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르호보암왕이 아바드 정신을 아자브 하자 나라가 쪼개지고 만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0. 17. 00:51

제목; “르호보암왕이 아바드 정신을 아자브 하자 나라가 쪼개지고 만다”(왕상12:1-20, 참고구절은 요13:4-14절임)

설교일; 주후 2023102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17일 화요일 작성)

 

이스라엘 자손은 흔히 히브리인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41:12, 43:32). 그 이유는 큰 강을 건너와서 다른 문명권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 야곱 곧 이스라엘이 고향을 버리고 자손들을 이끌고 인종이 다른 함족의 땅 애굽제국에 들어와서 살게 되자 원주민들은 그들 도래인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주민 그것도 동방의 목축지역에서 풍요로운 농업국가 애굽제국으로 들어와 동북면 고센 땅에서 가축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히브리인들은 농업을 영위하고 있는 애굽인들이 볼 때에는 괄시의 대상인 유목민들입니다(46:34).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일행이 애굽 땅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땅 가나안에 연속 흉년이 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45:9-11).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의 조부모인 아브라함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셈족인 그들은 부친인 족장 데라와 함께 조상들이 대대로 자리잡고 있던 고향 메소포타미아 중심지역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상하고 있습니다(11:31).

여호와의 명령은 변방지역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함족인 원주민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7:4). 그러나 족장 데라는 그 말씀을 도중에 외면하고 그만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하란 땅에서 자신의 성을 건설하는데 남은 생을 바치고 맙니다(11:31-32).

그 결과 훗날 족장 데라가 하란에서 건설한 성읍이 고향에서 불러 올린 그의 차남 나홀에게(11:26) 상속되어 성경에서는 나홀의 성’(the city of Nahor, NRSV, the town of Nahor, NIV)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24:10);

그와 달리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아브라함 부부는 하란에 머물고 마는 부친을 떠나(12:1-4) 함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목축생활을 영위하면서 끝까지 경건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게 됩니다(20:7, 21:22, 7:4). 당시 가나안 원주민들은 다른 문명권에서 온 아브라함 부부를 역시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4:13).

그런데 창세기 제10장에서 노아 후손들의 거주지를 살펴보게 되면, 데라와 아브람의 조상인 셈족이 먼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원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10:21-25). 그런데 외세인 정복자 니므롯이 동족인 함족을 이끌고서 셈족이 살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10:6-12).

지배 족속인 함족과 원주민인 셈족이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특이하게도 그들 셈족과 함족의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창세기 제1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11:1-2). 언어가 하나였기에 그들은 소통에 어려움이 없어서 쉽게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고 패권제국의 막강한 힘으로 마천루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는 것입니다(11:1, 4).

그 의미는 하나된 인간의 문명과 제국의 힘으로 일치단결하여 하늘의 권세에까지 도전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사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지위에 도전하고 있는 피조물 인간들의 오만함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신 창조주 여호와는 현지답사를 통하여 그들의 문명을 파괴하고자 결심하십니다(11:8).

참고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바벨제국의 멸망이라는 최종결정은 일찍이 창조주 여호와를 영적으로 섬기고 있는 천사장 루시엘과 그 수하들의 모반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1:6). 선지자 이사야와 사도 요한이 그러한 사실을 재삼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14:12-23, 17:1-18:24, 20:1-10). 물론 그 점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도 동일합니다(12:30-32).

요컨대, 그와 같은 창조주 여호와의 결정 곧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바벨탑의 붕괴라는 최종결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저버리고 창조주처럼 되고자 함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를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3:4-6, 11:6-8, 2:31-45, 3:1-7, 5:1-3, 22-31);

그렇다면, 인본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서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 창조주 여호와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하나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여러 족속들 사이에 오해가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11:7).

그 결과 먼저 정복민과 피정복민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결국 인간들이 만든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2:41). 그 다음에는 여러 족속들이 서로 다투고 산지사방으로 헤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왕상6:1말씀에 기초하여 창세기의 기록을 가지고 그 연대를 계산하여 보면, 주전 2,357년에 발생하고 있는 바벨탑붕괴사건과 최초의 디아스포라의 발생이라고 하겠습니다(11:1-9).

참고로,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동진하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주전 23세기에는 극동지역의 산악지대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대한 언급이 창세기 제10장에서는 아르박삿의 후손인 욕단과 그의 자손들의 동방 진출입니다(10:25-30).

그래서 그런지 구약성경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용어 가운데 그 뉘앙스가 극동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의 언어와 비슷한 것들이 제법 남아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르고 있으며, 형제를 아히라고 부르고 있고, 왕의 명령을 준수하겠다고 신하들이 예이라고 복명하고 있는 것 등입니다.

특히 오늘의 강해설교와 관련하여서는 섬긴다고 하는 의미의 히브리어가 아바드(יַּעַבְד֥וּ)이고 버린다고 하는 히브리 용어가 아자브’(יַּעַזְב֖וּ)입니다(2:13참고). 그 말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 한국사람의 사고방식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돌본다고 하는 섬김의 뜻으로 히브르어 아바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나와 똑같은 형제로 알고서 전부 사랑하며 보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1)   그것이 예수님께서 쉽게 풀이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12:30-31). 그와 같은 취지에서 세족식에서는 예수님이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13:4-14).

2)   그것을 우리 한국사람들은 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의 마음을 알고서 그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면 되는 것으로 벌써 언어에 대한 감각으로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의 속뜻에 유의하게 되면 히브리어 아바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알아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섬기는 그 마음으로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것이 바로 아바드의 뜻이다. 그 용어에 벌써 아비의 내리사랑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2)  둘째로, 그와 같은 아바드의 사랑과 섬김의 자세를 세상임금들이 손쉽게 버려버리고 있습니다. 백성을 돌보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피조물 사랑의 정신을 버려버린 절대권력자의 오만함입니다.

1)   구체적으로, 자신의 권력의 힘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자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정이 본문에서는 솔로몬대왕의 뒤를 잇고 있는 41르호보암왕의 잘못된 선택입니다;

2)   그것을 아자브라고 히브리어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한국사람들이 실감나게 사용하고 있는 말 아작을 내다와 흡사하게 닮아 있습니다.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국왕이 백성들을 자신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아작을 내고 있으니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여호와께서는 그의 나라를 쪼개어버리고 제국을 약소국으로 만들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솔로몬대왕의 아들인 르호보암왕이 백성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섬김의 자세를 버리고서 자신의 권력의 채찍으로 그들을 다스리고자 나서고 있기에 그 결과가 여호와의 섭리로 분명하게 역사 가운데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역사섭리에 따라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이 두개로 쪼개지고 만다는 사실을 본문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역사적으로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남조 다윗왕국 사이에 전쟁이 발생합니다.

동족상잔의 결과 국력이 소진되어 외세의 침입을 허용하고 맙니다. 애굽의 바로인 제22왕조의 시삭이 대군을 거느리고 유다왕국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왕상14:25-26);

그리고 다메섹의 아람왕국은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이스라엘왕국의 북쪽 땅을 점령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13:7).

그 옛날 중동의 지역패권국으로 시온의 영광을 자랑하고 있던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제국이라고 하더라도 후계자 르호보암왕이 섬김의 자세를 버리고 오직 힘으로 백성을 통치하겠다고 나서자 제국의 영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라와 민족마저 둘로 쪼개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전개과정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간략하게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을 아울러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왕상11:40),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3. 무리가(북방 10지파의 대표들이) 사람을 보내 그를(다윗왕가와 각을 세우고 있는 자 곧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을)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북방 10지파의 장로들이) 와서 (세겜에서, 1)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4. 왕의 아버지가(솔로몬 대왕이) (후반기 20년 동안 전국을 요새화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왕상9:17-19)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5.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신하들과 협의를 하겠다는 언급이므로) 백성이 가니라”(왕상12:1-5);

(1)  1절과 관련하여, 그 옛날 다윗의 경우에는 북방 이스라엘 10지파의 장로들이 멀리 헤브론으로 유다왕 다윗을 찾아왔습니다(삼하5:1-3). 그 이유는 다윗을 전체 이스라엘왕국의 후계왕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솔로몬대왕의 후계자인 르호보암왕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50리나 떨어져 있는 세겜까지 가서 북방 이스라엘 10지파의 장로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르호보암왕의 위세는 조부인 다윗대왕보다 현격하게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2-3절에서는 솔로몬대왕의 후계자인 르호보암왕과 교섭하기 위하여 북방 이스라엘 10지파의 장로들이 하나의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솔로몬대왕의 정치적인 핍박을 피하여 수년간 애굽에서 망명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에브라임 출신의 여로보암을 자신들의 대표자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왕상11:29-33). 그러므로 장로들은 만약 르호보암왕이 백성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세를 보인다고 하면 그를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인정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예언을 미리 받고 있는 여로보암을 신왕으로 삼아 북방 10지파가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일종의 정치적인 배수진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3)  4절에서 여로보암이 10지파의 장로들과 함께 세겜에서 르호보암왕을 만나 한가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대왕이 통치 전반기 20년 동안에 7년동안 성전을 건축하고 그 다음 13년 동안에 예루살렘 왕궁을 건축하면서 수많은 비빈들과 호화 사치생활을 한 결과 국고가 바닥이 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요새화하며 국방을 강화한다고 통치 후반기 20년 동안에 국가재정과 각종 부역을 전부 북방 10지파에게 분담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과다한 재정부담과 노역으로 북방 10지파가 피폐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현실을 감안하여 부디 재정부담을 경감하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4)  그와 같은 절실한 요청에 대하여 르호보암왕은 확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솔로몬대왕의 통치 일년전에 예루살렘에서 암몬 출신의 왕비 나아마에게서 출생한 르호보암은 부왕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제국을 다스리는 모습을 지켜본 41세의 왕자입니다(왕상14:21). 그런데 그는 전반기 20년의 지혜로운 부왕의 모습보다는 후반기 20년 동안의 강압적인 부왕의 모습을 더 닮아 있습니다. 그가 이제 3일 동안의 말미를 얻어서 신하들과 한가지 협의를 하고자 합니다(5). 과연 그의 결론이 무엇일까요?...

둘째로, “6.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8. 왕이 (국가원로인)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신구 물갈이가 된 소장파 대신들과) 의논하여, 9.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11.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그처럼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쇠가 그 끝에 부착이 되어 있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12.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이르기를, 3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13.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14.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15.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왕상11:29-33, 48:5)”(왕상12:6-15);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6.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왕상12:6-7);

1)    6절에서 르호보암왕이 먼저 부왕 솔로몬대왕을 모시고 국정을 운영한 바가 있는 원로대신들을 만나서 자문을 구한 것은 올바른 순서입니다. 역시 고대국가에서는 연공서열과 장유유서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숭상한 솔로몬대왕의 영향을 받아 그들 국가의 원로들이 나름대로 좋은 지혜를 르호보암왕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7절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견해는 한가지입니다. 솔로몬대왕이 통치 전반기에 보여주었던 백성에 대한 섬김의 자세를 르호보암왕이 계승한다고 하면 이스라엘 12지파가 전부 국왕의 충실한 신민들이 될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것이 소위 아바드의 정신을 실천하는 좋은 국왕이 되라는 것입니다.

3)    요컨대, 어진 군주는 백성의 어버이이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백성의 삶을 돌보고 섬기면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제국은 르호보암왕의 시대에도 계속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원로대신들의 의견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있는 르호보암왕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는 소장파들에게 또다른 견해를 얻고자 합니다.

4)    즉위한지 1년이 지난 르호보암왕은 이미 자신의 입맛에 맞는 소장파 대신들로 조정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배에 불과한 소장파 대신들은 솔로몬대왕 후반기에 조정에 출사한 인물들이므로 르호보암의 뜻에 더 맞는 신하들입니다. 그들의 견해는 과연 무엇일까요?...

(2)  8. 왕이 (국가원로인)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신구 물갈이가 된 소장파 대신들과) 의논하여, 9.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11.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그처럼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쇠가 그 끝에 부착이 되어 있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왕상12:8-11);

1)    8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르호보암왕이 먼저 국가의 원로들을 만나서 상의한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라 단지 중의를 모으는 듯한 하나의 형식을 갖추는데 불과했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제8절에서 왕이 (국가원로인)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여기서 버리고(יַּעֲזֹ֛ב, 아자브)라는 용어는 국가원로들의 의견을 버린 것인데 내용적으로는 백성을 섬기는 국왕이 되라는 충언을 버린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르호보암왕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세족식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섬김의 자세를 떠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3:4-14).

3)    역시 르호보암왕은 자신이 부왕 솔로몬의 통치 후반기 20년 동안에 보았던 그 억압정책을 선호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제 자신과 통치철학이 같은 소장파 신하들의 견해를 듣고자 합니다(9). 그들의 의견이 르호보암왕의 마음에 흡족합니다.

4)    한마디로, 부왕 솔로몬대왕의 통치에 반발하고 있는 백성들을 국왕의 권력의 힘으로 더욱 강력하게 억눌러야 한다는 것입니다(10-11). 소장파 대신들은 20세 약관의 나이에 통치를 시작한 바가 있는 부왕 솔로몬보다 41세인 르호보암이 더 원숙하며 그 힘이 강하다는 뜻으로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5)    그리고 더욱 강력한 억압정책을 일반 채찍보다 더 아픈 전갈 채찍의 사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갈의 독침이 치명적이듯이 그 옛날 채찍 끝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부착하고 있는 전갈 채찍은 공포의 대상인 것입니다;

(3)  12.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이르기를, 3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13.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14.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15.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왕상11:29-33, 48:5)”(왕상12:12-15);

1)    약속한 3일이 지나자 북방 10지파의 원로들이 여로보암과 함께 세겜에서 르호보암왕을 예방하고 있습니다(12). 그들을 만나 르호보암왕이 들려주고 있는 대답을 포악한 말’(카솨)(קָשָׁ֑ה)이라고 13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카솨라는 용어는 농사의 현장에서 소를 폭력적으로 가혹하게 부리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창세기 제6장 제13절에서는 힘있는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하여 강포하게 상대하는 것을 히브리어 용어 하마스’(חָמָ֖ס)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노아 시대 홍수심판의 원인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르호보암왕이 그의 입맛에 맞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소장파 신하들의 말을(10-11) 그대로 북방 10지파의 장로와 여로보암에게 강하게(harshly, NRSV, 13a) 전달하고 있습니다(14).

3)    그 결과 그의 나라가 둘로 쪼개어지는 비극이 발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로보암에게 이미 주어진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지만(15b) 역시 그 작동의 단추를 누리고 있는 자는 포악한 왕 르호보암입니다(15a). 원칙적으로 모세의 신명기 기록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가지고 오십니다(30:19a). 그 가운데 사망과 저주가 아니라 생명과 축복을 선택하도록 하라는 것이 동족들에게 주고 있는 모세의 유언과 같은 권면입니다(30:19b-20). 그 점을 깊이 생각나게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셋째로, “16. 온 이스라엘이(북방의 10지파의 장로들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북방 10지파의)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기업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다윗의 왕가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유다지파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10지파의 장로들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베냐민 지파와 레위인들이 포함되고 있음)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18.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람(북방 10지파의 장로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그를 사자로)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북방 10지파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그 사건의 뒷처리가 시급하여)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다윗왕조의 정통성을 중시하면서 열왕기상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하고 있는 지금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까지 이르렀더라. 20. 온 이스라엘이(북방 10지파가)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북방 10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북방 10지파)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와 레위인을 포함하고 있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왕상12:16-20); 역시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 온 이스라엘이(북방의 10지파의 장로들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북방 10지파의)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기업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다윗의 왕가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유다지파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10지파의 장로들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베냐민 지파와 레위인들이 포함되고 있음)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왕상12:16-17);

1)    북방 이스라엘 10지파의 장로들이 애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과거 솔로몬대왕의 정적인 여로보암을 불러서 자신들의 대표자로 내세운 것은 만약 르호보암왕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에는 분리 독립할 생각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41세의 르호보암왕이 철부지처럼 세겜에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2)    그는 예루살렘과 전국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이스라엘제국의 군사력을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 세겜에서는 당장 작동이 되는 군사력이 아닙니다. 따라서 분노한 여로보암과 장로들이(16a) 르호보암왕에게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북방 10지파의)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기업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다윗의 왕가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유다지파나) 돌아보라”(16b);

3)    그들이 르호보암왕을 떠나서 자신들의 지파로 돌아가고 맙니다(16c). 이제 르호보암왕은 빨리 세겜을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자신의 지파인 유다의 왕이라도 될 수가 있습니다(17). 그는 이제 북방 10지파의 땅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통제할 수 있는 방안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제국을 잃어버리고 순식간에 유다의 왕으로 격하되고 마는 르호보암왕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과연 백성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에 없는 르호보암왕이 장차 실지(失地, 잃어버린 땅)를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2)  18.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람(북방 10지파의 장로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그를 사자로)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북방 10지파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그 사건의 뒷처리가 시급하여)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다윗왕조의 정통성을 중시하면서 열왕기상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하고 있는 지금 곧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까지 이르렀더라”(왕상12:18-19);

1)    세겜을 빠져나와 예루살렘으로 남하하는 길에 르호보암왕이 하나의 계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8a). 그것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과거 솔로몬대왕의 감독관으로 일했던 원로대신 아도람을 여로보암과 북방 10지파의 장로들에게 선전관으로 보낸 것입니다(18b). 그 뜻은 회유를 위한 것입니다.

2)    그러나 분노에 찬 그들은 이제 분리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지 결코 르호보암왕과 화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심을 확고하게 르호보암왕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특사로 온 아도람을 돌로 쳐죽이고 마는 것입니다(18c).

3)    그 소식을 듣고서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하고 있습니다(18d). 열왕기상 본문의 내용을 다시 기록하고 있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북방 10지파와 다윗왕조의 유다왕국이 둘로 쪼개어진 채 결코 다시 하나로 된 역사가 없음을 참고삼아 첨언하고 있습니다(19);

4)    그와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백성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람대접을 해주고자 하는 마음을 통치자가 버리게 되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이 되어 역사 가운데 백성과 분리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그와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20. 온 이스라엘이(북방 10지파가)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북방 10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인 공식적인 자리)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북방 10지파)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와 레위인을 포함하고 있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왕상12:20);

1)    북방 이스라엘 10지파의 장로들은 정해진 수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먼저 10지파의 모든 백성들에게 여로보암이 애굽에서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에브라임으로 돌아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20a). 그리고 여로보암과 그들 장로들이 백성들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하여 르호보암왕을 만나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그 결과는 가혹한 탄압이 계속된다고 하는 비극적인 결말임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2)    그 말을 듣자 이스라엘 10지파의 백성들이 모두 다윗왕가를 버리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자고 찬성하게 됩니다. 결국 여로보암이 장로와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서 장로들과 족장들이 모인 공회(the assembly, NRSV)에서 정식으로 그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20b). 여로보암은 개인적으로 애굽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올 때부터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있던 그의 대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    그는 잠재적인 정적을 제거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노년의 솔로몬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왕상11:40). 그 모습을 보고서 자란 세자 르호보암도 무자비한 인물이라고 그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르호보암왕이 당근과 채찍 가운데 후자를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제국이 둘로 쪼개어지고 여로보암 자신이 북방 이스라엘 10지파를 분리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4)    자신이 별로 한 일이 없는데 너무나 큰 떡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자신에게 전해진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왕상11:29-32). 그러나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여로보암왕은 자신이 잘나서 북방 이스라엘왕국의 초대왕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후 정치적인 술수에만 매어 달리고 있는 여로보암1입니다(왕상12:25-33);

5)    구체적으로, 매년 절기가 되면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수도에 있는 성전으로 순례를 떠나고 있는 북방 이스라엘왕국의 백성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그는 남쪽국경도시 벧엘과 북쪽의 국경도시 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세웁니다. 그 이름을 이스라엘의 수호신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제사장이 아닌 인물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보다 한달 늦게 새로운 절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지키면 된다고 말하고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6)    그러한 초대왕 여로보암1세의 정치적인 술수와 우상숭배정책을 비록 에브라임 왕가가 잇사갈 왕가로 바뀌고 있지만(왕상15:25-32) 한결같이 후계왕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계승하고 맙니다(왕상15:34, 16:7, 19, 26, 31, 왕하17:22). 그 때문에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주전 722년에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먼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왕하17:21-23). 그후 선민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전유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조주 여호와는 피조세계를 만드시고 모든 창조물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그 생명을 돌보고 계십니다(6:26, 5:45, 3:4).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사랑하며 작은 자를 섬기는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12:30-31).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주로 대접하는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에서 왕은 백성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아바드입니다. 그와 같이 행하는 국왕은 다윗처럼 그의 왕국을 오래 보전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백성을 섬기며 사랑하는 자세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의 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아자르의 실례를 오늘의 본문에서 르호보암왕의 경우를 가지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력한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제국이 그만 반()토막이 나고 동족상잔의 역사가 전개되며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20세기 후반에 경제개발을 시작하여 21세기에 과학기술과 산업생산력을 자랑하고 있는 남한의 한민족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고 작은 자를 섬기는 성도의 삶이 자꾸만 황금만능사상과 권력지상주의에 의하여 무너지고 있습니다.

현대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1950년대에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평등사회가 형성이 되어 1960년대부터 모두가 한번 잘살아보자고 치열한 삶을 살아오던 한민족입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그만 돈과 권력이 세습되고 기득권이 구조화되어 새로운 양반과 상놈이라는 이상한 신분사회가 발생하여 그것이 고질적으로 고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아니라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이며 유전무죄이고 무전유죄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가난한 청년은 미래가 보이지 아니하여 결혼도 미루고 있으며 설혹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자식을 낳아서 한번 잘 키워보자고 하는 꿈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암담하며 큰 장벽입니다.

그러한 시대이므로 백성을 사랑하고 섬기는 지도자와 자신이 가진 것을 사회적인 약자들과 나누며 베풀고자 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수 있도록 역사를 섭리하여 달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절박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제는 우리 모두 그 일을 앞장서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르호보암 시대의 비극이 재발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커다란 깨달음과 진지한 실천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