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96강(민18:21-2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0. 21. 16:16

민수기 강해 제96(18: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125()

 

이스라엘 12지파가 여호와께 바치는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이유 세가지가 무엇인가?(18:21-24)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가 여호와께 바치고 있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몫으로 주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말씀하십니다;

(1)  첫째, 이스라엘 12지파의 장자들 대신에 레위인을 택하여 여호와의 것으로 삼고(3:12) 전적으로 회막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일꾼인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생계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18:21b).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12지파가 여호와께 바친 십일조입니다(18:21a).

(2)  둘째, 전적으로 회막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되는 레위인들이기에 넓은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경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업을 주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에게서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들에게 분깃으로 주는 것입니다(18:23b-24).

(3)  셋째, 회막에서 제사장들의 지시를 받아서 성막을 분해하여 운반하고 지성물을 운반하며 또한 성막을 조립하여 세우고 지성물을 제 자리에 배치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잘못 다루게 되면 여호와의 진노로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4:20). 그러므로 레위인들에게는 12분의 1조가 아니라 10분의 1조를 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 두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1)    하나는 레위인들은 12지파의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게 되면 그것의 십일조를 다시 떼어서 제사장들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에게 레위인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부탁하기 위한 것입니다(18:26).

2)    또 하나는 본래 12분의 1조이면 되는데 10분의 1조로 더 많이 레위인의 몫으로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떼어서 여호와께 바친다고 하더라도 150분의 1이 남습니다. 계산의 방법은 1/10-1/12-1/100=8/1200=1/150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인들에 대한 일종의 위험 수당이라고 하겠습니다(18:23a).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18:21);

(1)  레위 지파의 사람들은 크게 보아 아론의 집안과 기타 가문으로 나누어집니다; 아론의 집안은 제사장 가문이 됩니다(28:1, 3:1-4, 10). 그리고 기타 가문들은 모두 제사장의 지시를 받아서 회막에서 전적으로 일하는 일꾼들입니다(3:5-9). 그러므로 레위 지파의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께 속하며 회막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기업을 얻거나 분깃을 얻어서 소득을 얻는 일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2)  그렇다면 그들은 생계를 어떻게 꾸려 나가게 되는 것일까요? 그 방법이 바로 이스라엘 12지파가 여호와께 바치고 있는 4가지의 헌물과 제물들을 여호와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여호와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하여 주시는 몫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기록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 가운데 화제나 소제로 태우지 아니한 것들은 모두 제사장들의 음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18:11). 그것들이 이른바 거제물과 요제물입니다.

2)    둘째, 첫 수확물 가운데 좋은 것을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칩니다(18:13). 그것들이 제사장들의 몫이 됩니다.

3)    셋째, 백성들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대속하기 위하여 속전과 어린양을 드리고 제물을 드립니다(18:15-18). 그것들이 제사장들의 분깃입니다.

4)    넷째, 12지파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여호와께 바칩니다. 그것을 여호와께서는 회막의 일꾼인 레위인들의 분깃으로 주십니다(18:21). 그 이유는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12지파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분깃으로 주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입니다;

1)    첫째, 세상일을 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회막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만 하는 일꾼이 바로 레위인들입니다(18:20, 24). 그러므로 그들의 생계를 돌보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들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18:21).

2)    둘째, 레위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십일조를 받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 대신에 그 기업을 12지파에서 대신 할당 받아서 소출을 얻고 그것을 여호와께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18:20, 24, 27:30). 따라서 소작료 삼아서 여호와께 십일조를 바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처음 인구조사를 할 때에 12지파의 장자의 수를 계산하고 그 수와 레위인들의 수를 상계하여 대속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3:39-45). 그러므로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장자들을 대신하여 복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주어서 레위인들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의무사항인 것입니다.  

둘째로,이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18:22); 그 의미에 있어서 앞절 및 바로 뒷절과 이중적으로 연결이 되고 있는 문장입니다.

(1)  첫째, 앞절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장자들을 대신하여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전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 덕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사람들이 회막에 와서 봉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전업으로 이 세상에서 기업을 일구고 분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십일조를 바치고 그것을 여호와께서는 회막의 일을 12지파 대신에 담당하고 있는 레위인들에게 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2)  둘째, 바로 뒷절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회막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하면 그 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할 수가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10:1-2, 4:20). 그러므로 그 죄값을 지는 일을 레위인들이 맡고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은 면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레위인들 덕택에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은 회막에 접근하지 아니하여도 되므로 잘못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사서 죽게 되는 일이 미연에 방지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어 그 생계를 보전해주는 것이 지당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18:23);

(1)  유월절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고 있습니다. 그날 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에 발라져 있지 아니한 집에는 죽음의 천사가 방문을 합니다.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들이 일거에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12:29-30). 반면에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에 뿌리라고 지시를 하십니다. 그 처방 덕분에 이스라엘의 장자들과 가축의 초태생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12:1-14).

(2)  그렇다면 그날 밤 여호와의 조치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을 벗어나고 있는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조상을 가졌다고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만 편애하여 살길을 열어주고 애굽인들에게는 줄초상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넓은 사랑과 구원의 이치를 벗어나고 있는 처사이므로 그 시정이 필요합니다(19:22-25). 그러므로 출애굽 직후에 여호와께서는 그날 밤 살아 남은 이스라엘의 장자들과 가축의 초태생들은 모두 여호와께 속한다고 선언을 하십니다(13:1-2).

(3)  그때부터 그들의 명줄은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죄인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것으로 삼아서 달리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시내 광야에서 12지파에 독자적인 군대를 편성하시면서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십니다. 12지파의 장자 대신에 레위인들을 여호와의 종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3:45). 그때부터 레위인들이 제사장들을 도와서 회막에서 여호와를 전적으로 섬기는 일을 도맡게 됩니다(3:5-9).

(4)  그러한 맥락에서 레위인들은 여호와께 빚을 지고 있는 죄인이며 종들입니다. 죽을 목숨이 유월절 사건으로 되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회막에서 여호와를 주인으로 섬기는 일 외에는 세상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깊숙한 성경신학적인 의미가 본문의 구절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18:23)고 하는 문장 가운데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5)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죄인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의 제사 덕분에 구원을 받아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고 있는 성도들은 세상의 기업보다는 성막에서 여호와를 섬기며 그 뜻을 실천하는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18:24);

(1)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치고 있는 헌물과 제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것을 여호와께서는 레위인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십일조를 생활비로 받게 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세상적인 일을 경영할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생활비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십일조를 거두어서 레위인들에게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맡기신 일에 전적으로 헌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종인 레위인의 의무입니다.

(2)  만약 이스라엘 자손들이 더 이상 십일조를 여호와께 바치지 아니하게 되면 레위인들의 생계는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2성전 시대에 느헤미아 총독이 전국에 산재하여 살고 있던 레위인들을 모두 모아 예루살렘에서 성전 일을 돌보면서 살도록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7-9, 13:8-31).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의 레위인들에게 생활비를 주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십일조 바치기 운동을 전개합니다.

(3)  하지만 자신을 신임하던 페르시아의 황제 아닥사스다가(2:1, 13:6) 서거하고 나자 느헤미야가 갑자기 권력을 잃어버리고 그의 종교개혁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유대 땅의 이스라엘 지손들은 더 이상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결국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맙니다(13:10). 그 기가 막힌 광경을 보고서 말라기 선지자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고 레위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려서 예루살렘성전을 떠나고 말았기에 이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3:7-12). 

결론적으로, 여호와께서 레위인들에게 백성들이 낸 십일조를 생계비로 주고 있는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장자들을 대신하여 여호와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또 하나는, 자신들이 받을 땅이라고 하는 기업을 이스라엘 12지파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종의 소작료를 십일조로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와 같은 두가지 은혜를 세상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들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대신 행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고마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일꾼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중보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파가 되고 영생구원의 축복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타락의 내용을 느헤미야의 기록과 선지자 말라기의 기록에서 읽을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그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아니하도록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도님들에게 그러한 깊은 깨달음과 성찰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