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43(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9. 22. 13:35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43(손진길 소설)

 

11. 허굉필이 우연히 최제선을 만나다

 

허굉필185710월 하순에 동래의 초량에 있는 김준우 부부의 료칸에서 4일간 머물고 있다. 하루는 저녁시간에 일찍 식사를 끝내고 7살 아들 허지동의 손을 잡고 료칸의 마당에서 산책을 한다;

 그때 어느 방에서 어떤 선비가 낭랑하게 서책을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린시절부터 한학을 배워서 많은 서적을 독파한 허굉필이다. 그러므로 대강 남이 글 읽는 소리만 들어도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감을 잡는다. 하지만 그 선비가 읽고 있는 내용은 처음 듣는 것이다. 흥미가 발동한 허굉필이 그 방의 툇마루에 앉아서 아예 그 내용을 청취한다.

그 결과 그것은 천주학의 내용을 가지고 조선의 유학과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하도 신기한 내용이므로 허굉필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들 허지동에게 손가락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표시까지 한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소리를 그 방안의 선비가 들은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지 아니하고 은근히 말을 걸어온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더니 이 료칸에서는 선비의 책 읽는 소리를 사람이 듣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

여유 있게 농을 치는 소리를 듣고 보니 허굉필은 그 선비가 어떤 인물인지 갑자기 궁금증이 생긴다. 따라서 익살스럽게 대답을 한다; “허허허, 음성을 듣고 보니 저와 비슷한 30줄의 선비로 보이시는데 그 연세에 어찌 그렇게 동서양의 철학과 세계관에 달통하십니까?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보니 실로 그 내용이 심오하기 그지없습니다, 허허허… “.  

그 말을 듣자 방안의 선비가 조용하게 방문을 열면서 말한다; “10월말이라 밤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안으로 들어오셔서 저와 함께 차를 한잔 나누도록 하시지요, 허허허… “.

허굉필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아들 허지동을 데리고 그 방안으로 들어간다. 조선의 선비는 처음 만나게 되면 격식을 차리고 수인사가 제법 길다. 먼저 허굉필이 비교적 간단하게 자신을 상대방에게 소개하면서 가볍게 예를 차린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저는 김해 허씨이고 이름이 굉필입니다. 순조 23년에 (서기로는 1823년을 말함) 태어났지요. 그리고 고향이 김해입니다. 여기 료칸에는 매년 이맘때에 와서 며칠씩 묵고 갑니다. 저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관심이 있어서 아예 왜관에서 물건을 떼어 내지에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놈을 벌써부터 이 집에 맡겨서 왜국말과 문화를 익히도록 조치하고 있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듣자 그 선비가 자기소개를 한다; “저는 경주 ()씨이고 이름이 제선()입니다. 허선비님보다는 1년 늦게 태어났습니다. 고향은 경주 현곡입니다. 여기 료칸에는 작년부터 수차례 방문하여 왜관에서 물건을 사서 고향 쪽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

 그 말 중간에 허굉필이 말한다; “장사치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서책 읽는 소리를 들어보니 학문이 대단해 보이더군요… ”. 그 말에 최제선이 허허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허허허, 서책을 좋아하고 세상유람을 즐기다가 보니 그만 가장의 도리를 못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

허굉필이 경청하는 모습을 그 옆에서 7살 짜리 장남 허지동이 지켜본다. 최제선이 이어서 말한다; “처자식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서 늦게나마 생계에 도움을 주고자 장사를 시작했지요. 하지만 저는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우리 고유의 유불선 사상과 비교하여 탐구하기를 좋아하고 있어요. 방금 선비께서 문밖에서 들으신 내용이 그런 것들입니다, 허허허“.

허굉필최제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범상치 아니한 선비의 풍모이다. 장사치로는 결코 보이지 아니한다. 그가 경주 최씨라고 하기에 문득 허굉필은 관심이 있어서 한가지를 물어본다.

그의 질문이 다음과 같다; “경주 최씨이고 경주부 현곡이 고향이라고 말씀하시니 혹시 그곳에서 분파하여 경주부 부남(오늘날의 내남을 말함)으로 진출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 장군(1568년생, 1636 전사)의 집안과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

그 말을 듣자 최제선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허굉필의 얼굴을 한번 본 다음에 대답한다; “그분이 저의 7대조이십니다. 8대조이신 참봉 최신보(崔臣輔) 할아버지가 가족을 솔거하여 현곡에서 처가가 있는 부남으로 이주했지요. 그분의 4남이 바로 정무공 최진립 장군입니다. 그런데… “.

최제선허굉필을 한번 더 본 다음에 천천히 설명한다; “최진립 장군의 4남이 최동길(崔東吉)인데 그 분이 저의 6대조이시지요.  그 할아버지가 그만 현곡에 살고 있는 당숙에게 양자로 가게 되었지요.  어쨌든 저의 가문은 만석꾼인 교리 최부자의 형제 집안이기는 하지만 별로 살림이 넉넉하지가 않습니다, 허허허“;

그 말을 듣자 허굉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간략하게 말한다; “그렇군요. 교리 최부자는 본래 정무공의  3최동량(崔東亮, 1598. 12. 20 ~ 1664. 5. 6)과 그의 장남 최국선(崔國璿, 1631. 4. 3 ~ 1682. 7. 6)부남의 이조천을 개간하여 부를 쌓기 시작했지요. 나중에는 그들의 뒤를 이은 가주가 경주 교리로 이주하여 만석지기가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들의 본래 고향은 경주 현곡이 맞지요”.

최제선허굉필을 쳐다보고서 진중하게 말한다; “그런데 선비께서는 어떠한 분야에 더욱 흥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사상과 철학 등의 학문 분야입니까? 아니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이루고자 하는 경제와 산업 분야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양쪽에 모두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판단이 되는군요!... “.

허굉필이 볼 때에 최제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가 아니하다. 따라서 솔직하게 대답한다; “이곳 왜관에 출입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치고 일본을 통하여 들어오고 있는 서양의 선진문물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없지요. 따라서 저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좋은 물건을 싸게 만들어낼 수가 있는지에 관심이 큽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과 종교에 대해서는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최제선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시작한다; “저는 물건을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제조자들이 어떠한 사회에서 무엇을 생각하면서 그러한 생산을 하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와 사상을 알기를 원하고 있지요. 제가 접하고 있는 서적들이 주로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서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종교와는 참으로 다르다는 점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

최제선이 의도적으로 설명을 잠시 중지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한참 상대방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허굉필이 굉장히 열심히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말을 잇는다; “그들의 천주교리와 우리의 유불선 사상이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 점을 제가 글로 적어서 자주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제서야 허굉필은 그가 읽고 있다는 서책이 바로 그가 저술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는 관심이 생겨서 그 책을 한번 볼 수가 있는지를 묻는다. 최제선은 고개를 가볍게 끄떡이면서 자신의 책을 빌려준다. 허굉필이 감사를 표하면서 말한다; “그러면 제가 빌려가서 읽어보고 내일 아침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

최제선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인다. 허굉필은 아들을 데리고 그 방을 벗어난다. 그리고 아들을 일찍 재우고 나서 호롱불 심지를 돋우어 가면서 그 서적을 밤새 독파한다. 그 책의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다;

(1)  첫째, 서양의 천주교가 말하고 있는 천주(天主)와 우리 조선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늘님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천주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와 달리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에서는 옥황상제 하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문명세계를 만들고 백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 둘의 차이는 서양에서는 득도자(得道者)를 말하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의 권력을 수여 받은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둘째, 어느 것이 더 많은 백성들에게 유익한 사상체계인 것일까? 최제선의 생각으로는 왕의 통치권한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는 동양의 상제(上帝) 하늘님 사상보다는 백성들의 구제와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서양의 천주사상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조선의 백성들도 자신들의 값어치를 한낱 국왕의 다스림을 받는 노예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손(天孫)이며 깨달음을 얻으면 이 세상을 더 낫게 경영할 수가 있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셋째, 지금의 조선은 왕정국가이다. 하늘의 뜻을 임금이 백성들을 다스리면서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니다. 백성은 오로지 왕의 소유물에 불과하다. 천명(天命)은 사라지고 인간에 불과한 왕이 절대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하고 있다. 그와 같은 시대는 이제 마감이 되고 바야흐로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시대가 오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백성이 조선의 주인이 되는 시대이다.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라 그 시대는 백성들이 스스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바로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4)  넷째, 그와 같은 이치를 본래의 유불선이 공히 증거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경천(敬天)애민(愛民) 사상이 근본적인 통치철학이다. 따라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지 아니하는 군주는 통치이념에서 불합격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에게 불법(佛法)이 벌써 내주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만 그 불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먼저 불법을 깨달은 자들의 사명이다. 도교에서는 이 세상을 생성하고 움직이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사람이 신의 경지에 올라 신선(神仙)이 됨을 말하고 있다;

(5) 결론적으로, 유불선과 천주학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란 천지인(天地人)의 이치를 깨달아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백성을 영원히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오래된 통치체제에 대해서는 이제 종언을 고하여야 한다. 그 방법이 유불선과 천주학의 사상을 통일하여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인 통일을 먼저 실천할 때에 서양의 사상적인 침투를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며 그들의 선진문물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와 같은 천지개벽의 일을 실천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시행해야 하는가? 그것이 앞으로 남은 나 최제선의 공부이며 연구의 과제이다.

허굉필은 밤이 새도록 최제선이 빌려준 서책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린다; “보기에 따라서는 왕정을 타파하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자고 하는 극단적인 혁명사상이다. 그와 같은 사상이 하나의 종교적인 주장이 되고 조선에 만연하게 된다고 하면 그 다음을 장담할 수가 없다!…

허굉필의 염려가 계속된다; “과연 조선의 세도정치가 그것을 용인할 것인가?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도 말살하고자 하는 조선의 권력자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 이러한 사상으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가 있다. 요컨대, 최제선이라고 하는 선비가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 보급한다면 그것이 큰 변혁의 물길이 될 수가 있다… “.

아침해가 떠올라 방문의 한지를 달구고 있는 시간에 허굉필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최제선의 생각과 활동이 앞으로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나가게 될 것인가? 물질문명이 앞선 선진국들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왕정체제의 붕괴만을 초래하고 적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말 것인가? 아직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구나!... “.

과연 그날 허굉필최제선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누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