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6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1. 15. 02:02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67(손진길 소설)

 

허선비는 작년에 그리고 아내인 최선미는 금년 1884년에 만으로 60세이다. 조선나이로는 환갑이 지나고 진갑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업무추진능력이 또한 대단하다.

따라서 허선비 부부는 1884갑신년(甲申年) 4월말에 연길(延吉)의 주막에서 심한수가 서당을 운영하고 있는 심씨(沈氏)부락으로 거처를 옮기고 당장 그곳의 학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두사람은 그해 5월초부터 7월말까지 무려 3달간 집중수업을 진행한다.

그 서당의 학동들은 오전에는 심한수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아울러 조선과 청국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경제 등에 관하여 두루 배우고 있다. 오후시간에는 허선비로부터 1시간반 신학문을 배우는데 그것이 영어와 영국의 역사 및 산업혁명에 관한 지식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다음 1시간반 동안 학생들은 최선미로부터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최근 메이지 유신정부의 부국강병책에 관한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고 있다.

오전에 자신의 수업을 끝낸 훈장 심한수이지만 그는 다른 심씨 원로들과 함께 오후 수업을 참관한다. 그 이유는 그들 역시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싶고 또한 서양과 일본의 근대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조선은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서 개화를 시작한 이후 빠른 속도로 서양열강과 조약을 체결하고 교류를 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일본과 서양에 관한 지식이 굉장히 필요한 시점이다;

비록 두만강을 건너 새로운 살길을 찾아 연길에 들어와서 땅을 일구면서 살아가고 있는 심씨부락의 조선인들이지만 그들 역시 조국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허선비최선미의 수업을 참관하는 그들의 자세가 진지하다.

7월말까지 열강(熱講)을 했더니 8월과 9월에는 방학을 한다고 서당 훈장이며 교장인 심한수가 말한다. 다음 2학기 수업은 10월초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허선비 부부는 일단 도문(圖們)으로 가서 그곳 이장이며 어부인 김혁필에게 맡겨 둔 신식 통통배를 타고서 조선의 동남부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울산 방어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 전에 그들 부부는 연길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무관을 만난다. 그는 요즈음 하루의 일과를 끝낸 청년들을 모아 놓고서 일주일에 3시간 씩 집중적으로 군사훈련을 시키느라고 바쁘다. 그들 청년들은 연길 자경단(自警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주로 제식훈련과 검술 연마이다.

그것을 보고서 허선비는 아내 최선미 상의한 다음에 강천무를 찾아가서 그에게 제안한다; “아우님, 자경단의 간부로 양성하고 있는 자네의 제자들에게는 당장 신식훈련이 필요해. 내가 이번에 조선에 들어가면 자금을 좀 마련하여 오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이곳에서 은밀하게 총기류를 구입하여 제자들에게 총기사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어떨까?... “;

강천무로서는 그야말로 불감청 고소원이다. 따라서 즉시 허선비에게 말한다; “굉필이 형님, 부탁드립니다. 그렇고 말고요. 마적단과 전투를 하려고 해도 이제는 총이 없으면 안되지요. 저도 총기를 밀수하는 사람들에게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돈이 마련되는 대로 얼마라도 좋으니 지원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그 말을 듣자 허선비는 최대한의 지원을 하고자 결심하게 된다.

수년 전 정확하게는 1880년초부터 청국의 조정에서는 두만강과 압록강에 인접하고 있는 간도(間島)지역에 조선백성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청조(淸朝)가 그 땅을 간도(間島)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만주족인 그들의 조상과 조선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 사이에 간도지역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국조정의 입장에서는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조선과 국경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청국의 황제를 섬기고 있는 조선의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청조의 입장에는 반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뿌리가 본래 만주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조선부여 그리고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의 왕가도 사실은 그들의 조상이 만주의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여진족의 한 갈래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우회적으로 그 옛날 간도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예맥족의 부족국가인 읍루(挹婁)북옥저()의 예를 들면서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조선조정의 주장을 청조가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청국의 황제의 위엄을 내세워서 조선의 임금에게 강압을 하더라도 역시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는 이해관계가 극히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서양열강과의 전쟁에서 청국이 패배한 이후이다.

시기적으로 청조가 조선을 무력으로 억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에 따라 그 지역을 그들 사이에 있는 일종의 완충지역인 간도(間島)라고 부르면서 조선의 조정과 추후에 논의할 생각이며 그것이 상책인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대륙을 경영하고 있는 청국의 조정은 노련하다. 따라서 다음 두가지 정책을 은밀하게 실시하고 있다.

그 하나가, 만주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한족 출신 마적단을 활용하여 조선인들이 간도지역에서 북쪽의 만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서서히 한족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한족 정착민들에 기대어 그곳에서 청조가 군대를 양성하는 장기정책이다.

그와 같이 청조(淸朝)가 오랜 세월 유지한 거룩한 조상들 곧 여진족의 땅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정책을 풀고서 피지배민족인 한족의 만주로의 이주를 허가하고 그곳에서 군사력을 키운다고 하는 것은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얼지 아니하는 항구 곧 부동항(不凍港)을 찾아서 남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세력을 국경지대인 만주에서부터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는, 조선에 진출하고 있는 일본군의 북진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청조의 정책에 비추어보면, 간도의 조선인은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다. 그들이 일본군의 조선진출을 싫어하고 있으므로 그 점에 유의하여 간도를 지키는 조선인의 군대를 지원하여 일본군의 만주침략을 일정기간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조는 간도지역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그 거주권을 묵인해주고 있는 입장이다;

그와 같은 청국의 입장과 그 은밀한 정책의 방향을 헤아리고 있는 자가 사실은 허선비이다. 그가 나름대로 청국이 처한 입장을 감안하여 그 정도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 부부가 조선에 있는 재산을 일부 정리하여 강천무가 양성하고 있는 조선인 무관후보자들에게 총기류를 구입하도록 지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신식무기로 무장해야 그들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간도의 동족들을 보호하고 지켜내지 않겠는가? 당장은 만주에서 자생하고 있는 마적 떼의 기습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훗날에는 조선을 노리고 또한 만주까지 얻고자 하는 외세의 침략에도 일격을 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수준까지 조선인 무장세력을 양성할 수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허선비 부부는 우선 그 일에 힘을 보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뒷일은 다음세대가 할 일이다. 당장은 자신들의 세대에 있어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있는 법이다.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해 18849월 하순과 이듬해 18854월 하순에 허선비최선미가 두차례 통통배를 타고서 다시 도문에 들어온다. 그리고 말을 달려서 연길에 도착한다. 물론 그 사이에 허선비 부부는 고향 김해를 방문하여 자신들의 천석지기 땅에서 얻은 그들의 몫을 전부 금괴로 바꾸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간도로 들어와서 강천무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허선비 부부는 조선에 머물고 있는 시기에는 동래에 들러 스즈키 방직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최강일과 아들 허지동을 만난다. 그리고 허가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차남 허지서 부부를 만난다. 또한 신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딸 허정순과 사위 권동률도 만난다. 그들의 가정에는 벌써 2세들이 탄생하여 잘 자라고 있다.

손주들을 볼 때에 허선비최선미는 자신들이 벌써 조부모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재삼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손주들이 살아갈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자신들은 지금 조선과 간도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한 일들을 찾아서 열심히 실천하다가 보면 그들 부부는 어느 사이에 향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향년이 오기 전 아직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이 때에 허선비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아서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주변에 말하고 있다.

그런데 허선비 부부188412월 초순에 조선의 왕도인 한양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 하나의 소식을 듣고 있다. 그것이 바로 김옥균과 박영효 그리고 서재필 등이 주도한 소위 개화당파(開化黨派)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비록 그해 124일에서 6일까지 3일천하로 끝났다고는 하지만 그 사건이 주고 있는 의미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1882년부터 조선의 왕도인 한양에는 일본군과 청국군이 들어와서 설치고 있다. 처음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킨 조선의 구식군대로부터 일본과 청국이 자신들의 공관을 지킨다고 하는 명분을 가지고 조선에 그들의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임오군란 세력이 업어 들인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국으로 잡아간 이후에도 철군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청국의 황제를 섬기고 있는 조선의 국왕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 목적은 조선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청국은 이미 서양세력들에게 전쟁에 져서 많은 이권을 상실하고 있는 소위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그 점을 일본의 명치유신의 원로들이 익히 알고 있는데 조선의 왕비인 민비고종은 여전히 청국군을 의지하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조선의 개화파 가운데 젊은 인물들을 앞장세워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후 즉시 청국군을 한양에서 몰아내고자 시도한다. 그 일에는 일본공사와 공사관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을 지원세력으로 동원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조선의 쿠데타 세력이 먼저 동원한 신식군대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군대이다.

그 쿠데타의 현장이 한양에 세워지는 우정국의 개원 식장이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조선의 조정대신 가운데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재빨리 청국공사관에 쿠데타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에 따라 청국군이 달려와서 순식간에 현장을 에워싸고 만다;

그 전투에서 쿠데타 세력이 동원한 조선의 신식군대가 밀리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조선의 임금이 쿠데타 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만다. 그리고 일본공사의 군대가 개입을 포기한다. 결국 개화당파로 불리고 있는 소장파 곧 김옥균박영효 그리고 서재필 등 쿠데타의 주동자들이 패주하고 만다. 그것이 이름하여 김옥균의 3일 천하이다;

그와 같은 한양의 소식을 전해 듣고서 허선비가 한숨을 쉬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고 있다; “참으로 경륜도 없고 한심한 젊은 개화당파 인물들이구나! 자신들이 한양에 진출하고 있는 청국군과 일본군의 힘겨루기에 있어서 하나의 장기판의 ()이 되고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있으니 그것이 패착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신식군대가 한양에 진출한 일본군이나 청국군을 자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독자적인 개혁과 개방 그리고 조선의 선진화는 공염불에 불과한 것인데!... “.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에도 허선비 부부는 간도의 연길 심씨부락의 서당 겸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신식학문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5월부터 7월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8월과 9월에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지낸다. 그리고 10월부터 12월까지 다시 연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10월에 들어서자 참으로 큰 사건을 만나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