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5(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2. 22. 17:35

가지를 뚫는 햇살5(손진길 소설)

 

19451226일에 끝난 모스크바 3(미국, 영국, 소련) 외상회의의 결과가 국내에 알려지자 연말의 분위기가 소란스럽다. 포항에 살고 있는 서운갑도 태연할 수만은 없다. 조선사람들이 언제 자치정부를 구성하여 독립할 수 있는지 그 대목이 그 회의의 발표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 내용이 연합국 3개국인 미국, 영국, 소련중국을 포함하여 4개국이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하면서 조선사람들이 자치정부를 수립하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조선사람에 의한 그들의 독립국가의 건국은 잘못하면 5년이나 미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일제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때에는 미처 몰랐지만 일단 해방정국을 맞이하고 보니 한시라도 빨리 자주적인 독립국을 가지고 싶은 것이 조선사람 곧 한민족의 소원이 되고 있다.

그런데 한마디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 발표문은 그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당최 그 점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서 서운갑은 다시 미국인 선교사 오천덕(David Paul Ross) 목사를 방문하여 그의 고견을 듣고자 한다.

오선교사는 벌써 서운갑이 자신을 찾아올 줄 짐작하고 있었는지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런데 그 대화법이 아주 인상적이다. 202312월에 100세의 나이가 된 서운갑이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새삼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 것을 보면 오선교사의 견해가 엄청 뛰어난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예지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서운갑으로서는 부럽기가 그지없다. 따라서 그는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사업체 자전거포의 운영을 양부 서달호에게 넘겨주고 과감하게 젊은 날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 위하여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 자신을 찾아온 서운갑에게 도리어 오천덕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먼저 질문하고 있다; “5년내의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서서히 조선인의 독립국가를 세워주는 것과 당장 독립국가를 세워주고자 그 준비에 들어가는 것 가운데 과연 어느 방안을 조선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원할 것인가? 미스터 서, 그대는 어느 쪽을 선호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

오선교사의 조선말은 언제나 들어도 별로 어색함이 없다. 그는 외국어실력도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데 서운갑은 오선교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서 조선말로 명쾌하게 대답한다; “당연히 후자이지요.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있듯이 당장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이 소원이지요. 그것은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입니다”.

그 말을 듣자 오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내년초부터 서울에서는 반탁(反託)운동이 거세게 발생하겠군. 그런데 그 예민한 문제를 풀기 위하여 미소 양국은 미군정과 소련군정에서 각각 대표를 내어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로의 의견을 절충할 예정인데 그때 그들의 뜨거운 감자는 무엇이 될 것으로 그대는 생각하는가?... “.

당시만 해도 서운갑오선교사의 질문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래서 그의 대답이 즉각적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조선사람의 열망을 반영하여 최장 5년이라고 하는 신탁통치안을 철회하도록 해야 합니다. 당장 남한과 북한에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논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이며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오선교사가 빙그레 미소를 띄면서 천천히 말한다; “허허허, 운갑이 자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벌써 잊어버리고 있구만. 모든 정치적인 논리의 전개는 조선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정치지도자들의 생각이 우선인데 그 점을 잊어버리고 있어요. 내가 다시 한번 말해주겠네!... “.

오선교사가 정색을 하고서 강조한다; “조선사람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에 의하여 일본제국이 패망하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현실문제를 풀 수가 없어요! 그 사실을 간과하게 되면 미국의 속셈과 소련의 속셈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게 되지요. 내가 자네에게 핵심만 한번 더 말해줄 테니 잘 들어보게”.

서운갑이 긴장한다. 그의 귀에 체계적인 오선교사의 설명이 들려온다; “첫째로, 미국은 조선사람의 열망을 반영하여 남북한에 하나의 독립국가를 세우자고 제안할 것이야. 그러나 소련은 다른 제안을 해올 것으로 나는 생각해. 그 이유는 소련측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싶어하기 때문이지. 그래야 필요한 경우에 북한의 부동항(不凍港)을 이용할 수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둘째로… “;

오선교사가 잠시 서운갑의 얼굴을 살핀 다음에 이어서 설명한다; “틀림없이 소련은 모스코바 3국 외상회의의 결과를 존중하는 자들과 협의하여 조선인의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겠지. 그리고 그들은 전술적으로 신탁을 지지하라고 추종세력들에게 찬탁(贊託)을 지시할 것이야. 그 이유는… “.

마치 소련의 정치지도자들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오선교사가 이어서 말한다; “소련측으로서는 반탁운동을 벌이고 있는 자유진영을 배제하고 소련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조선인의 정파만으로 조선반도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카드를 내밀려고 할 것이야. 그것은 수년 전 신탁통치안을 거절하고 군정을 선택한 스탈린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제는 그 방안을 그렇게 밀어붙일 것으로 나는 보고 있어. 그러므로 셋째로… “;

그의 결론이 다음과 같다; “아무리 시간을 주어도 미소공동위원회는 첨예한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은 결렬되고 말 것으로 나는 보고 있어요. 그 이유는 애초부터 동상이몽(同床異夢)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말겠지요. 그렇게 되면 소련은 어떠한 대안을 마련하려고 할까? 운갑이 자네는 앞으로 그 점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거야! 어떻게 나의 예측이 좀 도움이 되었나?... “;

당시에 서운갑오선교사의 친절한 설명과 예리한 미래전망에 대하여 감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북한에서 어떠한 일들이 진행이 되고 있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고서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가 얻은 대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첫째로, 1932년에 일본제국의 군대가 만주로 쳐들어가자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만주군벌의 군대와 조선인 무장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자 1936년에 항일무장세력들이 소위 88여단으로 불리고 있는 동북아항일연군교도여를 구성했다. 그러나 끝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40년경 살길을 찾아 러시아 땅으로 넘어갔다. 소련에서는 당시 1 3백명 이상의 망명을 받아들였는데 그 가운데 조선사람이 100명이 약간 넘는다고 알려지고 있다.

둘째로, 조선 젊은이들에게 정치교육을 시켜서 소련군은 194588일부터 일본의 관동군을 무장해제하는데 대부분 동원했다. 그렇지만 김일성 일당에 대해서는 다른 임무를 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소련의 군함을 타고 1945919일에 원산항에 들어왔으며 922일경부터 평양에서 정치공작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 일행이 처음으로 맡은 직무는 북한의 주요도시에서 소련군정 책임자를 보좌하는 것이다. 서운갑이 입수한 그들의 명단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김일성(평양), 김책(함흥), 안길(청진), 김일(신의주), 최현(강계), 서철(원산), 김경석(진남포), 최용진(정주), 임춘추(사리원) 등이다;

셋째로, 19461월에 시작이 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이듬해 194710월에 완전히 결렬이 되자 모든 문제는 다시 유엔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와 같은 결과를 미리 짐작이라도 하고 있듯이 소련군정에서는 그 대비책을 다음과 같이 세우고 있다; “재빨리 김일성 일행을 앞장세워서 194625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한다. 대담하게도 스탈린이 지지하는 34살의 젊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그를 보좌하는 부위원장으로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고 있는 57살의 연안파 지도자 김두봉 임명한 것이다”. 소련의 의도는 그것이 모체가 되어 나중에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고 북한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김일성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넷째로, 그렇지만 겉으로는 남한의 정치세력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것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83월에 북조선노동당 2차대회를 열어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주고 4월에 평양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진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에 따라 당시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결코 찬성할 수가 없었던 민족주의 지도자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을 찾아갔으나 그들의 정치선전에 이용만 당하고 만다;

 그 결과 남한에서는 1948510일에 제헌의원선거를 실시하고 대한민국정부를 구성할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순은 이미 스탈린이나 김일성이 예상하고 있는 시나리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은밀하게 북한인민군의 무력증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위장평화공세가 효과가 없으면 그 다음에는 무력적화통일에 나서는 것이 그들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전략전술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있어서도 서운갑은 상당부분 오천덕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의 뛰어난 정치감각과 국제정치의 식견이 없으면 위와 같은 이해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루는 서운갑이 오선교사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진로를 두고서 한가지 도움말을 구했다; “소위 해방정국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저의 식견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그 앞날을 예상하지도 못하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그 방면의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지만 당장은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서운갑의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 절친 오요한의 부친 오천덕 선교사가 능히 짐작한다. 그래서 그가 한참 생각을 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갑이, 자네가 당장은 미국에 가서 정치학을 공부할 수가 없어.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을 빌려주겠네. 읽고서 매주일 만날 때에 내게 질문을 하게나. 머리가 좋은 운갑이 너는 영어로 된 정치학 전공서적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야. 일단 그렇게 시작을 해보도록 하지!”.

1947년 한해와 19486월까지 무려 1년 반 동안 마치 홈 스쿨링과 같은 정치학 공부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영어전공서적을 읽고서 그 뜻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운갑도 대단하지만 매주 그의 질문을 받아주고 설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오천덕 선교사도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데 19486월에 남한 땅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자 제헌의회가 열심히 가동되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하루는 오천덕 선교사가 서운갑에게 말한다; “운갑, 자네는 정치학공부도 많이 하고 이제는 영어실력도 상당해. 그러므로 자전거포를 운영하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자네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 일해볼 생각이 없는가?... “.

뜻밖의 말씀이다. 그렇지만 오천덕 목사는 서운갑에게 있어서 사부와 같다. 따라서 서운갑이 아내는 물론 부모님과 한번 진지하게 상의를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린다. 그런데 저녁식사가 끝난 자리에서 서운갑이 그러한 이야기를 양부인 서달호에게 했더니 그가 부인 장화련과 한참 상의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갑아,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 어른 말씀이 옳다. 너의 나이가 금년에 25살에 불과하니 아직 늦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인생길을 바꾸어 보도록 해라. 이 애비의 나이가 아직 50대중반이니 너 대신 자전거포를 맡아서 운영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네 앞길을 한번 개척해보도록 해라. 나와 네 어미는 찬성이다!”.

그 말을 듣자 서운갑 대신에 아내 황옥주가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도 경일이 아빠가 공부도 하고 공무원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곧 출범할 것이니 그렇게 공헌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쾌히 허락을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에 장화련이 며느리 황옥주를 보고서 싱긋 웃으며 한마디를 한다; “호호호, 옥주야, 네가 부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면 우리 소원을 하나 들어 다오. 그것은 아들을 하나 더 낳아주면 된다. 우리가 기대를 해도 되겠지, 호호호... “.

그 말을 듣자 황옥주가 생긋 웃으면서 조용히 대답을 한다; “호호호, 어머니, 아니 그려서도 제가 오늘 낮에 의원에게 다녀왔어요. 아무래도 애기를 가진 것만 같아서 들린 겁니다. 그랬더니 벌써 2달이 되었다고 해요. 내년 3월이면 경일이의 동생을 볼 거예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이야기를 듣자 서달호서운갑의 얼굴에 기쁨이 어리고 있다. 그리고 장화련은 며느리 황옥주의 손을 잡고서 연거푸 고맙다, 며늘아라고 말한다. 그렇게 화목한 가운데 조용히 19486월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7월이 되면 서운갑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