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길 목사 설교요지 및 음성설교 모음

사도 바울의 부활사상(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0. 12. 13. 03:53

사도 바울의 부활사상(성경말씀; 9:1-9, 17-22, 8:11, 고후5:1-5, 3:10-16)

설교자; 손진길 목사

설교일; 주후 2019421(부활주일)

 

사도 바울은 본래 랍비 사울입니다. 랍비인 그는 유대인들이 대대로 간직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은 물론 오늘날 탈무드라고 알려지고 있는 미쉬나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사제지간에 백 년 이상의 세월을 투자하여 만들어 놓은 주석을 풀이하여 여호와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알기 쉽게 가르치는 율법선생입니다.

그러한 율법선생이 되자면 적어도 10년 이상 유명한 랍비나 서기관 문하에서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십대의 소년이 그 문하에 들어가서 기숙을 하면서 스승으로부터 그 3가지의 학문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30세가 되면 제사장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섬기게 됩니다. 따라서 30세의 나이가 되기 직전에 스승님과 유명한 랍비들이 함께 시험관이 되어 오랜 세월 공부를 한 생도를 시험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치르게 되면 보통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 통과를 하게 됩니다.

그만큼 바리새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랍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에 따라 자신들의 집안에서 랍비를 만들고자 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똑똑한 아들을 골라 일찍 출가를 시키듯이 그렇게 유명한 랍비의 문하로 들여 보냅니다. 그리고 10년 이상 그 뒷바라지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랍비가 자신의 문중에서 탄생을 하게 되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축하를 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한 기쁨을 맛본 집안이 바로 오늘날의 터어키인 소아시아 지방 동남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교육도시 다소성에 살고 있는 사울의 부모님입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 수가 무척 적었지만 끝까지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섬긴 절개가 있는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은 세상 어느 곳에 살고 있더라도 자신들은 다윗왕조를 끝까지 섬긴 선민이라고 하는 의식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마치 레위인들처럼 베냐민 교포들은 재산이 있으면 똑똑한 아들을 예루살렘의 가장 좋은 랍비나 서기관의 문하로 보내어 랍비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자신들의 지극한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집안에서 촉망받는 사울이 랍비로 탄생한 것입니다.

랍비 사울은 그 이름부터가 부모님들의 기대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이스라엘왕국의 초대왕 사울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이름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부모님께서 자신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큰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서 자신의 지혜와 힘을 다하여 율법을 공부하여 랍비가 되고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수제자가 된 사람이 바로 랍비 사울입니다.

그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대내외적인 신망이 대단하고 또한 젊기 때문입니다. 30대 중반인 그의 연령대에 있어서 유일한 경쟁의 상대라고 한다면 그자는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당대에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뛰어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율법해석을 뛰어넘어 만민구원사상과 영생부활사상을 전면적으로 전파한 자입니다. 그리고 약한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들을 용서하라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 때문에 두해전에 예루살렘에서 공회원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가 되고 로마총독으로부터 십자가 처형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랍비인 사울 자신이 할 일은 유대교인들 가운데 일부 예수의 사상인 만민구원과 천국복음을 믿고 있는 자들을 색출하여 산헤드린 대공회의 재판에 회부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예루살렘에서 열심히 한 랍비 사울은 이제 다메섹으로 도망을 친 개종자들을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의 말 그대로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지나쳐서 나사렛 예수의 사상이 무엇인지 그것이 유대인경전의 본래 뜻에 어떻게 부합이 되고 있는지를 전혀 살피지 못하고 있는 랍비 사울입니다. 그는 유대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정확하다고 믿고서 대제사장의 체포영장을 가지고 그렇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의 랍비 사울이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그 다메섹 도상에서 발생을 하고 맙니다. 그 사건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훗날 사도 바울이 된 그는 사도행전 제9장과 제22장에서 두 차례나 동족들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 스토리는 여러 성도님들이 잘 알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중요한 질문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여, 누구시나이까?”(9:5a)라는 대목입니다. “Who are you, Lord?라고 하는 질문은 빛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으로 그리고 사람의 모양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 상대방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빛 때문에 육신의 눈이 멀어버린 랍비 사울이지만 그 빛의 정체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또한 자신 앞에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대답을 반드시 들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태양 빛보다 더 밝은 빛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이고 그 빛 가운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여호와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의 선지자 이사야나 에스겔처럼 랍비 사울 앞에 지금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현신을 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이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랍비가 아니라 선지자로 그 신분이 격상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정경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선지자 말라기 이후 공식적으로 유대 땅에 선지자가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400년 동안이나 선지자가 없이 바리새인 출신인 랍비와 서기관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한 때에 만약 여호와께서 랍비 사울 자신을 선지자로 파송하신다고 하면 그것은 획기적인 대사건입니다. 그것을 기대하면서 랍비 사울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에 랍비 사울이 혼비백산을 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5b). 자신이 질문을 하기 전에 그러한 말을 언뜻 들은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잘못들은 것으로 알고서 확인을 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자신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임재하고 있는 자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3일만에 부활하였다고 그 제자들이 떠들고 있는 나사렛 예수인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실 앞에 랍비 사울은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고 맙니다. 지금까지 선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고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한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던 자신의 말이 모두 공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나사렛 예수를 자신이 그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지금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산술적인 하나의 하나님이신 줄 알고서 지금까지 그렇게 백성들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산술적인 존재가 아니고 둘이나 셋으로 그 위격을 가지고 계시는 신비스러운 창조주라고 하는 사실을 영적인 눈으로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가르치고 있는 여호와신앙은 그 신관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렙 산에도 다녀오고 십년 이상 고향 다소성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게 됩니다.

그는 그가 찾고 있는 진리를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여 하나씩 깨닫게 해주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복음의 지식을 온세상에 다니며 전하게 하는 사명을 또한 맡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의 이름을 그 대단한 베냐민 지파출신의 왕의 이름 사울에서 로마식 이름이며 가장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울이라고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바울이라고 천명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깨닫고 있는 복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지혜로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산술적으로 하나의 신이라고 우기는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피조물인 인간의 수준으로 창조주의 신비를 격하시키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둘째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이 입고 있는 그 몸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육적인 몸이 아니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영적인 몸입니다.

그 새로운 창조의 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이나 다시 공생애를 사시면서 함께 먹고 마시며 말하고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을 입고 그대로 승천을 하십니다. 그것은 선지자 엘리야의 승천과 전혀 다릅니다. 불마차나 회리바람이 조금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베다니에서 되살아난 나사로가 입고 있는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자신의 향년까지 살다가 영원히 잠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썩어질 육적인 몸이 있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적인 몸도 있다고 고린도전서 제15장 제42-4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가, 그와 같은 신관과 부활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진리의 성령님으로 내주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가 있기에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상식과 경험에 비추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아니하는 그 여호와의 신비로운 정체성은 물론 부활과 영생의 구원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속에 새로운 성전을 마련하시면 그곳에 영적으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들어오셔서 성도들과 함께 복음사역을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8:9-18). 그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장막을 벗으면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장막이 기다리고 있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고후5:1-2).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소망과 믿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성도들이 남은 인생 가운데 확신하면서 힘있게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놀라운 생명력으로 영적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8:1-4, 11-17, 35-39, 고후5:3-5).

따라서 복음사역에 전념을 하는 성도들은 살아 생전에 벌써 천국을 경험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그 영생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가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의 부활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성경말씀 가운데 다시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도움이 되도록 사도 바울의 글을 읽어 드리면서 오늘 저의 부활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