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창세기 제21장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0. 24. 06:09

제목; “창세기 제21장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21:1-34)

설교일; 주후 2023102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24일 화요일 작성)

 

사도 바울은 그의 교리서신 로마서 제4장에서 아브라함을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4:16);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행적과 그의 믿음의 특징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설명을 나름대로 풀이해보자면 그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아브람과 사래 부부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땅 하란에서 오래 머물고자 하는 부친 족장 데라를 떠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11:31-12:4a). 그것이 아브람의 나이 75세 때의 일입니다(12:4b). 그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람 부부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만약 부자인 아버지 데라의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되면 네가지 축복을 아브람 부부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자손의 번성, 이름의 창대함, 철저한 보호하심,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 등이다”(12:1-3 의역);

(2)  둘째, 당시 아브람은 일편단심으로 조강지처 사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불임여성이기에 슬하에 자녀가 없습니다(11:30). 그러므로 아브람 부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 가운데 가장 첫번째의 것이 마음에 듭니다.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고 계시므로 그것을 얻고자 부자인 아버지 데라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상속권도 포기하고 남하를 한 것입니다.

(3)  셋째, 그런데 아브람은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나일강물이 풍성한 애굽제국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도중에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어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12:16-20). 아브람 부부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의 언약 가운데 자손의 번성보다 이방 땅에서 재물을 얻는 복이 먼저 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재산상속을 포기하고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 보상으로 애굽에서 큰 부를 얻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4)  넷째, 이제는 첫번째의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람 부부가 여호와신앙인으로 10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 전에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침입한 다국적군대를 쳐부수고 가나안 땅에서 일약 구국의 영웅이 됩니다(14:14-17). 따라서 아브람은 헤브론의 원주민 호족 아모리 족속 마므레에게서 산 땅에 자신의 아성을 마련하고 이제는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여생을 편히 지내고자 합니다(13:18, 14:13, 21-24). 하지만 여전히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 부부는 가신(家臣) 가운데 젊고 유능한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 그의 효도를 받으며 살다가 자신들의 ()을 상속해주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15:2).

(5)  다섯째,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의 계획에 반대하십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아브람 부부와 맺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상속자가 필요한데 이방지역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은 여호와신앙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대를 이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라고 했더니 그만 아브람 부부가 헤브론의 호족으로 편하게 살아가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들을 주지 아니하시더라도 유능한 가신을 양자로 삼아 상속권을 주면 여생을 편히 지낼 수 있다고 쉽게 세상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15:3-4a). 그것은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그 사명을 등한시하고 있는 잘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15:4b).

(6)  여섯째, 안방마님 사래는 여호와의 축복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자 결심합니다(16:1-2). 그것은 당시의 관습을 따라 씨받이 첩을 남편 아브람에게 제공함으로써 아들을 얻어서 상속자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마침 사래 자신에게 애굽 출신 젊은 몸종 하갈이 있기에 그녀를 남편에게 제공합니다. 그 결과 일년 후에 하갈의 몸에서 서장자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됩니다(16:15).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입니다(16:16).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지나자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고자 여호와께 간구합니다(17:18).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반대를 하십니다(17:19a).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7)  일곱째, 훗날 사도 바울의 지적에 따르면 이방여인 하갈은 여호와신앙이 없기에 아들 이스마엘에게 믿음을 상속하여 주지 못하고 있음을 여호와께서 알고 계십니다(4:23).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17:5, 15-16) 태어나는 약속의 아들 이삭(17:19) 아브람의 사명 곧 이방 땅에서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선지자로 대를 이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17:21). 그런데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부부는 이미 몸이 늙었고 더구나 사라는 평생 불임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17:17, 18:11-12).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단호하십니다;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8:14).

(8)  여덟째, 창세기 제15장 제6절에서 벌써 85세의 아브람이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고서 자신의 세상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실 자손의 번성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 여호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의롭게 된다)이론의 원형입니다(4:20-22). 그런데 99세의 아브람이 어째서 전능하신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속으로 웃고 있는 것일까요?(17:17). 그 이유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99세의 남편과 89세의 불임여성 아내가 합방하여 아들을 생산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9)  아홉째,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20세기 초엽의 정치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 6 21 ~ 1971 6 1) 의 전문용어를 빌린다고 하면 일종의 impossible possibility’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발생한 것입니다(21:1-7);

그러므로 겉으로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합방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브라함 부부가 회춘하여 얻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기적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 부부는 자신들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인생을 여호와의 약속과 그 예언의 성취만을 확신하면서 살아가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믿음의 성숙이며 성화의 결실입니다. 그러한 사실이 곧 창세기 제21장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 믿음의 주요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10)    열째, 창세기 제21장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언약이 자신의 당대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께서는 서장자 이스마엘을 돌보시고 세상적인 복을 주어 큰 나라를 이루게 할 것이라고 벌써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17:20). 그 말씀에 의지하여 아브라함이 하갈 모자를 광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란광야에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습니다(21:17-21).

2)   약속의 아들 이삭을 세상적인 관념을 뛰어넘어 여호와의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십니다(21:5-7).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자손의 번성이 확실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2:2a). 요컨대, 첫번째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성취가 된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3)   그리고 블레셋 5도시국가의 연맹왕인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 있습니다(21:31). 그것을 보고서 아브라함은 두번째 축복의 언약이 성취가 됨을 느끼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연맹왕과 당당하게 일대일로 조약을 체결하고 있으니 아브라함의 이름의 창대함이 대단한 것입니다(12:2b).

4)   평화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그랄 평야에서 우물을 여러 번 팠으나 그 우물을 전부 원주민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21:15-26). 그는 우물물을 원주민들과 나누어 가졌지만 블레셋 족속들의 탐욕이 지나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그 땅에 흘러 넘친다고 하는 네번째의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12:3b).

5)   그랄 땅에서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를 두텁게 보호하여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벌써 실감하고 있습니다(20:7, 17-18). 그것은 여호와의 세번째 축복의 언약이 강력하게 임한 결과입니다(12:3a). 그와 같이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 4가지가 전부 성취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21:33).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6)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모두 달성이 되었지만 이방 땅에서 여호와신앙인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아브라함은 한가지 남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고향인 영생하시는 여호와께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4:26, 셋과 에노스의 경우, 5:24, 휴거한 에녹의 경우, 21:33, 영생을 소원하는 아브라함의 경우).

7)   요컨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죄인의 몸을 벗고 영생의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숙을 이룬 아브라함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알기 쉽게 언급하고 있으며(8:56, 5:27-29, 3:13-17) 또한 히브리서저자가 그의 믿음의 장()히브리서 제11장 제16에서 재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성숙을 이룬 아브라함의 마지막 기도가 언제 성취가 되는 것일까요? 그 점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구속자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시고 육신적인 생을 마감하십니다. 그 은혜를 알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의인으로 간주가 된 성도에게는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그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십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입고서 남은 인생을 여호와신앙인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28:18-20, 1:8) 천국에 입성하는 영생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2:28-30).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에 안장이 되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5:27-29).

그때 성도들은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으로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살전4:16). 그와 같은 의미를 벌써 지니고 있는 본문 제21장 제33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이 세상의 평안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생을 확실하게 소망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그 다음 장인 창세기 제22장에서 모리아산의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22:1-2).

이상과 같은 다채로운 의미를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간략하게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을 아울러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visited Sarah, KJV),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did unto Sarah, KJV),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미 주신 여호와의 작명을 따라, 17:19)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지 8일만에 그가(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17:12, 정상적인 최초의)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18:12,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내심 믿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던 사라가 이제는 기쁨의 웃음을 얻고 있는 것임. 그것이 웃음이라는 이삭의 이름의 의미임).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30:23-24, 불임여성 라헬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임 여성이 되어 아들 요셉을 얻자 또 하나의 아들을 더 달라고 간구하고 있음. 그와 같은 여자의 마음이 사라에게서도 엿보이고 있는 것임)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21:1-7);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visited Sarah, KJV),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did unto Sarah, KJV),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미 주신 여호와의 작명을 따라, 17:19)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지 8일만에 그가(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17:12, 정상적인 최초의)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21:1-5);

1)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과 더불어 몸이 젊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블레셋의 그랄 평야에 들어갔을 때에는 연맹왕 아비멜렉이 그녀의 심히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서 후궁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20:2).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라는 불임이 치료되어 가임 여성의 몸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사라를 돌보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1a). 그 점을 킹 제임스 영어번역본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녀를 방문하여 그와 같이 조치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젊게 만들어준 결과 그들 부부가 합방하여 아들을 얻고 있습니다. 임신과 출산이 이루어진 것을 제1절 후반부에서는 여호와의 행하심(did unto Sarah, KJV)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1b).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성취하신 것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3)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 일이 발생하기 일년전에 미리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여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17:16, 18:10). 그렇게 예언대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제1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두차례의 기록입니다. 그와 같이 예언의 말씀을 먼저 주신 이유는 때가 되어 예언이 실현되었을 때에 그것이 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새 역사의 창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확실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라는 뜻이라고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48:5-7).

4)    기적의 아들 적장자가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자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릅니다(3).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난지 8일만에 정식으로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4).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이고 사라의 나이가 90세입니다(5). 사라의 경우에는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대기록입니다. 90세의 불임여성이 회춘하여 아들을 생산하는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믿는 것이 제21장 첫머리에서 선을 보이고 있는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입니다;

  

(2)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18:12,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내심 믿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던 사라가 이제는 기쁨의 웃음을 얻고 있는 것임. 그것이 웃음이라는 이삭의 이름의 의미임).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30:23-24, 불임여성 라헬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임 여성이 되어 아들 요셉을 얻자 또 하나의 아들을 더 달라고 간구하고 있음. 그와 같은 여자의 마음이 사라에게서도 엿보이고 있는 것임)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21:6-7); 다음 두가지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내년 이맘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에 그들 부부는 내심 믿지 못하고 차례로 쓴웃음을 짓고 있습니다(17:17, 18:12). 창조주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선지자 부부의 비웃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삭으로 미리 작명하십니다. 이듬해에 이삭을 생산한 사라는 젖을 먹이면서 기쁨의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6). 남편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이 비웃음이 마침내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이며 놀라운 은혜입니다.

2)    둘째, 기적의 아들 이삭을 얻어 젖을 물리면서 사라가 한가지 소원을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에 이어서 또다른 자녀를 얻어서 젖을 먹이고 싶다는 것입니다(7). 그러한 사라의 소원이 내포되어 있는 복수의 용어가 자식들을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훗날 사라의 손자 며느리인 라헬7년만에 불임이 여호와의 은혜로 치료되어 아들 요셉을 얻게 되자 똑같이 다음과 같이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30:24).

둘째로,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보통 2-4살임. 여기서는 2살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스마엘이 아직 17세가 되지 아니하여 짐을 모친 하갈이 지고 있기 때문임, 14, 22:6, 상대적으로 모리아산행의 이삭은 17세 이상으로 보임)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여인 하갈의 아들(16세의 이복형 서장자 이스마엘)(2살짜리 이복동생 적장자)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서장자 이스마엘)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근심이 있는 자는 여호와께 기도하여야 함. 특히 예언의 말씀이 이미 있었으므로 그 이행을 요구해야 함, 17:20), 12.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내가 약속대로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혈통적인 의미로 단순하게 해석하면 선민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음. 그러나 이삭의 아들 가운데 야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쌍둥이 형 에서도 있으므로 선민과 이방인 모두 이삭의 믿음을 상속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임).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7:20 예언의 확인임).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이스마엘이 아직 17세가 아니라는 의미임)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21:31,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지역)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16:7절에서는 멀리 도망한 하갈임.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마엘을 데리고 멀리 가지 못한 것임),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반사막성 네게브 지역이기에 큰 나무가 아니라 관목덤불이 있는 것임)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100미터 이내로 보임)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하갈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신 이유는 창16:11절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여호와께서 그 아이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임)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10:9, 니므롯과 같은 영걸을 말함), 21. 그가 바란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21:8-21);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보통 2-4살임. 여기서는 2살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스마엘이 아직 17세가 되지 아니하여 짐을 모친 하갈이 지고 있기 때문임, 14, 22:6, 상대적으로 모리아산행의 이삭은 17세 이상으로 보임)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여인 하갈의 아들(16세의 이복형 서장자 이스마엘)(2살짜리 이복동생 적장자)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서장자 이스마엘)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근심이 있는 자는 여호와께 기도하여야 함. 특히 예언의 말씀이 이미 있었으므로 그 이행을 요구해야 함, 17:20), 12.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내가 약속대로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혈통적인 의미로 단순하게 해석하면 선민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음. 그러나 이삭의 아들 가운데 야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쌍둥이 형 에서도 있으므로 선민과 이방인 모두 이삭의 믿음을 상속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임).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7:20 예언의 확인임) ”(21:8-13);

1)    100세의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어서 마냥 기뻐하고 있습니다(21:5-7). 그런데 2년이 지나자 일찍 젖을 뗀 이삭을 정식으로 상속자로 삼는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8). 그것을 보고서 16세의 서장자 이스마엘은 심통이 나고 있습니다. 이복동생 이삭이 적자로 태어나자 서자인 자신은 이제 상속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을 참지 못한 이스마엘이 남의 눈을 피하여 2살짜리 이삭을 쥐어박고 있습니다. 그것을 안방마님 사라가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2)    사라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21:10). 그 말을 듣자 아브라함은 크게 고민합니다(11). 이스마엘도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곧바로 아들 이스마엘에게 주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의지하여 약속의 이행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17:20). 그 결과 안심하고 아내 사라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라는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12). 여호와께서는 이스마엘에게 약속한 세상적인 축복을 확실하게 이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13).

(2)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이스마엘이 아직 17세가 아니라는 의미임)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21:31,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지역)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16:7절에서는 멀리 도망한 하갈임.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마엘을 데리고 멀리 가지 못한 것임),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반사막성 네게브 지역이기에 큰 나무가 아니라 관목덤불이 있는 것임)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100미터 이내로 보임)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하갈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신 이유는 창16:11절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여호와께서 그 아이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임)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10:9, 니므롯과 같은 영걸을 말함), 21. 그가 바란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21:14-21);

1)    16세로 보이는 이스마엘의 어깨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떡이 든 보자기와 물이 든 가죽부대를 어미인 하갈의 어깨에 매워주고 있습니다(14a). 그로 미루어 보아 이스마엘은 건장한 체격이 아니라 몸이 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갈은 그 옛날 이스마엘을 임신하고 있었을 때에 혼자서 멀리 도망한 적이 있지만(16:7) 이번에는 브엘세바 집에서 멀리 가지를 못하고 인근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14b).

2)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광야의 더위를 이기지 못하여 물을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물이 떨어진 모자는 절망에 빠져서 샘물을 찾다가 그만 100미터 가까운 거리에 서로 떨어져서 마주보면서 울부짖고 있습니다(15-16). 그러나 주위에는 그 울음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인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광야는 인적이 드물어 두렵고 무서운 곳입니다.

3)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마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17). 그 이유는 그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미리 지어준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16:11). 사람이 살아가기에 참으로 어려운 환경이 광야입니다. 여호와의 특별한 보호하심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습니다.

4)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은 여호와의 돌보심과 번성함이라는 세상적인 축복의 예언을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생활에서 돌보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당장 하갈의 눈을 밝게 하여 쉽게 샘물을 찾아내게 합니다(19). ②이스마엘의 신체를 튼튼하게 만들고 활을 잘 쏘는 무인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20). ③바란광야에서 애굽인 아내를 얻고(21) 그 자손이 번성하며 큰 민족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18).

셋째로, “22. 그때(아브라함 가족이 그랄 땅 원주민들의 텃세에 밀려서 멀리 변방 브엘세바에 살고 있는 때)아비멜렉(26:26, 왕의 이름이 아니라 곡창지대 그랄평야를 소유하고 있는 블레셋 연맹왕의 칭호임)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것도 군대장관의 칭호임)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아채고 있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20:7, 18, 피해를 입히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20:14-16, 사라를 돌려보내고 보상금을 넉넉하게 주고 또한 거주권을 준 것임)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후대)할 것이니라. 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평화조약을 맺는다는 것임)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그랄 땅의 블레셋 족속)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26:14-18, 그랄 땅에서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원주민들이 연고권을 내세우고 힘을 행사하여 빼앗은 사실이 80년후 그의 아들 이삭에게 있어서도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임)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블레셋의 연맹왕을 책망할 정도로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해진 것임, 12:2), 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그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함. 그 이유는 지금 그랄 평야 변경에 머무르고 있는 아브라함이 만약 동진하여 가나안 지경으로 들어가는 경우 그는 그랄 땅에서 입은 원주민으로부터의 피해로 인하여 여호와께 블레셋 족속을 저주할 가능성이 있음.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아비멜렉이 은밀하게 방문하여 평화조약을 맺기 원하고 있음. 따라서 그는 그 모든 일을 벌써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정치적인 인물인 것임).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이것은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이다). 28. 아브라함이 7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7암양 새끼를(가장 작은 완전수 7을 선택한 것임. 10마리나 12마리보다는 작은 수의 새끼가 경제적임) 따로 놓음은 어쩜이냐?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7을 받아 내가 이(브엘세바의)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아브라함의 피해의식이 대단함), 31. 두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26:31-33, 아들 이삭과 아비멜렉의 경우, 31:51-55, 손자 야곱이 장인 라반과 맹세한 경우) 그곳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그후 여호와를 개인적으로 섬긴 기록이 없음),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Tamarisk tree)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4:26, 영생하시는, 한글개역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브엘세바)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22:19, 23:1-2, 사라 127세가 되기 수년전에 아브라함 가족은 브엘세바에서 헤브론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임)”(21:22-34); 다음과 같이 4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2. 그때(아브라함 가족이 그랄 땅 원주민들의 텃세에 밀려서 멀리 변방 브엘세바에 살고 있는 때)아비멜렉(26:26, 왕의 이름이 아니라 곡창지대 그랄평야를 소유하고 있는 블레셋 연맹왕의 칭호임)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것도 군대장관의 칭호임)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아채고 있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20:7, 18, 피해를 입히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20:14-16, 사라를 돌려보내고 보상금을 넉넉하게 주고 또한 거주권을 준 것임)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후대)할 것이니라. 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평화조약을 맺는다는 것임) 하고”(21:22-24);

1)    여기서 그때는 블레셋 5도시국가의 연맹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개인적으로 아브라함을 만나고자 그랄 평야의 동쪽 변방에 있는 브엘세바로 찾아온 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2). 참고로 훗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랄 평야에서 살다가 동쪽으로 쫓겨나면서 브엘세바에 살고 있을 때에도 아비멜렉과 비골이 은밀하게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26:26). 두 시점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2)    첫째, 아브라함의 그때와 이삭의 그때 사이에는 약 8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계산의 방법은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아내 사라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임신하고 있을 때로 보이고 이삭의 경우에는 60세에 쌍둥이 아들을 얻고 그들의 나이가 20세 약관으로 보이는 시점 곧 이삭의 나이 80세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연맹왕의 이름이 여전히 아비멜렉이고 군대장관의 이름이 비골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칭호이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둘째, 두 경우 모두 그들이 히브리인인 아브라함 또는 이삭과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맺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1:22b, 26:28). 그 사실을 아브라함 또는 이삭의 아내를 탐했던 아비멜렉이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20:7, 18, 26:10-11). 다만 하나의 차이점은 아브라함의 시절에는 브엘세바가 블레셋의 영토 안에 있고 이삭의 경우에는 가나안에 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후대)할 것이니라”(23b)는 대목에서 여실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그랄 땅에 여전히 브엘세바가 속하고 있기에 그 점을 본문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와 달리 80년의 세월이 흘러 이삭의 경우에는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헤브론과 네게브 지역에 새로운 지배자 헷족속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주민 아모리 족속의 땅을 빼앗고(23:3-4) 블레셋 족속의 땅 브엘세바도 당시에 점령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26:29, “네가 평안히 (블레셋의 지경을 벗어나서 가나안의 브엘세바로) 가게 하였음이니라”).

5)    셋째,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여전히 블레셋 5도시국가의 연맹왕 아비멜렉이 지배하고 있는 평야 그랄의 변방 브엘세바에서 생활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통치자인 그가 제시하고 있는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에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평화조약을 맺는다는 것임) 하고”(21:24)라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서운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점을 아브라함이 차제에 말하고 아비멜렉왕의 확실한 보장을 받아내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25-31).

(2)  25. 아비멜렉의 종(그랄 땅의 블레셋 족속)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26:14-18, 그랄 땅에서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원주민들이 연고권을 내세우고 힘을 행사하여 빼앗은 사실이 80년후 그의 아들 이삭에게 있어서도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임)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블레셋의 연맹왕을 책망할 정도로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해진 것임, 12:2), 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그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함. 그 이유는 지금 그랄 평야 변경에 머무르고 있는 아브라함이 만약 동진하여 가나안 지경으로 들어가는 경우 그는 그랄 땅에서 입은 원주민으로부터의 피해로 인하여 여호와께 블레셋 족속을 저주할 가능성이 있음.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아비멜렉이 은밀하게 방문하여 평화조약을 맺기 원하고 있음. 따라서 그는 그 모든 일을 벌써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정치적인 인물인 것임).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이것은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이다) ”(21:25-27);

1)    아브라함이 감히 블레셋의 연맹왕인 아비멜렉에게 책망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25). 그것도 여전히 그랄 땅에 속하는 변방 브엘세바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지배자인 아비멜렉에게 그 잘못을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아브라함이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을 매우 두텁게 보호하여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블레셋의 연맹왕 아비멜렉이 부디 평화조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선지자인 아브라함의 저주를 받지 아니하겠다고 먼 길을 달려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일개 떠돌이 호족이므로 별로 힘이 없지만 그를 보호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블레셋 족속이 어찌할 수가 없는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그 점을 알게 되었기에 아브라함이 그랄 평야에서 자신의 종들이 판 우물물을 원주민들과 나누어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12:3) 그들이 탐욕이 생겨서 힘으로 마구 빼앗아 간 사실을 심히 섭섭하다고 아비멜렉에게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5).

3)    그 말을 듣자 블레셋의 연맹왕 아비멜렉은 임기응변으로 책임을 모면하기에 바쁜 모습입니다(26). 그러한 사실을 아비멜렉이 이미 알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랄 땅의 원주민에게서 그와 같은 불이익을 당한 아브라함이 이제 브엘세바를 떠나 가나안 지경으로 완전히 들어가버리는 경우에는 그의 호소에 의하여 여호와의 저주가 그랄 땅에 임하는 것을 아비멜렉이 심히 두려워하여 허겁지겁 브엘세바로 달려와서 아브라함과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4)    한마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 정도로 아비멜렉을 질책한 다음에야 아브라함이 흔쾌하게 그와 일대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27). 그 이유는 그들 블레셋 족속의 땅에 거주하면서 여호와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창조주로 믿고서 구원을 얻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저주와 멸망이 아니라 그들도 여호와의 뜻을 알고서 회개하고 구원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책무인 것입니다(3:4-10, 12:39-40). 그러므로 여호와의 살롬에 속하는 평화조약을 회피할 이유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3)  28. 아브라함이 7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7암양 새끼를(가장 작은 완전수 7을 선택한 것임. 10마리나 12마리보다는 작은 수의 새끼가 경제적임) 따로 놓음은 어쩜이냐?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7을 받아 내가 이(브엘세바의)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아브라함의 피해의식이 대단함), 31. 두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26:31-33, 아들 이삭과 아비멜렉의 경우, 31:51-55, 손자 야곱이 장인 라반과 맹세한 경우) 그곳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 이름하였더라”(21:28-31);

1)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차제에 한가지 아비멜렉의 보장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그랄 땅의 변방 브엘세바에서 그가 우물물을 또 하나 얻고 있는데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아비멜렉이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암양 새끼 7마리를 아비멜렉에게 주고서 그의 확약을 받아내는 것인데 그 절차가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2)    참고로 그 일을 위하여 아브라함은 경제적으로 제물을 아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양이 아니라 암양 새끼이며 최초의 완전수 7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의 완전수인 10이나 12가 아닌 것은 더 많은 재물을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맹세로 말미암아 완전한 소유권을 가지는 자신의 우물이 여호와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그 지역의 이름을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브엘세바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31). 그 지역의 이름이 훗날 아브라함이 그 지역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똑 같은 일이 80년 후에 그의 아들 이삭의 시대에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때 브엘세바라고 하는 지명이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26:33).

(4)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그후 여호와를 개인적으로 섬긴 기록이 없음),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Tamarisk tree)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4:26, 영생하시는, 한글개역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브엘세바)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22:19, 23:1-2, 사라 127세가 되기 수년전에 아브라함 가족은 브엘세바에서 헤브론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임)”(21:32-34);

1)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아비멜렉과 비골은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아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왕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32).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결코 여호와를 창조주로 모심으로 인하여 구원의 축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잘 보여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만 맺으면 그만이지 여호와를 창조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행동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것이 무당을 이용하여 신의 노여움만 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며 행동양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는 아비멜렉과 비골이 떠나고 나자 브엘세바의 우물가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한가지 소원을 기도하고 있습니다(33). 그의 기도는 창세기 제4장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아담의 아들 셋의 간구와 흡사한 것입니다(4:26).

3)    세상적인 눈으로 보게 되면 에셀나무는 가나안 땅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바늘잎을 가진 사철수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관상수나 기념식수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셀나무(Tamarisk tree)는 한가지 보이지 아니하는 큰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지상의 높이가 10미터라고 한다면 그 뿌리는 그 3배에 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렇게 30미터까지 뻗어서 생수를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수를 찾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4:10). 천국을 얻고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재산과 재능을 사용하여 보화가 묻혀 있는 넓은 밭을 전부 사고서 그 다음에는 그 보화를 찾아내고자 전력투구를 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의 삶의 모습을(13:44)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나무가 바로 에셀나무라고 하겠습니다.

5)    아브라함은 에셀나무를 브엘세바에 심고서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한가지 마지막 소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몸을 벗고서 영생의 몸을 입고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는 구원주를 이 세상에 보내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훗날 예수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구속자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결론적으로, 훗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그 뜻을 풀이하여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의 말씀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희구하고 있는 영생의 주제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7-29).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방 땅에서 평생을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선지자로 살아가고 있는 아브라함의 체험적인 깨달음과 마지막 기도의 제목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체험과 깨달음은 창세기 제12장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4가지의 축복의 언약이 그랄 땅과 브엘세바에서 모두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첫째가 약속의 아들 이삭이 창조주 여호와의 돌보심과 역사로 그들 부부에게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자손의 번성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둘째가,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은 블레셋의 연맹왕 아비멜렉과 대등하게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창대함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 족속이 살고 있는 그랄 땅에서 여호와께서는 철저하게 아브라함 부부를 보호하여 주셨기에 그러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이 세번째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랄 땅에서 우물을 파게 되면 여호와의 은혜로 물이 솟아나고 그 물을 원주민들과 나누어서 사용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네번째 언약의 축복입니다.

그와 같은 4가지 축복의 언약이 자신의 남은 평생에 달성이 되는 것을 체험하고 난 아브라함이 감히 마지막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몸을 가진 자신이 향년을 마치게 되면 무덤속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며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구원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성자의 영광을 보유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성육신하게 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공생애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영생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나라에서의 영광이 성도들에게도 주어지는 복음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28:18-20, 1:8, 22:28-30).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복음 가운데 그 옛날 여호와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의 응답이 들어 있음을 알게 해주는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을 자주 읽고 묵상하시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어 저와 여러분이 모두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