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창세기 제22장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경외자가 되고 있는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0. 31. 04:56

제목; “창세기 제22장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경외자가 되고 있는가”(22:1-24)

설교일; 주후 202311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31일 화요일 작성)

 

창세기 제21장 제33절의 기록에서 아브라함 믿음의 절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제12장 제1-3절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모두 성취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그곳에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주일에 창세기 제21장의 내용 전체 곧 34절에 이르는 (, chapter)의 구절 전부를 본문으로 삼아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내용 가운데 오늘의 강해설교와 관련하여 필요한 대목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브라함은 창세기 제12장 제1-3절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블레셋 족속의 연맹왕 아비멜렉이 소유하고 있는 그랄 평야의 동쪽 변경인 브엘세바에서 전부 성취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깨닫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21:33);

1)   여호와께서는 서장자 이스마엘을 돌보시고 세상적인 복을 주어 큰 나라를 이루게 할 것이라고 벌써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17:20). 그 말씀에 의지하여 아브라함이 하갈 모자를 광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란광야에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21:17-21).

2)   약속의 아들 이삭을 세상적인 관념을 뛰어넘어 여호와의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십니다(21:5-7).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자손의 번성이 확실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2:2a). 요컨대, 첫번째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성취가 된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3)   그리고 블레셋 5도시국가의 연맹왕인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21:31).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두번째 축복의 언약이 성취가 됨을 느끼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연맹왕과 당당하게 일대일로 조약을 체결하고 있으니 아브라함의 이름의 창대함이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12:2b).

4)   평화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그랄 평야에서 우물을 여러 번 팠으나 그 우물을 전부 원주민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21:15-26). 아브라함은 자신이 판 우물물을 여호와의 네번째 축복의 언약에 의거하여 원주민들과 나누어 가졌지만(12:3b), 원주민 블레셋 족속들의 탐욕이 지나쳤던 것입니다.

5)   그랄 땅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세번째 축복의 언약이 강력하게 임하고 있는 것을(12:3a)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과 아내 사라를 두텁게 보호하여 주시는 은혜가 그랄 땅에서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20:7, 17-18). 그와 같이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 4가지가 전부 성취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21:33). 그 깊은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6)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모두 달성되었지만 이방 땅에서 여호와신앙인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아브라함은 한가지 남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본향인 영생하시는 여호와께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4:26, 셋과 에노스의 경우, 5:24, 휴거한 에녹의 경우, 21:33, 영생을 소원하는 아브라함의 경우).

7)   요컨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죄인의 몸을 벗고 영생의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숙을 이룬 아브라함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알기 쉽게 언급하고 있으며(8:56, 5:27-29, 3:13-17) 또한 히브리서저자가 그의 믿음의 장()히브리서 제11장 제16에서 재삼 지적하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믿음의 성숙을 이룬 아브라함의 마지막 기도가 언제 성취가 되는 것일까요? 그 점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구속자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1)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시고 육신적인 생을 마감하십니다. 그 은혜를 알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의인으로 간주가 된 성도에게는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그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십니다.

2)   그와 같은 은혜를 입고서 남은 인생을 여호와신앙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28:18-20, 1:8) 천국에 입성하는 영생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2:28-30).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에 안장이 되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5:27-29).

3)   그때 성도들은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으로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살전4:16, 21:27). 그와 같은 의미를 벌써 지니고 있는 본문 제21장 제33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이 세상의 평안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생을 확실하게 소망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 다음 장인 창세기 제22장에서 모리아산의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22:1-2).

(3) 창세기 제21장 제33절 말씀을 자세하게 구절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은 소중한 사실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1)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아비멜렉과 비골은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아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왕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32).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결코 여호와를 창조주로 모심으로 인하여 구원의 축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잘 보여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만 맺으면 그만이지 여호와를 창조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행동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것이 곧 무당을 이용하여 신의 노여움만 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며 세속적인 행동 양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는 아비멜렉과 비골이 떠나고 나자 브엘세바의 우물가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한가지 소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33). 그의 기도는 창세기 제4장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아담의 아들 셋의 간구와 흡사한 것입니다(4:26).

3) 세상적인 눈으로 보게 되면 에셀나무는 가나안 땅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바늘잎을 가진 사철수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관상수나 기념식수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셀나무(Tamarisk tree)는 한가지 보이지 아니하는 큰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지상의 높이가 10미터라고 한다면 그 뿌리는 그 3배에 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렇게 30미터까지 뻗어서 생수를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모습이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수를 찾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4:10). 천국을 얻고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재산과 재능을 사용하여 보화가 묻혀 있는 넓은 밭을 전부 사고서 그 다음에는 그 보화를 찾아내고자 전력투구를 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의 삶의 모습을(13:44)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나무가 바로 에셀나무라고 하겠습니다.

5)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브엘세바에 심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한가지 마지막 소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몸을 벗고서 영생의 몸을 입고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는 구원주를 이 세상에 보내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훗날 예수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구속자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그와 같은 사실을 참고하여 본문 창세기 제22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알 수가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영생구원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지 시험하시는 여호와(1-2).

(2)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과 ()어른 청년 이삭의 순종(3-10).

(3)  약속의 아들 이삭을 대담하게 번제물로 바치고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속 믿음은 무엇인 것일가?(8, 참고말씀은 히11:17-19절임)

(4)  인신제사를 원하고 있는 잡신(雜神 곧 우상들)과 창조주 하나님의 차이점을 아브라함이 벌써 알고 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21:1-7, 13-21)

1)    새로운 창조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의 인정(21:1-7).

2)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발견(21:13-21).

(5)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역사하심(22:11-14, 참고구절은 요1:29, 36절임)

(6)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후손에 대한 여호와 축복의 재확인(22:15-19).

(7)  이삭의 믿음의 아내를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손 가운데 미리 준비하고 계시는 여호와 이레의 축복(22:20-24, 24:10-20, 31, 50-51, 58-6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간략하게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그일(브엘세바에서 발생한 일, 특히 우물가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종국적인 믿음을 보신)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그의 믿음이 확고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여)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인격적인 대화를 원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부르시는 것임)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훗날 솔로몬성전이 자리잡게 되는 곳임, 대하3:1)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우상에게 인신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명령하시는 것이 이상함. 그렇지만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그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11:17-19).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그 실천에  주저함이 없음)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4. 3일에(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85km를 가는데 3일이 걸리고 있음)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 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노인 아브라함보다 힘이 센 17세 이상의 준()어른 청년 이삭임을 은근히 말하고 있음)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아버지가 칼과 불을 들고 있다고 하면 제물은 이삭 자신이며 그것은 인신제사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총명한 이삭이 벌써 짐작하고 있는 것임)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여호와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지자 아브라함이 확신하고 있음. 3:4,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다른 제물을 여호와께서 이미 준비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는 것임. 그것이 소위 여호와 이레의 신앙임)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 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나무 위에 놓고(스스로 결박을 당하고 있는 이삭의 모습이 훗날 스스로 체포를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의 예표가 되고 있음, 26:52-57),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이제는 일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음. 과연 여호와는 어떠한 조치를 긴급하게 취하실 것인가?)”(22:1-10);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 그일(브엘세바에서 발생한 일, 특히 우물가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종국적인 믿음을 보신)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그의 믿음이 확고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여)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인격적인 대화를 원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부르시는 것임)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훗날 솔로몬성전이 자리잡게 되는 곳임, 대하3:1)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우상에게 인신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명령하시는 것이 이상함. 그렇지만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그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11:17-19).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그 실천에  주저함이 없음)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4. 3일에(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 85km를 가는데 3일이 걸리고 있음)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 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고”(22:1-5);

1)    아브라함의 종국적인 여호와신앙 곧 영생구원의 믿음에 대한 여호와의 시험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손의 번성의 초석이 되고 있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아예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완전히 불로 태워버리는 번제(燔祭, burning offering)로 바치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2). 그렇게 되면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또한 여호와의 선지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의 말년의 성취가 전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어려운 시험을 치르게 되는 아브라함의 결단은 과연 무엇일까요?

2)    아브라함의 내심이 밝혀지지 아니한 채 여기서는 단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다음날 새벽 일찍 번제를 드릴 만반의 준비를 하여 길을 떠나고 있는 아브라함 부자의 모습만이 기술되고 있습니다(3). 그들이 살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이 있는 시온까지는 참으로 먼 길입니다. 그 산이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하는데 장정의 빠른 걸음으로 2일반이 걸리고 있습니다(4). 더 가까이 접근한 다음에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에 두고서 이삭만을 데리고 번제를 드리고자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5a).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그것을 여기서는 예배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습니다(5b).

(2)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노인 아브라함보다 힘이 센 17세 이상의 준()어른 청년 이삭임을 은근히 말하고 있음)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아버지가 칼과 불을 들고 있다고 하면 제물은 이삭 자신이며 그것은 인신제사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총명한 이삭이 벌써 짐작하고 있는 것임)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여호와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지자 아브라함이 확신하고 있음. 3:4, 그러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다른 제물을 여호와께서 이미 준비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는 것임. 그것이 소위 여호와 이레의 신앙임)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22:6-8);

1)    가까이 접근하였더니 해발고도 800미터로 보이는 벼랑 위에 모리아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과 칼을 아브라함이 들고 무거운 장작은 청년 이삭의 등에 지우고서 부자간에 벼랑을 타고 올라갑니다(6). 신중한 젊은이 이삭이지만 부친이 하는 모습이 심히 이상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7).

2)    우문현답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마침내 이상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내심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의미는 첫째, 여호와는 전능하신 능력의 소유자이므로 그 말씀 그대로 실천하면 새로운 창조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그것은 노인부부를 치유하고 젊게 만들어 약속의 아들을 얻게 하고 자손의 번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는 자신이 맺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언약의 성취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방법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사용하여 자손의 번성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4)    셋째, 멸망의 심판보다는 회개와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이심을 선지자 아브라함이 체험하고 있습니다(18:32, 20:7, 17-18).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는 결정을 하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인신제사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번제를 드리게 할 것이고 이삭의 생명을 살리실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11:17-19). 그와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제8절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3)  9. 하나님이 그(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 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나무 위에 놓고(스스로 결박을 당하고 있는 이삭의 모습이 훗날 스스로 체포를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의 예표가 되고 있음, 26:52-57),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이제는 일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음. 과연 여호와는 어떠한 조치를 긴급하게 취하실 것인가?)”(22:9-10);

1)    무거운 장작을 지고 있는 젊은이 이삭이 노인인 부친 아브라함보다는 힘이 더 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저항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번제의 제물이 되고자 결박을 당하고 또한 장작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9).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2)    이삭이 부친 아브라함의 그 우문현답을 진실로 믿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가나안 땅과 애굽 그리고 그랄 땅에서 지난 40년 이상을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온 결과 아브라함이 얻게 된 그 성숙한 경지의 여호와신앙을 젊은 이삭이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친을 원망하지만 묵묵히 그 뜻에 따르고 있는 이삭의 순종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드디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기 위하여 칼로 그 몸을 쪼개고자 합니다. 그 순서는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가장 먼저 머리를 자르고 그 다음에 사지를 절단합니다. 그리고 몸체를 여러 동강으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칼로 이삭의 목을 내리치려고 합니다(10). 내심 여호와의 개입을 바라고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초조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둘째로,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워낙 다급하여 소리가 먼저 들리고 있는 것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이미 짐작하고서 느긋하게 대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 아무 일도 하지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선민 이방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자와 아닌 자로 구분이 되고 있는 것임).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8절 말씀의 재확인임),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하나님이 대신 준비하신 제물임을 벌써 아브라함이 알고 있기에 별도의 말씀이 없더라도 그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임)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이는 훗날 대속자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음, 1:29, 36).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모리아산에 성전이 세워지고 제물이 그곳에서 준비가 되고 있는 것임, 대하3:1) 준비되리라 하더라(훗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죄가 되고 있는 것임).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임마누엘 및 동행의 복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구원의 큰 복을 말하고 있음, 12:3a, 22:28-30)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우주를 별로 채운다고 하면 약 1024승 개로 알려지고 있음),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지구를 모래로 꽉 채운다고 하면 그 역시 약 1024승 개라고 말하고 있음. 이는 자손의 번성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임, 12:2a),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아브라함 후손의 창성함을 말하고 있는 것임, 12:2b, 45:1-3, 이는 페르시아의 창건자로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키는 고레스 황제에게 준 축복과 같은 것임). 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12:3b, 아브라함의 자손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인 마리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는 것임, 1:5, 36-38. 그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임, 28:18-20)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2:1-5, 부자 아버지 데라의 재산상속권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였더니 4가지 축복의 언약이 발동하기 시작하고 있음.  22:1-12, 또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모리아산에 와서 이 세상에서의 성취를 전부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에 비로소 여호와 경외자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것임).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아비멜렉의 영토 변방인)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22:11-19); 역시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워낙 다급하여 소리가 먼저 들리고 있는 것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이미 짐작하고서 느긋하게 대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 아무 일도 하지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선민 이방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자와 아닌 자로 구분이 되고 있는 것임) ”(22:11-12);

1)    아브라함이 짧은 시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여호와의 말씀이 하늘에서 긴급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11).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하는 의식을 당장에 중단하라는 것입니다(12a).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실 영생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예배가 그저 형식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자신이 가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치고서 영생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여호와의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2)    이제 그 어려운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경외자라는 최고의 칭호를 얻고 있습니다(12b). 그에 따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가는 후손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성취를 아낌없이 여호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바칠 때에 동일하게 하나님 경외자라는 칭찬을 받고 천국의 백성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선민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인위적인 이분법을 벗어나는 진실한 여호와의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5:43-48, 25:40-46, 22:28-30);

  

(2)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8절 말씀의 재확인임),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하나님이 대신 준비하신 제물임을 벌써 아브라함이 알고 있기에 별도의 말씀이 없더라도 그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임)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이는 훗날 대속자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음, 1:29, 36).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모리아산에 성전이 세워지고 제물이 그곳에서 준비가 되고 있는 것임, 대하3:1) 준비되리라 하더라(훗날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죄가 되고 있는 것임) ”(22:13-14);

1)    자신이 믿고 있는 창조주 여호와의 뜻이 확인되었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경쾌합니다. 그는 즉시 주위를 살펴보고서 여호와께서 모리아산에서 준비하신 제물을 찾아내고 있습니다(13a). 수풀로 다가가서 뿔이 가지에 걸려 있는 그 숫양을 잡아와서 번제물로 사용합니다(13b);

2)    약속의 아들 이삭을 살리고 있는 그 여호와 이레의 대속물인 숫양의 의미가 훗날 만민구원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로 그대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14). 구약시대에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비록 불완전하지만 율법에 따라 가축을 번제물로 사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3)    그러나 만민구원의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의 희생제물로 사용하십니다(9:12-15). 그 의도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3)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임마누엘 및 동행의 복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구원의 큰 복을 말하고 있음, 12:3a, 22:28-30)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우주를 별로 채운다고 하면 약 1024승개로 알려지고 있음),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지구를 모래로 꽉 채운다고 하면 그 역시 약 1024승개라고 말하고 있음. 이는 자손의 번성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임, 12:2a),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아브라함 후손의 창성함을 말하고 있는 것임, 12:2b, 45:1-3, 이는 페르시아의 창건자로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키는 고레스 황제에게 준 축복과 같은 것임). 18.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12:3b, 아브라함의 자손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인 마리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는 것임, 1:5, 36-38. 그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임, 28:18-20)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2:1-5, 부자 아버지 데라의 재산상속권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였더니 4가지 축복의 언약이 발동하기 시작하고 있음.  22:1-12, 또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모리아산에 와서 이 세상에서의 성취를 전부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에 비로소 여호와 경외자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것임).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아비멜렉의 영토 변방인)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22:15-19);

1)    아브람이 독자적인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에 그는 부친 데라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하고 대신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을 얻고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12:1-5). 그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이 이방 땅에서 얻은 모든 성취와 함께 자손의 번성의 초석이 되고 있는 후계자 이삭마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바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15-16). 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개인에게 약속하신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이제는 그의 후손 모두에게 적용이 되는 것으로 확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여호와의 축복의 말씀이 제17-18절입니다.

2)    특히 제17절 앞부분에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경지의 복을 벌써 뛰어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복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이 가게 되는 모든 이방 땅에서 주어지게 됩니다(4:16).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의미를 벌써 말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여호와의 칭찬과 약속의 언약을 얻은 아브라함이지만 당장 이 세상에 있어서는 그랄 평야의 변방 브엘세바로 되돌아가서 블레섹 족속에게 여호와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19).

셋째로, “20. 이일(모리아산의 일) 후에 어떤 사람이(하란 나홀의 성을 다녀온 사람임, 24:10)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아브라함이 나홀의 이복형임을 알고 있는 것임, 11:26), (하란의 딸) 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11:29). 21. 그의 맏아들의 이름은 우스(여호와의 제사장 욥이 우스 족속임, 1:1, 42:8),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아들랍과 브두엘이라. 23. 8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아람의 32소왕국의 하나인 마아가 족속을 이루게 됨, 12:5, 삼하10:6)를 낳았더라”(22:20-24);

1)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 족장은 두가지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나는, 여호와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의 조상들은 여호와신앙을 파수한 의인들입니다(10:10-24). 그리고 족장 데라 역시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서진을 한 사람입니다(11:31). 또 하나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 하란 땅에서 세상 욕심에 이끌리어 그만 여호와의 명령을 끝까지 실천하지 아니한 도중하차의 인물입니다(11:32).

2)    당시 145세의 데라 족장은 장남 아브람과 장손 롯의 가족이 자신을 하란 땅에 버려 두고 믿음의 길을 떠나버리자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향에 머물고 있는 차남 나홀을 하란으로 이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족장 데라는 205세 향년이 될 때까지 차남 나홀의 가족과 함께 하란에서 신도시를 개발합니다(7:4). 그 성읍이 훗날 차남에게 상속이 되어 나홀의 성’(the city of Nahor, NRSV)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24:10).

3)    본문에서 나홀의 자손의 이름이 수록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과는 달리 여호와신앙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여호와신앙인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도록 조치하고 계십니다(17:19, 21:1-7, 4:2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의 아내는 그래도 여호와신앙이 일부 살아 있는 나홀의 자손 가운데서 선택하는 것이 옳습니다(24:3-4). 그래서 모세는 나홀의 족보를 먼저 여기에 수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0-24).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여호와 앞에서 영원히 그 자녀로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21:33). 구체적으로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4가지 축복의 언약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영생의 구원입니다.

과연 그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 사실일까요? 그 점을 시험하고 계시는 여호와이십니다(22:1-2). 그 결과 아브라함의 행동이 진심입니다. 크게 놀라신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급히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하는 그를 말리고 있습니다(10-12).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진정한 여호와 경외자라고 부르시고(12) 또한 그에게 큰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17). 큰 복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께서 하나님 경외자에게 주시는 영생구원의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생구원의 축복은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에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벨라 굴에 들어가서 안장이 되는 아브라함 역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 부활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5:27-29, 8:56).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을 깊이 음미하시면서 아브라함이 구약시대에 벌써 얻고 있는 그 큰 복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가 확실하게 얻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