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70(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1. 18. 14:17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70(손진길 소설)

 

간도(間島)지역 연길(延吉)강남(江南)에 위치하고 있는 심씨부락(沈氏部落)서당(書堂) 겸 신식학교에서는 2학기제를 운영하고 있다. 1학기는 5월초부터 7월말까지이고 제2학기는 10월초부터 12월말까지이다;

여름방학이 8월과 92달간이고 겨울방학이 정월부터 4월말까지 4달간이다. 겨울방학이 여름방학보다 2배로 긴 것은 간도지역이 워낙 추워서 겨울철이 길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반반이다. 6개월 수업하고 6개월은 방학인 것이다.

따라서 허선비 부부는 여름에 2달간 그리고 겨울에 4달간을 조선에 들어가서 제2의 고향으로 정하고 있는 경주부 내남의 시골집에서 주로 지내고 있다. 그들은 간도와 울산 사이 그 먼 길을 바닷길 직선거리로 빨리 다니기 위하여 신식 터빈선박을 자가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허선비 부부가 간도에 들어오게 되면 그 초입이 되는 두만강 하류 꼭지점 도문(圖們)에서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어부 김혁필에게 자신들의 신식 통통배를 맡겨 두고 있다. 그리고 도문에서 연길을 거쳐 용정까지 가는데 있어서는 이장 김혁필의 마구간에 맡겨 두고 있는 준마 2필을 사용하고 있다.

어부인 김혁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허선비 부부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에 그 신식 통통배를 이용하여 어업을 영위할 수가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좋다. 그렇게 김혁필과 상부상조하면서 허선비 내외는 간도지역과 울산지역을 통통배를 타고서 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88511월초에 연길의 심씨부락에서 그 남쪽의 해란강(海蘭) 유역에 있는 하림부락의 움막집으로 이사를 하자 허선비 부부는 더욱 바빠진다. 그 이유는 아침식사가 끝나면 부부가 말을 타고서 반()시진이나 달려서 북쪽의 연길 심씨부락의 학교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수업은 오후이다. 하지만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아침에 일찍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겨울이 찾아오고 연말이 되고 있다.

그 사이에 허선비 부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이웃에 살고 있는 강무용의 가족을 찾아보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하림부락에서 훈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55세의 하상수 선비의 집을 찾아가서 그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상수는 자신의 가족은 물론 두만강 이남에 살고 있던 처족들을 대거 인도하여 1880년 가을에 해란강 유역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들어온 인물이다. 그가 이끌고 온 처족들의 성씨가 바로 임씨(林氏)이다. 따라서 그들은 지도자인 하상수의 성씨와 자신들의 성씨를 합쳐서 하림부락(河林部落)’이라고 마을이름을 정한 것이다.

벌써 6년째 용정의 하림마을에서 지도자로 그리고 서당의 훈장으로 일하고 있는 하상수(河尙壽)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함경도의 실정은 물론 간도지역의 현실에 대해서도 박식하다. 물론 그가 신봉하고 있는 천주교의 지식도 해박하다.

그러한 하상수허선비가 만나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고급스러운 이야기가 오가게 된다. 그렇게 두 선비가 사랑방에서 속 깊고 뜻깊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최선미하상수의 아내인 임소희(林素姬)와 안방에서 이야기 꽃을 피운다.  

추운 간도지방이지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움막집이 한층 훈훈한 것만 같다. 그런데 한번은 하상수허선비를 보고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형님, 우리 조선인들의 정기가 어려 있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어떠한 큰 강들이 발원하고 있는지 혹시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

너무 쉬운 질문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허선비가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씨익 웃으면서 금방 대답한다; “허허허, 동으로는 백두산에서 두만강(豆滿江)이 흐르고 서로는 압록강(鴨綠江)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는가?... “.

 그 대답에 하상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심각하게 말한다; “저도 수년 전까지는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백두산을 힘들게 등산하고서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조선인 도인 한 분을 만났지요. 그 분이 똑같은 질문을 저에게 했습니다. 당시 저의 대답이 바로 형님의 대답과 같았지요. 그때 그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

깜짝 놀라서 허선비가 경청한다. 하상수의 설명이 들려온다; “압록강은 분명히 백두산에서 발원이 되고 있지만 두만강은 그와 달리 동쪽으로 150리나 떨어진 지점에서 발원이 되고 있다고 그가 말했어요. 그 대신에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큰 강이 하나 발원하고 있는데 그것이 토문강(土門江)이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토문강은 북으로 흘러가서 송화강(松花江)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허선비는 속으로 짚이는 것이 있다. 그래서 급히 물어본다; “그렇다면 그 옛날 숙종시대에 청국과 국경을 정한 두만강이 사실은 토문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백두산에서 발원하고 있는 두 강을 가지고 양국이 국경선을 정했다고 말했으니까!... “.

그 말에 하상수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그렇지요. 그러니 이곳 간도지역은 분명히 조선의 땅입니다. 우리가 주인인데 힘이 약하여 만주족에게 빼앗겼으며 청국의 억지에 따라 토문강이 아니라 두만강이 그만 국경선으로 둔갑하고 만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아주 떳떳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의 강토를 되찾자고 말입니다!”;

하상수 선비의 결기어린 담론이 오랫동안 허선비의 뇌리에 남아있다. 하루는 그 이야기를 아내 최선미에게 해주었더니 그녀가 말하고 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임금과 조정대신들이 신통하지 못하여서 잃어버린 고토를 우리가 되찾으면 되지요!... “.

그 말을 듣자 허선비가 최선미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그런데 그녀의 설명이 간단하다; “함경도 백성들이 더 많이 간도 땅에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토지와 주택을 싸게 제공하면 되지요. 조선백성이 그 지역을 개간하여 삶의 터전으로 차지하고 있으면 그 땅의 주인은 자연히 조선인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에 허선비가 크게 고개를 끄떡이면서 중얼거린다; “그렇다. 진리는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헌신하고 희생할 각오만 확실하다고 하면 진리를 실천할 수가 있다. 예컨대, 형식적으로는 나라의 국경선이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땅에 어느 민족이 다수로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 이제부터… “.

드디어 허선비가 마음속에 모종의 결단을 하고서 그 뜻을 최선미에게 밝힌다; “우리 부부가 거금을 투자하여 해란강 유역의 땅을 그 옛날 구례현에서 그러했듯이 한번 개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움막집이라도 많이 지어서 개간한 논밭을 이주해온 조선백성들에게 싸게 공급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용정지역은 우리 조선인들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하하 “;

그 말을 듣자 최선미는 남편 허선비가 젊은 시절의 호기를 다시 회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대 노년의 나이에 그와 같이 전력투구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거리를 찾았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따라서 최선미가 쌍수로 남편의 의견에 찬성한다.

그때부터 허선비 부부는 바쁘다. 가장 먼저 하림부락의 지도자인 하상수에게 그 뜻을 밝힌다. 그가 자금만 지원해주면 그 일에 발벗고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는 강무용 부부에게 그 뜻을 밝힌다. 그들은 일단 연길로 가서 젊은 부부들을 모아서 이곳으로 이주를 많이 시키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188512월 중순에 합의가 이루어지자 이듬해 정월에 허선비 부부가 통통배를 타고서 울산에 도착한 다음에 자금을 모으는 일을 시작한다. 그들 부부는 오래간만에 김해의 고향을 방문하여 가형 부부를 만난다. 몇 해 전에 벌써 부모님이 별세하였기에 지금은 친형 허상필(許相)이 집안의 가주이다.

허선비가 자신의 뜻을 자세하게 밝히자 허상필이 깊이 생각을 하더니 말한다; “동생 덕분에 내가 여기 고향에서는 대지주로 행세하고 있어. 그러므로 1,000마지기를 전부 팔아갈 수는 없어. 물론 그 소유자는 동생이 맞아. 하지만 이 형의 체면도 있고 하니 절반인 500마지기만 처분하여 가면 어떻겠는가?... “.

가주의 입장인 형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허선비가 순순히 말한다; “좋습니다. 듣고 보니 형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절반만 좋은 값에 팔아서 금괴로 바꾸어 주십시오. 제가 북녘 간도 땅에서 요긴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애초의 생각보다 절반의 자금만이 마련된다. 그렇지만 허선비는 그 부족분을 메꿀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동래의 방직공장무역회사가 호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울산의 장병화에게 운영을 위임해 놓은 통통배 어선에서도 상당한 이익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말에 한해의 결산이 이루어지면 매년 2월에 그 이익배당을 받아서 간도의 용정 일대의 땅을 개간하는데 종자돈으로 사용하고자 허선비가 생각하고 있다. 그와 같이 허선비 부부는 해란강 유역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양지바른 곳에 움막집을 대대적으로 건설하는 일에 매진한다.

따라서 자신들의 주택을 근사하게 짓고자 한 애초의 생각을 버리고 그들 부부는 하림부락의 움막집에서 계속 거처하게 된다. 그것을 보고서 이웃 주민들은 허선비 부부가 간도 용정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조선인의 부락을 세우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그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강산이 한번 변하는 세월 10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1886년 봄에 시작한 일이 1895년에 들어서자 드디어 해란강 유역에 4개의 부락을 조성하는 결실을 맺고 있다. 구체적으로 강 이북에 2개 부락, 강 이남에 2개 부락이 건설된 것이다.

그때 허선비의 나이가 72세이고 최선미의 나이가 71세이다. 그리고 하상수의 나이가 65세이고 그의 부인 임소희의 나이가 63세이다. 또한 강무용의 나이가 51세이고 그의 아내인 오장미의 나이가 50세이다.

그 사이에 강천무가 연길 자경단의 일을 젊은 일꾼에게 맡기고 부부가 용정으로 이사를 했다. 두사람은 허선비 부부가 앞장서고 있는 해란강 유역의 개간일에 적극 참여했다. 개간사업이 얼추 끝나는 시점 1895년에 강천무의 나이가 71세이고 그의 부인 주용녀도 동갑이므로 71세이다.

조선의 나이로 보면 그들은 모두 노령이다. 다만 강무용 부부만이 중년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60대와 70대의 노인이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그 눈에는 투지가 어려 있다. 그 이유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대신들이 하지 아니하고 있는 일을 그들이 앞장서서 간도에서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앞장서서 개간하고 건설한 부락에서는 부지런한 조선의 백성들이 이주하여 들어와서 살게 되자 가장 먼저 주민들에 의하여 학교가 세워지고 교회와 성당이 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사연을 가진 많은 조선의 의병과 지사들이 은밀하게 가족을 솔거하여 농민들과 함께 몰려들고 있다.

특히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에 이어 1890년대에 들어와서 1894년의 동학란, 189510월의 을미사변 등이 발생하여 조선의 운명이 날이 갈수록 암울해지는 것을 보고서 많은 의병과 애국지사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간도로 몰려온 것이다;

 그것을 해란강 유역을 개간하면서 허선비 부부가 실감하고 있다.

10년 세월이 지나자 1896년초에 허선비 부부는 간도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통통배를 타고서 남하를 한다. 73세인 허선비는 배를 몰면서 옆에 앉아 있는 아내 최선미에게 말한다; “여보, 우리는 그동안 12년 세월을 간도지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어요. 이제는 경주 내남의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고 싶군요. 왜냐하면… “.

잠시 말을 멈추고 허선비가 아내의 얼굴을 정답게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그 다음의 일은 젊은 후세대에게 맡겨야 해요. 조선의 운명도 그 미래도 사실은 그들의 선택에 좌우가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우리 세대에 있어서는 우리 부부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고 생각해요. 임금과 조정대신들이 하지 아니하고 있는 일을 우리 부부가 많이 대신했기 때문이지요, 허허허… “.

그렇지만 아직도 정정한 허선비 내외이다. 그들이 과연 내남의 시골집에서 은거만 하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