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예수님의 세족식에 깃들어 있는 여러가지 의미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0. 3. 10:12

제목; “예수님의 세족식에 깃들어 있는 여러가지 의미들”(13:3-11)

설교일; 주후 202310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3일 화요일 작성)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맞이하여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손수 사도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었다고 사도 요한이 그의 제4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13:3-11).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선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실천에 모범을 보인 것이다(13:34-35).

(2)  둘째, 모세처럼 신발을 벗고 여호와를 만나라는 의미이다(3:5).

(3)  셋째,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여호와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답고 깨끗한 발이 되라는 의미이다(52:7).

(4)  넷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온 아들에게 가락지와 새 신발을 제공함으로써  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여 주고 있다(15:22).

(5)  다섯째, 그런데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는 세족식은 특이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결례()에 따르면 식전에 발을 씻어주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이 식사도중에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돌아가시기 전에 딱 한번 그와 같은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세족식에 깃들어 있는 섬김의 자세가 그만큼 긴급하면서도 소중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와 같은 5가지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여호와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라고 요약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12:30-31). 그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웃을 나와 똑같은 가치를 가진 자로 인정하고 제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는 진정한 여호와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1)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과 염소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형제 중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여기서의 임금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찮게 여김을 받고 있는 작은 자에게 인간대접을 해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자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용어가 예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내 형제인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하찮게 여기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가치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며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교회공동체에서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도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수신제가하면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말하자면, 교회공동체에서 성도들이 서로 자신의 형제로 알고서 사랑할 때에 비로소 교회 바깥에 나가서 지역민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족식의 정신에는 과연 그 옛날 모세처럼 신발을 벗고 여호와를 만나라는 의미(3:5)가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요약하면 그 취지가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12:30-31).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생명의 가치를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 여기고 제 몸처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아가페 사랑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2)  동시에 세상적인 수직관계와 몰인격적인 권력관계의 병폐를 치유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취지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옛날 호렙산에서 꺼지지 아니하는 불꽃 가운데 여호와의 음성을 듣게 되는 모세가 그 명령에 따라 세속에 물든 자신의 사고방식을 청산하는 의미에서 신발을 벗듯이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세족식(洗足式)의 의미에 참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세족식에는 개념상 과연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여호와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답고 깨끗한 발이 되라는 의미(52:7)가 포함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게 되는 이방인들은 사도들의 삶을 보고서 복음의 값어치를 매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사도들은 먼저 그들의 공동체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선지자 이사야가 그 옛날에 묘사하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아름답고 깨끗한 발(52:7)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반대로 서로 질시하고 분쟁하게 되면 주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서 외면을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넷째로,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온 아들에게 가락지와 새 신발을 제공함으로써  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여 주고 있습니다(15:22). 그와 같은 의미가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시고 있는 세족식에 들어 있는 것일까요?

(1)  가락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벌써 창세기 제41장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히브리청년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으면서 자신의 옥새가 새겨져 있는 반지를 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1:41-42).

(2)  그렇다면 새 신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던 신발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신발을 받아서 신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신발을 신고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세족식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4)  만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고 회개하는 자를 성도로 삼아 함께 영생구원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섬기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16:24, 10:38). 물론 그 말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섬긴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8:1-4).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 비추어 상대를 존중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유대인들의 결례()에 따르면 식전(食前)에 발을 씻어주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세족식에 있어서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식사도중에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딱 한번 그와 같은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그에 대한 대답이 사도 요한의 기록에 벌써 다음과 같이 들어 있습니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3:10),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15).

(2)  유대인들의 결례는 먼지가 묻어 있는 손과 발로 식사에 임하는 것이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사전에 손과 발을 씻고서 식사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이 율례화 되어 있는 것이 소위 결례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육신적인 건강을 챙기고자 하는 생각이 율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을 보이고 계시는 세족식은 다릅니다. 그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이미 주님의 제자로 선택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세속에 물들어 서로 다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13:10). 그때에는 먼지가 묻은 발을 깨끗하게 씻듯이 그렇게 세상적인 다툼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사랑하기를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올바른 성도들의 섬김의 자세입니다.

(3)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자리에서 곧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성찬식(聖餐式)을 제정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교회공동체가 발생하게 되면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들이 서로의 발을 씻겨주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라고 하는 의미에서 세족식의 모범을 손수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생전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그 세족식의 모범이 초대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를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복음서에 대서특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가와 마태 그리고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내용을 어째서 사도 요한이 30년 세월이 지나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제4복음서에 기록하면서 세족식 이야기를 최초의 성찬식 진행 도중에 삽입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제6장 및 제13장에서 공히 설명하고 있는 마지막 유월절 밤의 성찬식 제정은 그 깊은 의미가 누가복음 제22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완전한 희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이제는 율법중심의 유대교의 성전제사를 청산하고서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천국에서 베푸시는 잔치자리에 훗날 제자들이 부활 승천하여 참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22:14-30 의역).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예배과정에서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침입으로 유대 땅과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주변에 있는 7개의 초대교회를 돌보면서 헬라의 학문과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모든 이방인에게 헬라어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직접 설명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제4복음서는 두가지 특징을 더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공관복음에 빠져 있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보완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자신이 소아시아의 초대교회에서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 사이의 갈등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에서 발견하여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예수님이 성찬식(聖餐式) 제정 도중에 갑자기 시행하신 세족식(洗足式) 행사입니다. 그 의미는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에 이미 정확하게 담겨 있습니다.

참고로,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4. (사도)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 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세족식의 모범을 보이면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스승이 제자보다 크고 사도들이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하는 유혹과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Cum Deo, 주님처럼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서 승리)한 자들인 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4-30).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 사실을 더 강조하고 싶어서 당시에 예수님께서 직접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인 사도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신 그때의 일을 별도로 세족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시범적으로 보여주신 그 세족식의 정신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다툼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의 결과 얻은 소중한 교훈을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3.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의, 26:19-21) 저녁 먹는 중(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13-16),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13:3-5);

(1)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13:3a) 스승이신 예수님이 갑자기 세족식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돌발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13:3b).

(2)  그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시작하여 첫번째 맞이하는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있을 때에 산헤드린 대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방문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2-16).

(3)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한가지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성자가 성령의 역사로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광야에서 모세가 놋 뱀을 높이 들 때에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는 죄의 용서와 나음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와 같은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 세상에서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실 것입니다.

(4)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있는 자리에서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내용을 사도 요한이 오랜 세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 의지하여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세족식의 의식은 이제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시기 직전이므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사도들에게 남기고자 하시는 의도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13:3).

(5)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준 세족식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오로지 사도 요한만이 공관복음의 기록보다 30년이나 지난 후에 제4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독점적으로 세족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그 만찬이 끝나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긴박한 때에 마지막으로 한가지 깊은 교훈을 몸소 사도들에게 남기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성찬식 만큼이나 중요한 세족식이라고 사도 요한이 깨닫고 있습니다;

(6)  따라서 그가 본문에서 자세하게 그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13:4-5). 훗날 최초의 성찬식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은 시급히 행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식사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6.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목자의 사역을 하면서, 21:17-19)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달리 말하여 예수님의 모범을 제자가 따르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13:6-8);

(1)  스승이신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 있는 12사도가 어떻게 좌석배치를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사도 요한이 남기고 있는 다음 기록이 다소 참고가 될 따름입니다;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4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19:26)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개인적으로 친한 사도 요한에게) 말하되, 말씀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예수님께) 말하라 하니, 25. 그가(사도 요한이)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13:23-25).

(2)  예수님의 곁에는 막내사도인 요한이 스승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습니다. 요한과 크게 멀지 아니한 자리에는 시몬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그 정도의 정보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계시는 예수님이 몇 사람을 거쳐서 드디어 사도 베드로에게 이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a). 지금까지 다른 사도들은 스승으로부터 황송하게도 발을 씻어주는 서비스를 받고 있지만 그 어떠한 반론도 제기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순순히 발을 내어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과 비슷한 연령의 시몬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준다고 하는 것은 사제지간의 질서를 뒤집는 것과 같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인이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종이 물을 가지고 와서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관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법도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례에 따라 사도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6b),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8a);

(4)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참으로 의외입니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목자의 사역을 하면서, 21:17-19) 알리라”(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달리 말하여 예수님의 모범을 제자가 따르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b).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어째서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종과 같은 섬김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훗날 교회공동체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그때에는 자연히 알게 된다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13:7). 영적인 질서는 세상적인 계급사회와는 그 운영의 원리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자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들어서 내 옆에 둔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특히 그 이웃이 세상적으로 홀대를 받고 있는 작은 자라고 하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소자를 섬기고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14:29). 그 이유는 그자가 바로 내게 주님이 우선적으로 맡겨 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살펴보면(16:19-23, 31) 은연중 부자에게 거지 나사로를 자신의 이웃으로 여기고 그를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선명한 것입니다(25:40).

3)    둘째,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갔다는 증거가 바로 주님의 본을 따라 그 뜻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13:8b).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실천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한가지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    어디까지나 성도들은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그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종처럼 무조건 상대방에게 굽신하는 것은 비굴한 것이지 결코 그 영혼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랑의 폭이 매우 좁은 소위 마피아의 조직사랑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마피아는 자신의 조직을 확실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원을 가족같이 돌보고 사랑하지만 그 반면에 가족이 아닌 상대방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 아닙니다. 더구나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의 구현도 아닌 것입니다.     

셋째로,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가룟 유다)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26:23-26, 13:2)”(13:9-11);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3:9-10a);

1)    사도 베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 세족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왕이면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손과 발 뿐만 아니라 전신을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식을 받고 싶어합니다(9). 그렇게 되면 주님 앞에 한점의 더러움도 없이 깨끗하게 서서 장차 그리스도의 목자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2)    그러나 예수님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3:10a); 그 깊은 의미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장차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그에 따라 의인으로 간주가 된 성도에게는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이 있게 됩니다.

3)    그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또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온몸이 거룩하게 되는 성도들은 이제 세상에서 묻히게 되는 발의 먼지만을 매일 깨끗하게 씻으면 되는 것입니다(10a).

(2)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가룟 유다)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26:23-26, 13:2)”(13:10b-11);

1)    그런데 그날 세족식에 참여하고 있는 12사도 가운데 한사람은 결코 온몸이 깨끗하게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자가 바로 스승을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에게 팔고서 자신의 입신양명의 길을 모색하고자 작심하고 있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벌써 알고 있습니다(13:2, 26-27);

2)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결코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의 이름을 거명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그가 배신자라고 말하지도 아니하십니다. 그에 대한 사도 요한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가룟)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13:28-30).

결론적으로, 성도의 삶에 있어서 성찬식의 거행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요? 아니면 세족식의 모범에 참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까요? 영적인 측면에서는 전자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후자가 더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여 나를 위한 온전한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자신을 용서하여 달라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성도들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찬식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에 거듭 감사하면서 끝까지 복음의 일꾼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생활이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의견의 다름으로 말미암아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세족식을 거행하신 주님의 뜻을 다시 음미해야 합니다. 서로의 발을 사랑으로 씻겨주는 용서와 섬김의 자세가 진실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아무쪼록 성찬식의 의미와 더불어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세족식의 의미를 함께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