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44(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9. 23. 16:57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44(손진길 소설)

 

허굉필최제선에게서 빌린 서책을 다음날 아침식사를 끝내고 돌려주자 그가 깜짝 놀라서 말한다; “저녁시간이 아니라 아침나절에 되돌려 주시니 정말 말씀하신 대로 밤새 이 서책을 다 읽으신 모양이군요. 어떻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 더러 있습니까?... “.

그 말을 듣자 허굉필최제선을 보면서 간략하게 대답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학(天主學)의 주장과 우리 조선에서 조상 대대로 전해지고 있는 유불선(儒佛仙)의 주장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잘 정리하고 있더군요. 실로 탁견입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가치판단을 보류하면서 단지 그 서책의 내용을 그와 같이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하고 있는 허굉필이다. 그의 조심스러운 언급으로 미루어 보아 정치적인 측면을 말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제선이 금방 눈치채고 있다.

따라서 그가 조심스럽게 허굉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왕정국가에 있어서 임금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자식같이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 유교의 통치철학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점과 관련하여 서양의 천주학에서는 백성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고 더욱 강조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최제선이 잠시 허굉필의 표정을 살핀다. 별로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간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마음속에 이미 불법(佛法)이 들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더구나 도교에서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근원적인 힘과 질서를 터득하게 되면 사람이 신선(神仙)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

최제선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그 이치를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이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니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가치를 국가의 권력이나 사회적인 재력으로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지요. 오늘날 국왕이 백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왕정국가는 곧 사라지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가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다가오고 있지요”;

그 말을 듣자 허굉필이 눈을 감고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 다음에 천천히 말한다; “잘못 이해하게 되면 왕정국가 조선을 끝장내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과격한 주장으로 들리게 됩니다. 청국은 황제가, 조선은 국왕이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과연 가능할까요?... “.

그 말에 최제선이 빙그레 미소를 띄면서 여유 있게 설명한다; “저는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학의 주장과 우리 조선의 전통적인 유불선의 가르침을 상호 비교하면서 제 나름대로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렸지요. 하지만 문제는 청나라와 우리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꿈과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3년전에 우연히 한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임을 확인했지요!… “.

그 말을 듣자 허굉필이 깜짝 놀라고 있다. 최제선은 자신의 주장이 이미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로 가지고 있는 이론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설명을 귀 기울여 더 듣고자 한다.

마침내 최제선의 증언이 들려온다; “제가 3년전에 하동지방을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 청나라 사람으로서 통역으로 오래 일하고 있는 이인용(李仁龍)이라고 하는 인물을 우연히 만났지요. 우리는 조선말로 서로 대화를 했습니다. 그때 “;

허굉필이인용을 벌써 알고 있다. 그 자가 바로 구례현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이지룡의 친동생이기 때문이다. 나이로 따지면, 청나라 말의 통역인 이지룡이 허굉필 자신과 동갑이므로 그의 동생인 이인용2살 연하가 된다.

이어지고 있는 최제선의 설명이 그 자가 바로 허굉필이 알고 있는 이인용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인용은 청나라에서 오래 전에 조선으로 이주를 했어요. 그의 나이가 나보다 한해 아래이기에 우리는 편하게 서로 이야기하고 나중에는 좋은 벗이 되었어요”.

허굉필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설명을 더 듣고자 한다. 최제선의 자세한 설명이 들려온다; “이인용은 조선인 아내와 함께 하동에 살면서 관청의 일을 돕고 있어요. 청국말에 능통하기 때문이지요. 그 밖에 그는 정기적으로 청나라 남동부 끝에 있는 섬 홍콩과 마카오를 방문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

이지룡의 아우가 어째서 청나라를 방문하고 있는가?’, 허굉필은 그 점이 궁금하다. 이내 최제선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인용이 개인적으로 서양의 선진문물과 서구열강의 서세동점(西勢東占)에 관하여 호기심이 크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는 차제에 서양의 좋은 물건을 싸게 들여와서 조선의 부호들에게 은밀하게 팔고 있답니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다. 따라서 허굉필이 재촉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국왕이 아니라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그러한 사례가 정말 있다는 것입니까?”.

최제선이 자신있게 대답한다; “, 이인용의 말에 따르면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서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연대계산법 곧 서기(西紀)에 따르면 1776년에 미국이 모국인 영국의 국왕을 떼어내고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그러한 나라를 신대륙에서 만들었다고 해요. 더구나… “;

흥미진진한 설명이 다음과 같다; “1789년에는 구라파의 불란서에서 국민들이 궐기하여 황제를 처형하고 시민혁명에 성공했다고 해요. 그것으로 나라의 주권이 왕에게서 시민에게로 이전된 것이지요;

 그 다음에 산업혁명이 발생한 섬나라 영국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지금은 서세동점에 나서고 있지요. 그리고 영국에서는 더 일찍 1689년에 국왕은 오로지 명예직에 불과하다는 선언을 하고 말았다고 해요”.

최제선의 설명이 끝나자 허굉필은 말을 하지 아니하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와 같은 큰 변화를 자신은 어째서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웃에 있는 청나라와 일본의 사정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구라파와 미국에 대해서는 여전히 청맹과니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깊은 숨을 토하면서 허굉필최제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선비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나의 견해가 참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다스리고 있는 거대한 중원대륙의 청나라가 어째서 서구열강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군요… “.

 허굉필의 결론이 다음과 같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있는 서구열강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한사람의 국왕이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우리 조선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 말을 듣자 최제선이 빙긋 웃으면서 여유를 가지고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능력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천지개벽의 그 방법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있는 하늘의 상제가 우리 조선 백성들이 서구열강에게 잡아 먹히지 아니하도록 그 비책을 마련하여 제게 알려주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방책이 주어질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하하하… “;

그 말을 들으면서 허굉필은 한가지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높은 수준의 학문과 사상체계를 가진 민족이 국제관계를 선도할 수가 있다. 하지만 기계를 이용한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압도적인 생산력을 가진 산업선진국이 당장 물량공세에 나서게 되면 산업 후진국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잡아 먹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은둔의 나라 조선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

당장은 해답이 나오지 아니하고 있다. 따라서 허굉필최제선에게 훗날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동래에서 헤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들 허지동을 잘 보살펴 달라고 김준우 부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허굉필이 준마에 채찍을 가하여 열심히 달린 결과 115일에 벌써 한양의 서쪽에 있는 김포군에 도착한다. 밀린 결재를 하고서 그는 1857년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있다.

이듬해 18582월 중순에 허굉필이 한양을 방문한다. 그 이유는 병조의 홍재덕 참의가 그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참의의 집무실에서 홍참의가 은밀하게 허군수에게 말한다; “굉필 아우, 흥선군을 자네에게 한번 보여줄 테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나름대로 파악을 해보시게!… “.

그 말을 듣자 허굉필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하는 생각을 한다. 따라서 홍참의의 말을 경청한다; “그와 나는 정치적인 운명을 걸고서 한가지 도박을 준비하고 있어요. 추후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극비의 회담이니 이틀 후 저녁에 나와 함께 비밀리에 흥선군을 만나도록 하자고!... “.

허굉필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제가 하숙집에 갈 수가 없겠군요. 저의 행적을 노출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 형님의 집에 함께 가서 문객으로 잠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비밀행동을 하기에 더 낫지요!... “.

그 말을 듣자 홍참의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인다. 그의 집에 식객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장 영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허군수는 홍참의의 식객이 되어 이틀을 지내면서 잠시 외출할 때에는 평범한 선비의 복장을 하거나 때로는 무인의 복장을 한다.

이틀이 지난 저녁에 홍참의허군수를 마치 자신의 호위무사로 꾸며서 흥선군의 집으로 간다. 가는 길에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굉필 아우, 자네가 오늘은 흥선군의 관상을 좀 보아주게. 그 자가 과연 훗날 조선의 대권을 쥐고 흔들 수가 있는지? 아니면 별 볼일이 없는 인물인지 말이야!... “.

 홍참의가 자주 드나들고 있는 집이기에 흥선군의 집에서 그의 행보가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만 그날은 호위무사가 허굉필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그날 밤 홍참의를 호위하면서 허굉필이 흥선군의 사랑방까지 들어간다.

호롱불 아래에서 허굉필흥선군의 얼굴을 살핀다. 대화는 홍참의와 흥선군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호위무사로 위장하여 허군수가 따라 왔기에 그 낌새를 왕족인 흥선군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허굉필이 내심 생각한다; “집념과 고집이 있는 인상이다. 심계가 깊어서 판세를 뒤집는 등 한 가닥 할 수가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기에는 가진 바 경륜과 학문이 너무나 부족하다. 이를 어떻게 한다!... “;

그렇다고 하면 장래 유능한 인물이 그를 보좌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인물을 흥선군이 발견하고 중용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흥선군의 심복들의 면면을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허굉필은 끝까지 호위무사로 행세하고서 홍참의와 함께 그 집을 떠난다.

돌아오는 길에 홍참의가 질문한다; “오늘 아우는 흥선군을 처음 보았어. 그의 관상이 어떤 것으로 보이는가?”. 허굉필이 조용하게 대답한다; “형님, 그는 한 가닥 할 수 있는 상입니다. 그러나 조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역량과 경륜이 있는지는 시간을 두고 더 따져보아야 하겠군요. 그러니 내년 이맘때에 다시 제가 호위무사로 형님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 말을 듣자 홍참의가 크게 웃는다. 그리고 기분 좋게 대답한다; “굉필 아우, 무슨 말인지 내가 정확하게 알아 들었어. 그래 나보다 한살이 많은 흥선군의 경륜과 재주가 결코 나보다 뛰어난 것은 아닐 것이야. 새로운 조선을 만드는 일에 우선은 힘을 모으고 나중에는 누가 더 적합한지를 가려야 하겠지. 굉필 아우는 끝까지 내편이 되어 주시게나!... “.

홍참의가 의미심장하게 허장령의 손을 잡는다. 다음날 허굉필은 일찍 한양을 떠나 김포군으로 들어온다. 그는 3월부터 1858년 한해를 어떻게 보내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