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9. 12. 03:36

제목;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16:1-16, 참고구절은 창15:4, 3:6, 2:24, 1:27, 12:1-4, 삼상1:6, 2:3-5, 4:23절임)

설교일; 주후 202391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12일 화요일 작성)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16장은 단지 16절에 불과한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굉장히 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 제15장 제4절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15:4말씀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아브람 부부의 생각에 큰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본문 창세기 제16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15:4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아브람 부부의 생각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드려 두고 싶습니다;

첫째로, “4. 여호와의 말씀이(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다메섹 출신 엘리에셀, 2)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15:4)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게 되면 제16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가정사의 어려움이 재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그 점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첫째, 창세기 제12장 첫머리의 말씀을 참조하면, 아브람 부부가 북부 시리아의 하란에 계속 머물고자 하는 부친 데라를 과감하게 떠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은 그들 부부에게 약속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축복을 이 세상에서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란을 떠나지 아니하고 부친 데라와 함께 있었다고 하면 부자인 족장 데라의 재산을 그의 장남인 아브람이 상속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자식인 아브람 부부는 부친의 그 많은 재산의 상속보다는 창조주 여호와께서 약속하고 계시는 자손의 번성이라고 하는 축복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10년 동안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일점혈육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손의 번성을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들이 헤브론 땅에서 어렵게 마련한 아성을 시리아의 다메섹 출신으로서 그들 부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유능한 젊은이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 그에게 물려주고 자신들은 여생을 편히 지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와 같이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아브람 부부의 생각을 아시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서 15:4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아브람의 몸에서 상속자가 나오도록 역사할 것이니 그 약속을 믿고서 이방인 출신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겠다는 너희들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 아브람 부부가 고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헤브론 땅의 호족으로서 세상적인 편한 삶에 대한 선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아브람을 구태여 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밤하늘의 찬란한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 그를 이끌고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그렇다고 하면 이제 아브람 부부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곰곰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을 믿고서 부자인 아버지 데라의 재산상속권까지 포기하고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그들 아브람 부부입니다. 무엇보다도 무()자식인 그들에게 엄청난 자손의 번성을 주겠다고 여호와께서 언약하셨는데 10년 세월을 이방인 가나안 땅에서 고생하면서 여호와신앙인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일점혈육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여호와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을 성취시켜 줄 것이니 다시 믿어보라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런데 아브람 부부의 선택이 실로 놀랍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는 여호와의 말씀이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주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창조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반드시 실현시켜줄 것이라고 이제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6. 아브람이 (피조물인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라는 구절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훗날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 창조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칭함을 얻는다)라고 부르고 있는 그 대목은 사실 두가지를 믿는다는 것입니다(4:18-25);

하나는, 사람의 생각이나 경험 그리고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미래는 사람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 약속의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의지하는 것이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이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실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제16장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기 위해서는 15:4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15:4b)라는 구절에서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에 대한 해석이 기본적으로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아브람 부부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고대 가부장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 사회의 오래된 관념에 따르면, 지아비인 남편은 하늘이며 자식을 생산하는 입니다. 그리고 지어미인 아내는 그 씨를 받아 자식을 생산하는 이 땅의 에 불과합니다. 그에 따라 가장인 아브람의 씨만 그 밭에 해당하는 여자가 받는다고 하면 그 밭은 반드시 정식 아내인 사래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전통과 사상에 따라 안방 마님인 사래가 큰 결심을 하고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합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은 불임 여성이며 더구나 임신이 불가능한 75세의 늙은 몸이므로(11:30, 16:3) 젊고 싱싱한 여종을 남편 아브람에게 씨받이 첩으로 주어 아들을 생산하게 하여 집안의 상속자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여호와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되어 여호와 보시기에 부끄럽지 아니한 일부일처제”(monogamy)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때에 그것을 심히 좋게 보십니다(2:20-25). 그와 같은 사실은 창세기 제1장에서도 이미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7-28),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다스리고 있는 세상)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1:31).

(2)  둘째,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넘어 진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생각은 만물의 영장인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복을 나누어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한사람의 남편과 한사람의 아내가 하나님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생산하여 대대로 이 세상을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 때에 very good!이라는 최고의 평가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족장시대 동방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제사장 의 가정에서도 그의 말년에 다음과 같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13. 또 아들 7과 딸 3을 두었더라. 14. 그가 첫째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보다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42:13-15). 당시는 고대 가부장 사회이며 족장이 다스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곧 족장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가장인 남자에게만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고 여자에게는 소유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족장 은 자신의 딸들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재산을 상속하여 주고 있습니다. 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에 그와 같이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42:1-6).

셋째로, 고대 가부장 사회이므로 가장인 아브람이라는 이름에는 그의 아내 사래가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 약속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 아브람과 동일한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 있는 아내 사래의 몸에서 약속의 아들이 태어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1)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는 믿음의 가정에서 약속의 아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예언대로 태어난다는 것은 남편 아브람과 아내 사래가 합방을 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방마님 사래가 고대 가부장사회의 전통적인 관념에 의거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몸종 하갈을 씨받이 첩으로 남편 아브람에게 줌으로써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자 하는 인간적인 약은 술수이며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편법에 불과합니다.

(2)  그 결과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서 크게 벗어난 것임을 훗날 사도 바울이 그의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3. 여종(하갈)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사래)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4:23).

(3)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12:1-4, 19:4-6). 그러므로 그 언약을 이어가는 약속의 아들도 하나님의 생각에 의거하여 얻어야 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생각에 의지하여 육체적으로 얻고자 한다면 믿음의 길에서 어긋날 뿐입니다. 그와 같은 뼈아픈 교훈이 본문 창세기 제16장에서 아브람과 사래의 집안을 배경으로 하여 어설픈 시행착오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창11:30),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여호와신앙이 없는 이방인) 애굽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75세인 사래가 85세인 남편 아브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임, 17:17),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훗날 사래의 손주며느리 라헬의 생각이 그와 같은 것임, 30:3),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아담이 여호와의 말씀보다 아내 하와의 말을 들은 것과 같은 것임, 3:6).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후였더라”(16:1-3);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창11:30),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여호와신앙이 없는 이방인) 애굽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75세인 사래가 85세인 남편 아브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임, 17:17),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훗날 사래의 손주며느리 라헬의 생각이 그와 같은 것임, 30:3),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아담이 여호와의 말씀보다 아내 하와의 말을 들은 것과 같은 것임, 3:6)”(16:1-2);

1)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받들고서 살아가고 있는 여호와 신앙인 아브람 부부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이방인 원주민들에게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20:7, 21:22-23). 그러므로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곧 원주민들의 사고방식과 전통을 따라 아브람 부부가 손쉽게 살아가게 되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25:1-4).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 부부가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방인 원주민의 생각에 오염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창세기 제1장 제27절과 제2장 제24절에서 벌써 선포가 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떠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위험한 세상적인 편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남편 아브람의 씨만 얻게 되면 그 밭이야 자신의 애굽 출신 몸종인 하갈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1). 그것은 남편 아브람의 믿음 뿐만 아니라 그 아내 사래의 믿음까지 상속하는 약속의 아들에게 대를 이어 이방인 선지자의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뜻에 어긋나는 사고방식입니다.

3)    사래가 그와 같은 결심을 하고 있는 이유는 세상적으로 보면 2가지 현실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는 첫째, 사래가 불임 여성이며 이제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젊은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a). 둘째, 씨받이 첩을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아들을 생산하면 그것은 첩의 자식이 아니라 그 주인인 안방마님 사래의 자식으로 간주가 될 수 있는 고대사회라는 것입니다(2b). 그러한 풍조가 가나안 땅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어렵지 아니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점은 시리아 땅에서도 동일합니다. 훗날 사래의 손주며느리 라헬레아가 차례로 그와 같은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0:3, 9).

4)    가장인 아브람이 사랑하는 아내 사래의 말을 순순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아담이 사랑하는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함께 먹게 된 것과 흡사합니다(3:6). 어째서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일편단심으로 조강지처 사래만을 사랑하고 있는 아브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애처 사래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나름대로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불임 여성이며 75세의 늙은 여성인 아내 사래의 처지를 생각하면 씨받이 첩이라도 얻어서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 현실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2)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후였더라”(16:3);

1)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서 10년 동안이나 고달픈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브람 부부입니다(3).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을 침략한 메소포타미아의 다국적군대를 쳐부수어 나름대로 헤브론 지역에서 아성을 건설하고 이제는 어엿하게 호족의 하나로 행세하고 있는 아브람입니다(14:13-24).

2)    그 정도로 가나안 땅에서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으므로 아브람 부부는 가신(家臣) 가운데 충성스러운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고 그에게 효도를 받으면서 편히 여생을 지내고 싶어합니다(15:2-3). 그 이유는 무려 10년 세월을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하여 이방지역 가나안에서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오고 있지만 애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의 번성이 조금도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공부가 헛수고가 될 것만 같아서 이제는 하늘을 쳐다보지 아니하고 이 땅에서 가능한 현실적인 방안을 선택하고자 하는 아브람인 것입니다.

3)    그런데 아브람을 집 바깥으로 끌고 나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많은 별무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정도로 많은 자손의 번성을 주겠다고 그 옛날의 언약을 다시 재확인하고 있습니다(12:2, 15:4-5).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시 확약하고 있는 축복의 언약이므로 이제는 가장 아브람이 그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15:6).

4)    그러자 아내 사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들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 방법이 당시 가부장 고대사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종인 젊은 애굽 여인 하갈을 남편 아브람에게 씨받이 첩으로 제공하여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16:1-3). 그것은 10년 세월의 기다림을 성공으로 바꾸는 방법일까요? 아니면 실패로 나아가는 방법일까요? 그에 대한 설명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엘가나의 2아내 중 하나인 브닌나가 불임여성인 한나를 괴롭힌 것과 같음, 삼상1:5-6).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모세시대 기록원들이 그 판단을 여호와께 맡김, 5:21). 6. (여호와의 판단을 얻고자 아브람이 기도한 결과 여호와의 답변을 얻고서)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헤브론에 있는, 13:18)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애굽으로 가는, 15:22) 술 길 샘 곁에서 (광야에서 물이 떨어진 그녀를)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그리하면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임, 42:11).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6:4-10);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엘가나의 2아내 중 하나인 브닌나가 불임여성인 한나를 괴롭힌 것과 같음, 삼상1:5-6).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모세시대 기록원들이 그 판단을 여호와께 맡김, 5:21). 6. (여호와의 판단을 얻고자 아브람이 기도한 결과 여호와의 답변을 얻고서)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헤브론에 있는, 13:18)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16:4-6);

1)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피조물인 사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제멋대로 판단하여 세상적인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모든 것을 백지화하면서 도리어 모두에게 화를 내고 맙니다. 그와 같은 사래의 행동이 거침없이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2)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을 선용하여 다시금 여호와는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점을 똑똑하게 본문이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브람과 합방을 하게 되자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됩니다(4a). 그녀는 안방마님이 아니라 첩인 자신이 가장인 아브람의 자식을 임신하게 되었음을 알고서 기고만장합니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임신의 능력이 없는 늙은 안방마님은 이제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3)    둘째, 하갈 자신은 젊기 때문에 가장인 아브람과 합방하여 얼마든지 자식을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로서 안방마님 사래는 자신의 경쟁상대가 도저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례는 훗날 사무엘의 부친인 엘가나의 가정에서도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삼상1:6). 의기양양해진 씨받이 첩 하갈이 그만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맙니다(4b).

4)    그것을 보고서 사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아들을 얻고자 편법을 사용했더니 나타난 결과는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자신이 얻는 것은 수모 뿐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맙니다. 그리고 남편 아브람을 원망하면서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해보고서 씨받이인 몸종 하갈을 내치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5).

5)    아내 사래의 강력한 요구 앞에서 가장인 아브람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는 하갈을 내친다고 하면 애굽 출신인 그녀는 살길을 찾아 멀리 애굽으로 가고자 할 것입니다. 배가 불러 있는 그녀가 그 먼 애굽까지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헤브론을 벗어나게 되면 반()사막으로 불리고 있는 건조한 네게브 광야입니다. 그 다음에는 황량한 수르 광야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6)    집에서 쫓겨나면 식량과 양식이 떨어져서 광야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디 하갈 모자를 살려달라고 하는 아브람의 기도소리가 5절과 6절의 문맥 사이에서 은밀하게 들려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훗날 아기 모세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아들을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변 갈대밭에 두고 있는 그 부모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2:3-6).

7)    바로 그러한 때에 여호와의 응답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못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그것을 선용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며 역사 섭리인 것입니다(50:15-21). 여호와께서는 안방 마님 사래의 말 그대로 실행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뒷감당을 모두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브람에게 먼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8)    따라서 아브람이 아내 사래에게 속 시원하게 원대로 하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6a). 마침내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임신한 하갈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6b). 그녀가 가고 있는 길은 고향 애굽으로 가는 천리 길 머나먼 광야입니다. 과연 하갈과 그녀의 뱃속에 들어있는 자식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2)  7. (여호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애굽으로 가는, 15:22) 술 길 샘 곁에서 (광야에서 물이 떨어진 그녀를)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그리하면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임, 42:11).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6:7-10);

1)    사래의 잘못을 치유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광야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몸종 하갈을 부르시는 여호와의 음성으로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8). 이미 아브람의 기도에 응답하신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7a). 물과 양식이 떨어진 상태에서 절망에 빠져서 울부짖고 있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눈을 밝혀주어 샘물을 발견하게 하고(7b) 축복의 말씀을 언약으로 그녀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9-13). 그 내용의 대강이 우선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어떠한 학대와 핍박을 받더라도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9). 그것은 그 옛날 아브람에게 주신 여호와의 말씀 곧 부자인 족장 부친 데라의 엄청난 재산의 상속을 포기하고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12:1). 그리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집에서 하갈이 생존하고 아들을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돌보아 주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3)    둘째, 그와 같이 하갈이 희생을 무릅쓰고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그 보상이 상상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때에는 그 옛날 아브람 부부에게 준 첫번째 축복 곧 자손의 번성이 그녀가 낳게 되는 아들에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10). 그것은 이방여인 하갈에게도 동일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쌍방계약이 언약으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창조주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게 되면 그 보상은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차별이 없이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4:16).

셋째로,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이삭, 세례 요한, 예수의 경우와 동일함, 17:19, 1:13, 31).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야인이 된다는 것임. 에서의 경우에는 들사람으로 묘사가 되고 있음, 25:27)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광야의 약탈자요 지배자가 된다는 것임),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이스라엘과 아랍인, 또는 기독교와 회교의 문명권의 충돌)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나를 감찰하시고 샘물을 발견하게 하신 하나님)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헤브론에서 150리 남쪽이 베렛이고 가데스 바네아는 또 120리 남부임. 그러므로 하갈이 여러 날 수르 길로 도망하여 드디어 물이 떨어진 그곳 브엘라해로이는 헤브론에서 200리나 먼 거리에 있는 것임).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하갈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86였더라”(16:11-16); 여호와신앙이 없는 이방여인 하갈이지만 그녀가 창조주 여호와의 선지자인 아브람의 씨를 얻었기에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보살핌을 받고 또한 여호와의 축복의 예언을 얻게 됩니다. 그 점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이삭, 세례 요한, 예수의 경우와 동일함, 17:19, 1:13, 31).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야인이 된다는 것임. 에서의 경우에는 들사람으로 묘사가 되고 있음, 25:27)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광야의 약탈자요 지배자가 된다는 것임),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이스라엘과 아랍인, 또는 기독교와 회교의 문명권의 충돌) 하니라”(16:11-12);

1)    훗날 약속의 아들인 이삭, 메시아를 이 세상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소개하게 되는 세례 요한 그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있기 전에 본문에서는 어미 하갈의 뱃속에서부터 그 아들의 이름이 창조주 여호와에 의하여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이삭,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은 모두 선민에 속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쟁쟁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방여인 하갈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들의 이름을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마엘이라고 작명해주고 있습니다(11a). 그것은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과 이방인 차별없이 동일하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선민으로부터 훗날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친히 주신 그 이유와 목적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여호와께 부디 살려달라고 부르짖기만 하면 언제나 그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길을 열어 주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2:23-25). 그 약속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입니다(11b).

3)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에 대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바란광야와 미디안 광야 등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의 광야길에서 약탈민족으로 크게 활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주변의 여러 민족과 끝없이 분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12a). 둘째, 같은 아브라함의 소생인 이복형제들과 화친하지 못하고 서로 대결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12b). 그래서 그런지 현대 이스라엘과 아랍세력과의 분쟁 나아가서 기독교권과 회교권과의 분쟁이 아직도 세계의 화약고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2)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나를 감찰하시고 샘물을 발견하게 하신 하나님)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헤브론에서 150리 남쪽이 베렛이고 가데스 바네아는 또 120리 남부임. 그러므로 하갈이 여러 날 수르 길로 도망하여 드디어 물이 떨어진 그곳 브엘라해로이는 헤브론에서 200리나 먼 거리에 있는 것임)”(16:13-14);

1)    이방인 애굽 출신의 하갈이지만 그녀에게도 여호와신앙이 일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하고 있기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을 돌보시고 생명수를 주시는 분이 바로 아브람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발견하고 있습니다(13).

2)    둘째, 하갈 자신을 살리고자 샘물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기 위하여 그 샘이 있는 장소를 그녀가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곳은 헤브론에서 200리 남쪽에 떨어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가데스 바네아와 베렛 사이라고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훗날 약속의 아들 이삭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이복형 이스마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습니다(24:62, 25:11). 그로 인하여 부친 아브라함의 장례를 2형제가 사이 좋게 치르고 있습니다(25:9).

(3)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하갈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86였더라”(16:15-16); 헤브론 아브람과 사래의 집으로 되돌아온 하갈이 마침내 아들을 순산합니다(15a). 그녀는 아브람에게 수르 광야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하여 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얻자 아브람이 그 이름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름 이스마엘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15b). 아브람은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이 지난 해 곧 그의 나이 85세에 하갈과 합방하여 이듬해에 아들 이스마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서장자를 얻은 그해가 아브람의 나이 86세인 것입니다(16). 참고로 13년이 지나면 아브라함 99, 이스마엘 13세에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할례를 받고 있습니다(17:24-25).

결론적으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있습니다(21:4). 그런데 그보다 일년 전에 부친 아브라함과 이복형 이스마엘이 먼저 할례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명령으로 선민의 할례를 받은 인물은 사실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리게 되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을 하고 시내 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선민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독특한 선민의 특징으로 육체적인 할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입니다;

(1)  첫째, 아브람의 씨가 먼저 이스마엘로 태어나고 있으며 그 역시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나름대로 얻고 있습니다.

(2)  둘째, 선민의 표징이 육체적인 할례라고 한다면 약속의 아들 이삭보다 그의 이복형 이스마엘이 일년 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간적인 억지나 편법을 벗어나서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인위적인 2분법을 벗어버리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서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이 주일에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