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63(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1. 5. 23:14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63(손진길 소설)

 

허선비 부부가 일본 가고시마를 다녀와서 동래 초량의 료칸에서 김준우 부부를 만나고 있는 시점이 187510월 하순이다. 그때 김준우가 일본을 잘 알고 있는 안동 권씨가 누구인지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의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사돈도 알다시피 나는 20살이 되기 전부터 이곳의 왜관에 취직이 되어 사환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 왜관에는 조선인으로서 저보다 먼저 점원이 된 선배가 한사람 있었어요. 그가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왜관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권상조(權尙朝)인데 그가 바로 안동 권씨입니다. 그는“;

그 옛날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김준우의 눈에 아스라한 그리움이 어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운이 좋아서 당시에 조선인 권상조를 직장선배로 만나 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러한 옛날 이야기를 김준우가 일본인 아내 히로꼬에게도 그동안 말하지 아니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도 허선비 부부와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남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김준우가 간략하게 설명한다; “당시 왜국말조차 서투른 나에게 권상조 선배는 일본의 말과 문화에 관하여 가르쳐주고 왜관 점원의 일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지요. 참으로 내게 있어서는 5살 연상인 그가 직장의 선배이며 좋은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모두가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서 김준우가 이어서 말한다; “그의 성실함과 유능함을 눈 여겨 본 일본인 사장이 젊은 그를 데리고 일본 가고시마로 돌아갔어요. 그 이유는 무남독녀인 자신의 딸과 결혼을 시키고 데릴사위로 삼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후 그 선배를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10년전에 조선에 되돌아온 그를 만났어요. 그의 말로는… “.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온 조선사람이 있다고 하는 귀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김준우의 말이 다음과 같다; “장인과 장모가 전부 돌아가고 나자 그는 부인과 딸을 데리고 조선으로 되돌아왔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가서 이제는 서당에서 학동들에게 일본의 선진문명과 왜국말을 가르치고 있다고 그랬어요”.

그 말을 듣자 허선비가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자신의 딸 허정순이 알고 있다고 하는 권동률이란 젊은이에게 앞길을 열어준 인물이 바로 그자 권상조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젊은이가 그 옛날 왜관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데릴사위로 생활하였다고 하니 그것은 참으로 희귀한 경우이다.

게다가 권상조라고 하는 인물이 허선비가 보기에는 행동하는 선각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에 관한 그의 지식을 고향에서 후진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발전상을 알고서 잘 배워 앞으로 조선의 발전에 기여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베풀고 있으니 그 생각과 행동이 훌륭하다고 허선비가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사돈 김준우에게서 들은 김에 허선비가 한가지를 더 물어본다; “그러면 혹시 사돈께서는 그 옛날 영덕 출신으로서 역시 동래의 왜관에서 점원일을 했던 장병화에 대해서 진작부터 알고 계신 것입니까?... “.

그 말을 듣자 김준우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한다; “알고 있지요. 우리 모두가 그와 함께 일본 가고시마를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장병화는 사실 저보다 4년 정도 늦게 왜관에 들어와서 점원일을 시작한 조선인 청년이었지요. 서로 일하는 점포는 달라도 흔치 아니한 조선인이기에 인사를 하고서 지냈어요. 우리는 사돈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사실은 굉장히 기뻤답니다. 하하하… “.

그 말에 허선비가 한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구나. 일찍 젊은 시절에 왜관에서 일을 하면서 사돈이나 장병화는 한가지 일본인에게서 배운 것이 있구나. 그것은 서로 개인적인 신상이나 친분이야기를 남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말하고 일체 모른 척해주는 것이 그들의 사회규범이구나!... “.

그 정도의 이야기만을 나누고 허선비 부부는 자신들의 영업장이 있는 울산으로 되돌아간다. 그곳 허가물산에서 그들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그해 1875년 겨울에는 통통배를 몰고서 홍콩으로 가야 한다. 영국제 직물을 많이 사와서 창고에 넣어 두어야 울산동래의 점포에서 계속 물건을 팔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분주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듬해 1876년 봄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일찍이 한양의 조정에서 이조 참의를 지낸 경험이 있는 허선비는 조선이 어째서 일본과의 수교가 먼저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내막을 짐작하고 있다. 그가 개인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청국의 황제를 섬기고 있는 사대주의 왕국 조선에서는 매년 북쪽의 만주를 통하여 청국의 황도인 북경으로 많은 사신단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영조와 정조시대에 조선의 사신들이 북경에서 경험한 새로운 것들이 있다. 그것은 서양의 선진문물이 청국에 들어와서 그 사회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1)    그러므로 일부 조선의 학자와 관료들이 이제는 청국을 통하여 서양의 문물을 조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이 이름하여 북학파(北學派)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선의 천재 정약용(丁若鏞)은 아예 서구의 문명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바가 있다;

2)    그러나 1801년 순조때부터 세도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 그러한 변화를 극히 싫어하고 있다.  

(2)  개인적으로 허선비는 흥선군이 집권하게 되면 세도정치가 마감이 되고 기존의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그것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1)    그 결과 그는 다가오는 서양의 산업선진국들의 침범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내기 위하여 자신만이라도 낙향하여 그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대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2)    그 이유는 1864년초에 집권한 흥선대원군10년만인 1873년말에 민비고종에 의하여 권좌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조선의 조정에서는 조심스럽게 나라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는 개화파(開化派)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3)  그런데 1868년에 집권한 일본의 서남번(西南藩) 출신 무사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부번강병책(富藩强兵策)을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산업근대화정책을 실시하고 신식군대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75년에는 해외시장을 얻기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개방을 요구하였다.

1)    먼저 군함 3척을 파견하여 동래의 부산항 가까이에서 함포사격을 했다. 그리고 큰 함선 운요호(雲揚號)를 보내어 강화도에서 포격전을 하고 인근의 작은 섬 영종도(永宗島)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한 직접적인 위협 앞에 조선은 일본과 엄청난 불평등조약을 맺었는데 그것이 1876년 봄에 체결이 된 강화도조약이다.

2)    그 주요내용은 첫째, 일본의 상품을 조선에 무관세로 판매한다는 것이다. 둘째, 당장 부산항을 개항하고 제물포와 원산의 항구를 차례로 개항한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의 연안지역을 다니면서 일본인들이 필요한 측량을 하는 등 치외법권을 무조건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허선비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좋은 시기를 다 놓쳐버린 한양의 조정이 실로 한심하다. 1864년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잘못을 범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개화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산업의 선진화와 신식군대의 양성에 주력했다고 하면 일본의 1868년 명치유신보다는 빨랐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엉뚱하게 헛발질만 하다가 그만 실기를 하여 이제 조선은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노략물이 되고 말았다. 무관세로 들어오는 서양제품과 일본상품에 의하여 조선의 생산품은 절단이 나고 만다. 그들의 공장제 기계공업제품과 비교하면 조선의 후진적인 수공업제품은 경쟁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물건을 구입하기 위하여 조선의 금과 은 그리고 곡식은 무한정 사용이 되고 만다. 그 결과는 비참한 식민지국가의 미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한 미래를 어떻게 하면 면할 수가 있을 것인가? 허선비는 개인적으로 그 방법을 찾고자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쉽게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

그와 같은 시기 1876년 가을에 허선비가 동래의 스즈키 방직공장에 들렀더니 아들 허지동의 윗동서인 최강일이 잠시 뵙기를 청하고 있다. 무슨 일인가 하여 회의실이 비어져 있기에 그곳에서 그를 만난다. 그때 최강일이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다; “지동이 아버님, 그저께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숙부께서 저를 잠시 만나고 가셨어요. 그런데“.

최강일의 숙부라고 하면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경상(慶翔)이다. 허선비는 개인적으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와 인연이 있다. 그러므로 관심이 있어서 최강일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숙부님은 작년에 이름을 최시형(崔時亨)으로 개명을 하셨다고 말했어요. 그 이유가… “;

순간 최강일이 허선비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면서 설명한다; “이제는 때를 따라 순응을 하는 것이 순리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차제에 한가지 당부의 말씀을 저에게 주셨어요. 그것을 허사장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기에 이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

귀를 기울이고 있는 허선비에게 뜻밖의 말이 들려온다; 실기(失期)를 하였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고 때를 잘 지켜보면서 변화의 조짐을 살피게 되면 반드시 실기를 만회할 수가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는 역사섭리를 알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 이치를 조선의 선진화를 위해서 고심하고 있는 지동이 아버님께 말씀드려 두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자 허선비가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거참, 최시형이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있구나. 최제우가 역시 후계자를 잘 세웠구나. 그는 시대의 흐름을 알고 있으며 벌써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인물이야. 우리의 조선이 지금은 침탈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지만 나중에는 발전의 기회를 얻게 된다는 뜻이구만. 그러니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라고 하는 것이야!... ‘.

조용히 눈을 뜨고서 허선비가 최강일에게 말한다; “강일이, 고맙구만. 훗날 숙부님을 만나게 되면 내가 가르침에 대하여 감사드린다고 말씀을 전해 주시게. 그리고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다고도 전해 주시게!”.

허선비1823년생이다. 그러므로 최제우보다는 1살이 많고 최시형보다는 4살 연상이다. 그런데 최제우는 벌써 1864년에 참형을 당하였고 현재 최시형은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의 재건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다시 도망자가 된 것은 1871년에 발생한 이필제(李弼濟)의 난에 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필제의 난은 달리 영해농민의 난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1863년에 동학에 입교한 이필제1871년에 교주 최경상을 설득하여 500명의 동학교도를 모아서 영해도호부를 점령하였다;

그 과정에서 도호부사가 살해가 되고 국고를 털리게 되었다. 일이 커지자 이필제와 최경상이 도피하였으나 이필제는 체포가 되어 그해 말에 처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필제의 난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요구하고 있어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이라고 평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허선비가 보기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하고 있는 조선을 구하자는 측면이 있고 또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을 구하자고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필제의 난은 일종의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고 반봉건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격변하고 있는 조선의 1870년대이다. 그러한 격동의 시기에 50대의 중년인 허선비는 또 어떠한 일을 차분하게 추진하고자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