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6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11. 2. 11:25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61(손진길 소설)

 

그런데 놀랍게도 허선비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말한다; “그래요, 나는 선미 당신의 판단과 예상이 맞다고 생각해요. 실로 탁월한 견해이군요. 일단 조선에 도착하면 내가 양반체면을 내려놓고 상품을 지게에 싣고서 당신을 따라 한번 행상에 나서 보도록 할께요. 게다가… “;

이제는 허선비가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허, 마침 겨울철이니 한해 농사를 잘 지은 지주들과 풍어기를 만났던 선주들이 돈을 좀 만지고 있겠군요. 그러니 우리가 영국제 직물류를 가지고 가서 가가호호 방문해보면 생각보다 쉽게 판로를 개척할 수가 있을 겁니다!.

최선미는 남편 허선비의 결단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야 외가의 양반신분이 회복되어서 7년전에 비로소 관비에서 일약 양반이 되었지만 남편은 그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 신분이 양반이고 더구나 과거에서 차석을 한 수재이다. 그리고 관직을 떠날 때에도 당상관인 이조참의의 벼슬자리에 있었다.

그러한 남편 허선비가 이제는 울산과 동래지역에서 지게에 상품을 지고서 가가호호 방문판매에 나서 보겠다고 한다. 그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그러나 허선비는 아내 최선미제안(提案)에 찬성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하고 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용기인가!...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부인 최선미는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한 기대감도 지니고 있다. 조정에서 참의 벼슬을 지낸 남편 허선비가 울산에 도착하여 스스로 행상에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선비 부부가 홍콩에서 출발하여 긴 항해 끝에 조선의 남해안에 들어서자 하동포구에서 일행인 이인용과 헤어진다. 그들은 내년 여름에 다시 만나 홍콩을 다녀오기로 단단히 약속하고 있다. 그 다음에 허선비최선미는 자신들의 통통배를 몰고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 부부는 연말이 되지 아니하였지만 이왕 하동까지 온 김에 북상하여 구례의 곡물상인 김상준을 만나고자 한다. 생각보다 빨리 왔지만 김상준허선비에게 구례의 전답을 벌써 전부 처분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백미 5천석에 해당하는 거액의 환을 한 장 끊어준다;

그것을 보고서 허선비가 물어본다; “그 사이에 김행수는 어떻게 천마지기의 논을 다 파신 것입니까? 그것 참 신통합니다“. 그 말에 김상준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허허허, 나주평야의 지주들 가운데에는 천석꾼 뿐만 아니라 만석꾼도 있지요. 그러니 그들의 재력으로는 구례의 천마지기 정도는 너끈히 인수하고도 남습니다, 하하하 “.

그 말을 듣고서 놀라고 있는 허선비에게 김상준은 재미가 있는지 부연설명을 한다; “물론 조선 최고의 지주는 나주평야가 아니라 호남평야가 있는 전주와 김제 그리고 부안에 있지요. 내가 듣기로는 무려 10만석 지기 농토를 가진 지주가 한 명 있는데 김씨인 그가 조선제일의 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

김상준의 결론이 다음과 같다; “나주의 만석꾼만 하더라도 그 재력이 실로 대단하더군요. 단번에 허선비의 매물을 전부 인수하고 말았어요. 따라서 잘 안 팔리면 제가 개인적으로 좋은 값에 인수하려고 했더니 그 기회가 아예 오지도 않더군요, 하하하… .

그 말을 듣고서 허선비는 나주평야의 비옥함과 만석꾼의 부유함을 새삼 머리에 그려본다. 그런데 북쪽의 호남평야에는 그보다 더 거부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말 그대로 조선에서는 호남평야와 나주평야가 가장 소출이 많고 비옥하다;

그러니 옛날부터 북쪽의 전주와 남쪽의 나주를 합하여 전라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거둔 양곡을 조운선(漕運船)으로 한양에 운반하여 조창(漕倉)에 나누어 보관한다. 그 곡식으로 왕궁과 조정의 관리들이 일년을 먹고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허선비는 벌써 6년 전에 조정을 떠난 몸이다. 그는 조정에서 주는 녹봉이 아니라 구례의 천석지기 논에서 나오는 곡수와 고향 김해에 마련해둔 또 천석지기 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넉넉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처분하여 새로운 사업을 펼치고자 한다.

그것이 하나는, 방직공장의 설립이고 또 하나는, 무역상회의 설립이다. 둘 다 조선에서는 선구자적인 창업이다. 방직공장은 동래에 무역상회는 울산에 설립할 생각이다. 금년에는 자금을 준비하고 내년에는 본격적인 창업에 나서고자 허선비는 속으로 계획하고 있다.

구례의 거상 김상준으로부터 거액의 환을 받자 그와 헤어진 허선비 부부는 자신의 통통배를 타고서 남해안을 지나 동해안으로 들어선다. 마침내 울산 방어진 항구에 도착하자 홍콩에서 구입해온 물품을 전부 자신들의 집에 있는 큰 창고로 옮기는 일부터 처리한다.

그 작업을 끝내고 나니 1871 12월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기 위하여 허선비 부부는 다음날 1222일부터 당장 행상에 나선다. 먼저는 울산 시내로 들어가서 아는 선주 집을 방문한다. 그들은 작년 가을에 허선비와 함께 홍콩에 들러서 통통배를 구입한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허선비 부부가 홍콩에서 사온 면직물과 모직물을 보여주었더니 그들은 군말없이 좋은 값에 사주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용기가 생긴 허선비는 포항과 영덕을 연이어 방문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통통배를 구입한 선주들이 그곳에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이 맞다. 포항을 방문하였더니 그곳의 선주들이 이웃에 살고 있는 부자 친구들을 불러와서 함께 허선비 부부가 가지고 온 물건을 모조리 사주고 있다;

그러므로 허선비 부부는 영덕을 들리지도 못한다. 전부 포항에서 팔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서 용기 백배한 허선비가 다음해 1872년 초여름에 울산시내에 상점을 하나 개설한다. 그 이름이 ‘허가물산(許家物産)이다. 그해 가을에 그 상점의 창고에 영국제품이 입고가 된다.

그 물건을 사기 위하여 허선비 부부가 1872년 한여름에 통통배를 타고서 홍콩을 다녀온 것이다. 물론 바닷길에 익숙한 이인용의 도움을 받아서 함께 다녀온 것이다. 그렇지만 이듬해 1873년부터는 이인용의 도움이 없이도 두사람이 대()항해의 모험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허선비최선미는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1872년 봄에 허선비 부부가 일부러 동래에 들러서 김준우 부부를 태우고 통통배로 일본의 가고시마를 방문한다. 이틀간 꼬박 운전하여 바닷길로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이다. 그곳에서 히로꼬의 친정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을 먼저 찾아간다.

허정순을 만나고 아라키 부부에게 인사를 나눈 다음날에는 아라키의 아들 스즈키가 경영하고 있는 방직공장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연수를 받고 있는 최강일 부부와 허지동 부부를 만난다. 일년간 열심히 일했는지 두 쌍의 부부의 얼굴에서 건강미가 흐르고 있다.

그날 저녁에 스즈키가 부모님의 집을 찾아와서 함께 식사를 한다. 차를 마시는 시간에 허선비김준우가 스즈키를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김준우가 허선비를 대신하여 일본어로 말한다; 스즈키 형님, 우리 조선에 스즈키 방직공장을 하나 만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재원은 여기 사돈인 허선비가 전부 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 말을 듣자 스즈키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젊은 조카부부를 나의 공장에 일년간 연수를 시킨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짐작하고 있었어요. 좋습니다. 나도 방직공장을 조선에 하나 짓고서 한번 경영해보고 싶군요. 그리고 그 경영에는 사돈 뿐만이 아니고 내 동생 히로꼬 부부도 참여하면 좋겠군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허선비가 금방 이해를 한다. 따라서 스즈키에게 말한다; 스즈키 형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안사돈 히로꼬를 조선 방직공장의 대표로 내세우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좋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이 조선의 동래에 방직공장을 세워서 경영하겠다고 하면 조선의 동래도호부에서도 반대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탁견입니다!”;

그 말을 듣자 스즈키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지요. 아직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 수교가 되어 있지 아니하여 여러가지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래의 왜관이 있는 곳 가까이에서 그러한 보조시설로서 방직공장을 일본사람이 세우고 경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러가지로 설득력이 있지요. 금방 이해를 해주니 사돈이 고맙습니다, 하하하… “.

역시 스즈키는 사업가이다. 일본과 수교관계가 없는 쇄국정책의 조선에 신식 방직공장을 세운다고 할 때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것인지 벌써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의견을 십분 참조하여 그해 1972년 한해동안 허선비 부부와 김준우 부부는 일본에서 방직기계를 들여와서 동래에서 그들이 마련한 부지의 공장안에 설치하고 조선 최초의 방직공장을 만들어 경영하느라고 분주하다;

겉으로 보면 증기기관방적기 그리고 직조기를 들여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동래의 공장에 그것들을 설치하고 조선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방적기계로 실을 뽑고 그 실로 직조기에서 천을 자동으로 만들어내자 그것을 보는 조선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고 있다.

밤새 길삼을 하고 물레를 돌리고 베틀에 앉아서 여인들이 수고를 하여야 조금의 천을 얻을 수가 있는데 방직공장에서는 해가 있는 낮 동안에 자동적으로 실을 뽑아내고 천을 짜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문명의 세계가 조선사람의 눈앞에서 전개가 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장 가슴이 벅찬 사람이 바로 허선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중얼거리고 있다; 그래, 내가 이조참의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한 것이 참으로 잘한 일이야. 그 결과 이렇게 조선땅에서 처음으로 방직공장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지. 아무렴 잘한 일이고 말고! 백 번 잘한 일이지... “;

그런데 1872년에 동래에는 방직공장을 세우고 또한 울산에는 허가물산을 세워서 경영을 하자니 허선비가 너무 바쁘다. 따라서 그는 동래의 방직공장의 제반업무를 김준우 부부와 최강일 부부 그리고 허지동 부부에게 일임한다. 사장에는 일본사람인 히로꼬를 내세우고 그 남편 김준우에게 부사장을 맡긴다.

그리고 공장에 방직기계를 설치하는 일과 증기기관을 가동하는 일 그리고 방적기와 직조기를 운전하고 수리하는 일 등을 전부 최강일허지동에게 일임한다. 두사람의 부인들인 아끼꼬다마꼬는 조선인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키고 실무에 배치하느라고 바쁘다.

그해 1872년 겨울에는 스즈끼 조선방직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왜관의 스즈끼 상점에서 판매하기 시작한다. 왜관에 점포를 마련하는데 있어서는 그곳에서 일하던 최강일의 공이 크다.

일이 그렇게 잘 돌아가자 허선비는 울산에 마련한 무역상회의 운영에 전념한다. 1872년 여름에 홍콩에 가서 구입한 물품이 가을에 전부 매진이 된다. 그것을 보고서 허선비 부부는 그해 겨울에 다시 홍콩을 방문하여 물건을 구입하여 온다.

그리고 이듬해 1873년부터는 아예 정기적으로 여름과 겨울 두차례 홍콩을 방문하여 물건을 구입한다. 점점 판매량이 늘어나자 허선비는 동래에 허가물산 분점으로 허가상회를 낸다;

 그때가 1874년 가을이다. 허선비의 무역상회는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과연 조선의 조정에서는 언제 개화에 나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