사장들이 법궤를 모시고 성막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아히멜렉의 호의로 진설병 떡을 얻어 먹고서 일행과 함께 허기를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삼상21:1-6).
셋째로,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눅6:4);
(1)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진설병 떡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율법조항에 의하여 제사장들입니다(레24:8-9). 그런데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굶주린 청년 장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긍휼히 여겨서 그 떡을 제공합니다. 물론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진설병 떡을 다윗에게 제공하기 전에 두 가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여호와의 떡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는가?(삼상21:3) ②둘째, 3일간 부정을 멀리하였는가?(삼상21:4-6).
(2) 그 떡을 먹고서 생기를 되찾은 다윗과 부하들이 블레셋 가까운 변방으로 무사히 탈출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사울 왕의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제사장 85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사울 왕의 명령으로 에돔 사람 도엑이 제사장은 물론 그 성읍 사람들을 무수히 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삼상22:16-19).
(3) 그 사건을 이스라엘의 역사서인 ‘사무엘 상’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설병 떡을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율법조항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여호와의 명령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막3:4). 그것은 마치 헌법의 정신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각종 법들은 헌법의 정신을 따라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각종 규정이 하나님말씀의 취지이며 제사장나라의 기본정신이 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살림과 공의의 정신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6:5);
(1) 창조주가 만드신 피조물의 종류에 대하여 창세기 제1장에서 열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천하만물과 만민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조세계에는 그것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구조와 각종 제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 누구일까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3) 이 세상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살리고자 하시는데 누가 그 뜻을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율법과 안식일 규정을 내세워서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견해가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4) 언제 그러한 인정이 확실하게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무덤 속 부활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옳다고 하는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로써 증명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눅6:5)고 하는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5) 끝으로, 본문과 동일한 말씀으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있는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1) 마가복음에서는 특이하게 다음 구절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신다고 하는 것이 마가의 논리입니다(막2:28).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①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므로, ②사람들의 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③당연히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안식일 규정에 손을 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마태복음에서는 두 가지의 사실을 히브리경전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는 율법규정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마12:5, 민28:9-10).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소제와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직무이므로 안식일이라고 하여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②둘째, 성전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마12:6-7,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러므로 성전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굶주린 사람 특히 의인의 생명을 구하라고 하시는데 성전의 제사규정과 율법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요컨대, 안식일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뜻을 명심하고서 함부로 안식일 규정의 위반이라고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의사 누가는 사도 마태처럼 구약의 민수기나 호세아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가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라고 멋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담담하게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 적혀 있는 공통적인 다윗의 사건을 적고 있을 따름입니다. 의사 누가의 생각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굶주린 사람에게 떡을 주어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므로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 서리를 하여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율법의 위반이라고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비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눅6:1-6).
결론적으로,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술함에 있어서 두 가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사역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인가? 둘째, 예수님 교훈의 근본이 무엇인가? 누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시작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있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조상이 하나님이시고(눅1:35, 2:49) 그를 양자로 맞이하고 있는 목수 요셉의 조상도 아담을 거쳐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이르고 있습니다(눅3:23, 38).
다음으로 예수님 교훈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만물의 생명을 모두 살리자는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피조세계와 종교적인 율법과 규례는 하나님의 생명살림과 공의의 정신에 맞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와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복음서와 달리 본문에서는 그 설명이 간단합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안식일 날 밀이삭을 베어서 손으로 타작을 하여 먹고 있는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말씀의 근본정신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에게 크게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날 먹을 것이 없어서 시장기를 면하고자 밀 서리를 한 것을 가지고 율법위반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너희들은 안식일 날 굶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와 같은 예수님의 반문은 성도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육신적으로 안식일 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자에게 우선적으로 생명의 양식을 주고 먹을 것을 공급해주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의미와 하나님말씀의 근본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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