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세관장 삭개오와 사도 마태에게서 볼 수 있는 회개와 회계(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0. 9. 23:39

제목; “세관장 삭개오와 사도 마태에게서 볼 수 있는 회개와 회계”(19:1-10, 9:9-13, 25:40-46, 참고구절은 눅19:11-27, 5:27-39, 9:14-17, 58:6절임)

설교일; 주후 2023101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10일 화요일 작성)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국가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로마제국에서 속국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의하여 종교적으로 유대교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을 뿐 정치적으로는 외세에 의한 지배를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헤롯왕가와 로마총독이 유대인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헤롯왕가는 역사적으로 주전 2세기에 유대교로 개종하여 겨우 살아남은 일부 에돔 족속 곧 가나안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이두매인 출신의 헤롯대왕이 만든 왕가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는 헤롯대왕의 아들들이 분봉왕으로서 로마황제의 신임을 받아 갈릴리지역과 그 북방지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황제가 파견한 유대총독이 예루살렘과 유대 및 사마리아 지역을 군정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가나안지역은 변방이며 그 규모가 작습니다. 그에 따라 유대총독의 권세가 그리 크지 못합니다. 정치적으로 유대총독은 넓은 지역을 군정으로 다스리고 있는 시리아총독의 감독을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실제로 많은 로마의 군대는 시리아총독이 지휘하고 있으며 유대총독은 2명의 천부장을 휘하에 두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총독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로 쉽게 갈 수 있는 항구도시 가이사라에 총독부를 두고 있으며 그곳에  대부분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절기가 되면 수많은 순례객들이 국내외에서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고 있으므로 그때에는 유대총독이 그곳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불가피하게 한사람의 천부장과 함께 총독부의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주둔하게 됩니다.

그러한 실정이므로 헤롯왕가가 다스리고 있는 갈릴리 등의 변방지역에 많은 군대를 파견하거나 주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저 몇 사람의 백부장이 지휘하고 있는 군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의 분봉왕들이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나름대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유대 땅에서 반란이 발생한 때에는 유대총독이 즉각 시리아총독에게 보고하고 시리아의 로마군단이 들어와서 진압하도록 제도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반란이 진압되지 아니할 경우에는 로마황제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로마황제가 사령관을 임명하고 원정군을 파견하도록 되어 있는데 주후 70년에 실제로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이 가나안에서 추방되고 만 것입니다;

그와 같이 로마제국의 속국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의무적으로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하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법에 따라 속국에서는 내국세관세를 거두고 있습니다. 행정적으로, 세무서세관이 그 일을 나누어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국세를 거두고 있는 세무서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의 반감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국세를 거두어 헤롯왕가와 유대총독이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을 위하여 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세를 거두고 있는 세관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의 시선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관이 거둔 관세 가운데 행정비용을 제외하고 모조리 로마시로 보내어 황제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유대인 세관원들은 동족으로부터 매국노이며 이방인보다도 못한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속사정을 예수님이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의 대도시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레위를 불러서 제자로 삼으시고 그를 사도의 하나로 발령하십니다. 그것을 보고서 갈릴리 사람들이 선지자로 불리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사상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의 하나가 된 레위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동족으로부터 죄인이라고 비난 받고 있는 자신을 제자로 삼아 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모두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담아 스스로 마태라고 개명합니다;

 

그리고 사도 마태는 주후 60년대초에 젊은 성도 마가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수록한 복음서를 헬라어로 기록하여 초대교회에 회람하자 자신도 그 일에 착수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당시 유일하게 헬라어를 사용할 수 있는 유식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스스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마태는 스승이신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살아갔기에 1.5세대의 제자인 마가보다는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그의 복음서에 더욱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동족으로부터 죄인취급을 받고 있는 자에게 어째서 그리스도가 찾아오셨는지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마태는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수님의 비유를 기록하면서 은근히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달란트의 비유입니다.

그 핵심내용은 회개한 성도에 대하여 훗날 주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갔는지 반드시 회계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있는 선민은 물론 선민들이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방인들을 전부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만민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이방인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일했는지를 증명하고 주인 앞에서 그 결산에 대하여 회계를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마치 장사꾼이 주인에게서 달란트를 원금으로 받아 열심히 장사하여 얼마의 이문을 남겼는지 그렇게 구체적인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성도들이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있는 작은 자에게 인간대접을 해주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면 그것이 회개한 성도들이 주님 앞에 내놓을 수가 있는 떳떳한 결과물입니다. 그와 같이 실천한 성도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칭찬과 영생의 구원이 천국에서 상급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사도 마태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한 성도들이 그 인생의 끝에 부활하여 주님 앞에 내놓을 수가 있는 회계의 장부인 셈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이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에서는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가 회개할 때에 그가 결단하고 있는 색다른 회계의 모습으로 더욱 알기 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삭개오는 말 뿐인 회개에 결코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거짓으로 착취한 것이 있다고 하면 율법이 정하고 있는 갑절의 배상이 아니라 그 2배인 4로 갚을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과감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동참하겠다고 감격스럽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회개와 더불어 실천적인 회계를 하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의 이야기를 수록하면서 누가복음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바로 이어서 예수님의 므나의 비유를 싣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연결하여 배치하고 있는 이유는 회개한 성도들이 남은 인생을 통하여 계산을 주님 앞에서 똑바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칭찬 받는 종의 모습이라고 의사 누가가 확실하게 다시 한번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도 마태는 그 점을 그의 복음서에서 더욱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말씀드린 그대로 그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이며 양과 염소와의 비유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들을 각 구절의 풀이과정에서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여리고(첫번째 구역으로) 들어가 (2구역으로 되어 있는 여리고의 그 다음 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여리고 세관의 우두머리인)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 3. (헬라어에 밝고 국제정세에도 밝은 유식한)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구체적으로 샴마이학파인가 아니면 힐렐학파인가 궁금) 하여 (그 말씀을 듣고 그 인물을 파악해)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플라타너스 비슷한 Sycamore tree, NRSV)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유대인들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이방인보다도 못한 로마제국의 앞잡이이며 동족의 고혈을 빠는 매국노인)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율법의 갑절 배상의 2배에 해당하는, 22:4, 7, 9)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믿음의 조상인, 4:16)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모두가 죄인이다, 3:23)”(19:1-10);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여리고(첫번째 구역으로) 들어가 (2구역으로 되어 있는 여리고의 그 다음 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여리고 세관의 우두머리인)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 3. (헬라어에 밝고 국제정세에도 밝은 유식한)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구체적으로 샴마이학파인가 아니면 힐렐학파인가 궁금) 하여 (그 말씀을 듣고 그 인물을 파악해)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플라타너스 비슷한 Sycamore tree, NRSV)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19:1-4);

1)    예루살렘의 동쪽에는 감람산이 있고 그 남쪽 기슭에는 여리고로 가는 길이 뚫려 있습니다.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90리 정도 비스듬히 진행하면 여리고가 나타나는데 그곳은 요단 강의 강변도로를 타고서 남하하는 시리아사람들 및 갈릴리 사람들과 중동국가의 물동량이 대소비도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들리게 되는 성읍입니다. 그러므로 그곳 여리고에는 유대에서 가장 큰 세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2)    세관에서는 수입하는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고 그 세수(稅收)를 모아 행정비용을 제하고 모조리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응이 참으로 좋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두가지 불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의 세관에서 필요이상의 관세를 부과하여 예루살렘의 물가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관원들이 로마황제에게 잘 보이고자 필요이상으로 관세를 거두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세관원들은 하나같이 민족 반역자이며 종교적으로 죄인들이라고 유대인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비난과 욕을 유대에서 가장 많이 얻어 먹고 있는 인물이 바로 유대인으로서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입니다. 그는 세관업무에 정통하여 세관장으로 크게 출세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합니다. 비록 많은 봉급을 받아 잘 살고 있지만 동족들은 그가 관세를 착복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리고 업무에 대한 보람이 전혀 없습니다. 민족 반역자이며 종교적으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삭개오는 남은 인생을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하게 한번 살아보고 싶어합니다. 자신은 세관원이 되기 위하여 로마의 세무법을 일찍이 헬라어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세관원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취급하다가 보니 국제정세에도 상당히 밝습니다. 그러한 그가 새로운 인생을 한번 살아보기 위하여 동족인 선민들의 유대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5)    당시 유대교 내부에서는 두개의 학파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샴마이학파와 힐렐학파입니다. 샴마이학파는 선민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유대교를 유대인들의 종교로 제한하자고 하는 전통적인 보수선민사상에 충실합니다. 그와 반대로 힐렐학파는 헬라사상과 로마의 세계관을 받아들여서 전통적인 민족종교인 유대교를 만민구원을 위한 종교로 개혁하고 이제는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개방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해외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6)    그 가운데 삭개오는 힐렐학파의 주장이 마음에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인물인지 궁금하여 그가 여리고의 두 성읍 사이를 통과할 때에 한번 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두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키가 작아서 뒷줄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모인 무리를 뚫고서 앞쪽으로 나서게 되면 여리고 주민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고 돌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택하고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플라타너스처럼 잎이 무성한 가로수인 시카모 나무’(Sycamore tree)에 올라가서 멀리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2)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유대인들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이방인보다도 못한 로마제국의 앞잡이이며 동족의 고혈을 빠는 매국노인)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9:5-7);

1)    예수님의 한가지 특이한 행적이 두번째로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였을 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낫기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병자와 장애자들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단 한사람 38년된 중풍병자의 질병과 장애를 말씀으로 고쳐 주시고 그 자리를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5:5-9).

2)    그와 같은 일이 이번에는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인 여리고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여리고의 주민들이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메시아로 알려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몰려들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오로지 한사람 멀리 높은 나무위에서 빠끔히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삭개오를 발견하시고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 머무는 것)하여야 하겠다”(5b);

3)    그 한마디의 위력이 현장에서 당장 두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 주민들에게 해침을 당할까 염려하고 있던 세관장 삭개오가 용기 백배하여 나무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매우 즐거워하면서 즉시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6).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 삭개오를 향하여 그 어떤 무례한 행동도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4)    평소 민족 반역자이며 죄인이라고 세관장 삭개오를 비난하던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가까이에서 보았으니 이제는 돌팔매를 하기 쉬운데 예수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치 간음현장에서 음녀를 잡아서 예수님 앞에 데려온 자들이 예수님의 한마디에 그만 그 자리를 벗어나버린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8:9). 다만 그들은 아주 소극적으로 수군거릴 따름입니다; “7. 뭇사람이(유대인들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이방인보다도 못한 로마제국의 앞잡이이며 동족의 고혈을 빠는 매국노인)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9:7).

(3)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율법의 갑절 배상의 2배에 해당하는, 22:4, 7, 9)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믿음의 조상인, 4:16)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모두가 죄인이다, 3:23)”(19:8-10);

1)    그날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 삭개오는 감개가 무량합니다.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은 삭개오 자신을 죄인이라고 멀리하였는데 큰 선지자이며 메시아라고 알려지고 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집에 왕림하시고 친히 식사를 함께 나누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만 함께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제자들과 삭개오의 집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천국복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에서 자녀삼기를 원하신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히브리정경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 주시고 있습니다. 선민 뿐만 아니라 선민들이 죄인취급을 하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까지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이제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3)    그 말씀을 듣자 이상하게도 삭개오는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24:32). 이제는 세관장의 자리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남은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따라서 그가 회개와 회계라는 두가지의 결단을 그 자리에서 감격스럽게 선포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율법의 갑절 배상의 2배에 해당하는, 22:4, 7, 9)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8b).

4)    그 말씀을 듣자 예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식구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삭개오의 가족 모두에게)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선민과 이방인 모두의 믿음의 조상인, 4:16)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모두가 죄인이다, 3:23)”(19:9-10).

5)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선민사상에 젖어 있을 때에는 참으로 구원을 얻기가 어렵다고 벌써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8:11-12).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정확하게 회계하는 그러한 남은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삭개오와 그 식구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십니다(9-10).

6)    그러므로 주님의 칭찬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랑하면서 계속 우기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이고도 외식적인 신앙모습에 대하여 엄중하게 질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재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18:11-14, 23:2-32). 그 다음에는 삭개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제부터 청지기로 올바른 셈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8, 17:1);

  

둘째로, “9. 예수께서 그곳(어선을 쉽게 정박할 수 있는 부두시설과 물양장이 있는 갈릴리 호숫가 게네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레위라 하는 사람이, 5:27)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인생의 전환을 꿈꾸고 있던 그가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마태의 직장동료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9-13);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9. 예수께서 그곳(어선을 쉽게 정박할 수 있는 부두시설과 물양장이 있는 갈릴리 호숫가 게네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레위라 하는 사람이, 5:27)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인생의 전환을 꿈꾸고 있던 그가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마태의 직장동료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9:9-10);

1)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시작하신 무렵 초창기의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이며 어부들입니다. 그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자주 갈릴리 호수를 횡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선을 접안하고 있는 장소는 주로 그들에게 익숙한 부두시설과 물양장이 있는 게네사렛입니다(9a). 예수님 일행이 게네사렛에 도착하면 많은 갈릴리사람들이 집안의 병자와 장애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먼저 전하고 그 자리에 모인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2)    그 다음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서 길가를 내다보면서 복음사역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레위라고 하는 세관원을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당장 세관원 레위에게 명령하십니다; “(가버나움으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레위라 하는 사람이, 5:27)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인생의 전환을 꿈꾸고 있던 그가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니라”(9b).

3)    예수님의 명령에 레위가 즉각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관원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관원 레위의 마음속에 그와 같은 열망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미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에게 명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calling out’에 즉각 제자로 따라나선 것이 12사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5:19-22, 1:40-51);

 

4)    레위는 훗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마태라고 개명합니다. 그 뜻은 그의 새로운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던 그를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로 부르신 그 순간에 주어진 것으로 믿고서 본문에서 그는 레위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벌써 마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깊이 감사하고 있는 마태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1:4-5).

5)    그날 마태는 그 옛날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서 너무나 기뻐하여 친지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인 것처럼(왕상19:21)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장동료들을 많이 초청하여 예수님 일행을 집에 모시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많은 세관원들 가운데 오로지 레위만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서 즉시 제자로 따라나서는 새로운 삶 공생애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많은 장애자와 병자 가운데 단 한사람 곧 예수님의 치유함을 그 자리에서 받은 38년된 환자와 같이 귀한 경우입니다(5:5-9).

6)    또 하나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그 기쁨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는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예수님의 천국복음과 새로운 제자의 삶이 동일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면 마태는 벌써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새로운 삶을 자신의 집 그 식사자리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4:19). 참으로 결단력과 행동력이 돋보이고 있는 제자가 사도 마태입니다. 그는 세관원이라고 하는 좋은 자리를 버리고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곧바로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2)  11. 바리새인들이 보고(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1-13);

1)    그날 마태가 자신의 직장동료들을 많이 초청하여 예수님 일행과 함께 식사를 나누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b). 자신들만의 선민사상에 의거하여 율법적인 정죄를 서슴지 아니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정죄행위와 비난행위를 통하여 그 반대급부로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온세상에 알리고자 애를 쓰고 있는 불쌍한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18:11-14).

2)    어떻게 하면 스스로 의인인 체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에 동참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선지자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말씀의 진의를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계십니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2-13);

3)    스승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사도 마태는 천국복음의 진수로 평생 명심하고 있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불러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고마워서 사도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 그와 같이 대서특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해에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19:1-10).  

셋째로, “40. (천국의)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이것은 진리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영벌, eternal punishment를 의미함)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 NRSV), 의인들은 영생(永生, eternal life, NRSV)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0-46);

1)    일찍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창조주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여호와가 창조한 피조물을 나와 똑 같은 가치를 가진 생명으로 여기고 사랑하며 그 생명을 하나같이 돌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12:30-31, 3:4). 그러한 생명사랑과 보살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 뒤쳐진 자가 되어 절망에 빠져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2)    히브리정경에서는 그들이 바로 유대인사회에서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 나그네와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습니다(14:29).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제와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25:40). 그 말씀의 의미는 그들 작은 자를 인간 대접하고 잘 돌보아주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고 사랑한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3)    그렇게 행동한 성도는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며 최후심판에서 오른쪽으로 분류가 되어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반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 결과는 왼쪽으로 분류가 되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씀이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이라고 사도 마태가 여기서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신 그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자는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처럼 끝까지 자신의 의를 내세우거나 스스로 의롭다고 우길 일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못한 자를 율법에 비추어 죄인이라고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율법을 잘 지킨 자신은 거듭 의인이라고 재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입니다.

가버나움의 세관원 출신 레위나 여리고의 세관장 출신 삭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과 그 부르심에 기뻐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회개회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도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