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4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9. 20. 10:49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42(손진길 소설)

 

18572월 중순에 허굉필이 한양에서 과거시험 동기들을 만나고 김포 관아로 돌아오자 열흘도 안되는 부재기간 중에 군수인 그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는 문서들이 꽤 쌓여 있다. 허첨정은 서류의 결재부터 먼저하고 있다.

그의 옆에서는 이방 정조민이 군수의 결재를 돕고 있다. 서류에 미처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 배경설명과 자신이 군수를 대리하여 대충 처리한 내용을 요령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군수는 정이방의 설명을 참조하면서 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빠르게 파악한다. 그리고 자신의 수결을 하고 있다.

머리가 영민한 허굉필이므로 매사 일처리가 빠르고 정확하다. 그러한 허군수의 천재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20살이나 연상인 이방 정조민이 마치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듯이 그렇게 흐뭇하게 미소를 띄고 있다.

그 모습을 슬쩍 보고서 허굉필이 겸연쩍어서 그런지 인사삼아 한마디를 한다; “이방어른께서 제가 부재중에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한양의 조정에서 온 별도의 파발은 없습니까?... “.

정이방이 웃음을 거두면서 즉시 대답한다; “이상하게도 이달에는 한 건도 없습니다. 아마 3월이 되면 홀수 달이므로 정기적인 파발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겠지요. 그것이 주로 이조(吏曹)병조(兵曹)에서 오는 것인데 때로는 호조(戶曹)예조(禮曹)에서 오는 것들도 있지요”. 허군수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인다.

이방 정조민의 예측이 정확하다. 3월에 들어서자 갑자기 한양의 조정에서 파발이 쇄도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병조의 참의인 홍재덕이 개인적으로 보낸 서찰이 들어 있다. 허첨정은 그 내용이 궁금하여 그것부터 집무실에서 조용히 혼자서 읽어본다.

크게 세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홍 참의가 미리 알려준 그 서찰내용이 허군수가 김포군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첫째로, 이조(吏曹)참의 장천웅이 갑자기 별세하였으므로 그 자리에 이조의 김철진 장령이 무려 2단계나 승진하여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적극 추천한 인물이 이조참판 정학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호판 출신 김형술 대감이 강력하게 밀었다고 한다. 김대감은 자신의 조카인 김철진을 이조 참의로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재물을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이판 출신 김용범 대감의 파벌이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지 못하도록 적극 공세를 편 결과이다.

그 대목에서 허첨정은 조선제일검의 실력을 가진 홍참의가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가 마음을 먹으니 이조 참의인 장천웅이 순식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타살의 흔적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죽고 만 것이다. 그 살인의 수법이 무엇인지 허굉필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 덕분에 역설적으로 이조에서는 인사의 숨통이 트여서 많은 관료들이 좋아하고 있다. 특히 허군수의 과거동기인 윤일윤 좌랑이 승진하여 종5판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분히 그의 뒷배가 되어주고 있는 이조참판 정학수의 뜻이 그대로 반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병조(兵曹)에서는 한강유역을 통하여 한양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목을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하여 김포 연안지역과 강화 섬의 수비를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강화 섬에는 종2품 참판 급 무신이 다스리는 유수부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강화 섬을 마주 보고 있는 김포군의 서편 연안지역에는 종3품 대호군 부장이 다스리고 있는 통진도호부(通津都護府)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도호부의 관할지역을 넓히고자 한다. 그에 따라 김포군의 영역이 축소가 된다. 그 점을 감안하여 병조에서는 이조와 협의하여 현임 김포군수 허첨정을 일계급 승진하여 차제에 정4장령으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상급자인 무관이 서부에 진을 치고 있으며 그 영역이 넓어지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김포군수의 불만을 사전에 해소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달 후에 허굉필이 첨정에서 장령으로 곧바로 승진하는 것을 보면 차제에 홍재덕 병조 참의가 개인적으로 애를 많이 쓴 것이 맞는 모양이다.

셋째로, 병조에서는 이번에 신임 통진도호부사로 금위영에서 근무하고 있는 대호군 부장 조항준을 발령한다는 것이다. 병조의 홍재덕 참의는 김포군수인 허굉필에게 요청하고 있다. 신임 도호부사 조항준이 현지에 부임하면 아무쪼록 그와 협의하여 관할구역 조정문제를 매끄럽게 정리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허군수는 모처럼 홍재덕 참의가 부탁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하기로 내심 결정하고 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통진 도호부사 조항준을 만나보니 그 옛날 종로의 기방살인사건의 수사과정에서 만나본 그때와는 풍기는 모습이 상당히 다르다. 9년전 1848년 그때에는 은밀한 흉계로 김용범 대감의 외아들 김학수를 단숨에 살인범으로 만든 모사꾼이 조항준이다. 그러나 지금은 풍양 조씨의 막후 실세인 조명우 영감의 자제 답게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병조의 홍재덕 참의로부터 김포군수인 허굉필과 잘 지내보라고 하는 언질을 받고 있기에 허군수와의 협의과정에서 매우 친절하다. 따라서 도호부사와 군수 사이에 18574월말에 매끄러운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고 평소에는 서로의 관할을 절대로 침범하지 아니한다는 일종의 쌍방간 평화우호관계의 확립이 성립된 것이다.

그해 5월에 들어서자 최다모가 다시 몸이 무거워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 4살이 된 차남 허지서를 돌보면서 주로 내아(內衙)에서 지내고 있다. 하루는 동헌에서 일과를 끝내고 허장령이 내아에 들어오자 최다모가 은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이 다음과 같다; “군수 나으리, 지서의 동생이 들어선 것 같아요. 날짜를 따져보니 금년 9월말이나 10월초에 출산을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알고 계세요”. 그 말을 듣자 허장령이 빙그레 미소를 띤다.

그가 마음이 흡족한지 다음과 같이 정답게 말한다; “선미, 참으로 좋은 소식이군요. 아들 둘에 이제 다시 자식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축하해요. 무사히 순산하기를 바래요. 몸조리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해요!”.

 그때부터 허군수는 일과를 마치고 내아에 들어올 때에는 특별히 이방 정조민에게 부탁하여 해산물을 가지고 온다. 맛있는 조기를 비롯하여 낙지와 조개류가 푸짐하다. 그리고 때로는 민물에서 잡은 잉어를 가지고 오기도 한다. 산모에게 좋은 해조류도 미리 사가지고 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송아지를 잡았는지 야들야들한 육류와 소뼈까지 가지고 온다. 몸보신을 하면서 최다모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그해 10월초에 만삭이 되어 해산을 했더니 아기가 얼마나 튼실한 지 모른다. 아들 둘 다음에 얻은 딸이다;

따라서 허굉필이 엄청 기뻐하면서 산모에게 말한다; “선미,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딸아이가 정말 튼실해요. 좋은 계절에 태어났으니 잘 자랄 거예요. 내가 좋은 이름을 지어줄 겁니다, 하하하“.

며칠 후에 허장령은 딸의 이름을 허정순(許貞純)이라고 짓는다. 정절이 곧고 순수한 여인이 되라고 하는 의미이다. 4살이 많은 오빠 허지서는 새로 태어난 여동생 정순을 좋아한다. 따라서 지서는 정순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싱글벙글하면서 내아를 뛰어다닌다.

그것을 보고서 허장령은 하루 휴가를 내어 아침 일찍 준마를 타고서 한양으로 달린다. 그는 한성부 옆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경기감영으로 들어가서 종2품 관찰사인 김종민(金宗敏) 영감을 만난다. 모처럼 김포군수가 예방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김관찰사가 열 일을 제쳐 두고 그를 만난다;

관찰사 영감에게 예를 올린 다음에 허군수가 품에서 서신 하나와 ()을 꺼낸다. 환에는 적지 아니한 금액이 적혀 있다. 김관찰사가 조용히 허군수가 건네 준 서신을 읽어본다. 허군수의 친필로 이번에 자신과 다모 최선미의 사이에 딸이 태어났으므로 부디 딸을 천민에서 양민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부탁이다.

그 정도의 부탁을 서신과 속전만 전하지 아니하고 직접 관찰사인 자신을 찾아와서 부탁 올리고 있는 허군수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 다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떡이면서 관찰사 김종민 영감이 다음과 같이 서두를 꺼낸다; “나는 관비와의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면 그것을 못 본 체하는 지방수령을 많이 보아왔어요. 그런데… “.

허굉필이 관찰사 영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에게 들려오는 말이 다음과 같다; “그대 허군수는 굉장히 다르군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적지 아니한 재물과 함께 직접 찾아와서 내게 서신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요. 그 정도로 신실한 지방수령의 청을 내가 물리칠 이유가 전혀 없지요. 아무 염려하지 마세요!”.

속전에 필요한 금액의 몇배나 되는 환을 받아서 그런지 김종민 관찰사의 일처리가 신속하면서도 깔끔하다. 호적을 담당하는 부하직원을 즉시 호출한다. 그에게 허군수가 자신에게 준 서신을 전달하면서 그 자리에서 지시한다; “최근 김포군수의 내아에서 출생한 여아 허정순의 신분을 충분한 속전을 받고 관비에서 양민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호적서류를 작성하여 내게 가지고 오라. 내가 이 자리에서 곧바로 관인을 찍고 수결을 할 것이다”.  

그렇게 속량의 문서를 받아오면서 허굉필은 마음이 뿌듯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한다; “최선미와 나는 아들 뿐만 아니라 딸까지 모두 잘 키울 것이다. 우리 조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재로 자라게 할 것이다. 우리 조선의 미래가 그들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

훗날 두사람의 딸인 허정순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다. 그녀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울 뿐만 아니라 신식학교에서 서양학문도 배운다. 20살의 허정순은 안동 권씨 집안의 권동률(權東律)과 혼인한다. 그들 부부가 구한말에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서양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데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85710월 중순이 되자 허장령은 이방 정조민에게 긴히 부탁한다. 이번에도 작년처럼 고향 김해를 일찍 방문하고 오겠다고 말한다. 정초에 가는 대신에 고향을 미리 다녀오는 것이므로 20일간의 휴가를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군수의 부재기간에는 정이방이 급한 업무를 대신 처리하도록 부탁하고 있다.

허굉필은 관아를 떠나기 전에 최다모에게 은전과 철전을 상당히 주면서 말한다; “내가 구례와 김해 그리고 동래를 다녀오는 동안에 이 돈을 필요한 곳에 사용하세요. 아무쪼록 몸조리를 잘하기 바래요”.

비록 신분의 차이가 엄청나지만 부부간의 금슬이 참으로 좋은 허굉필최선미이다. 그들은 실제로 부부일 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는 굉장히 가까운 동지이다. 허굉필이 원하고 있는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최선미도 똑같이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처럼 준마를 타고서 허굉필이 김포에서 곧장 남하하여 전라도 구례로 들어간다. 매일 새벽에 내공수련을 하고 있는 그이기에 33세의 나이이지만 그 진기의 힘이 대단하다. 하루 종일 달린 말이 피곤하여 주막에 들리고 있지만 허굉필 자신이 크게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굉필은 구례에서 거상 김상준(金相俊)에게서 쌀 500가마니에 해당하는 환을 받는다. 그것은 현지에서 개간한 일천 마지기의 소출에 대한 지주의 몫인 것이다. 그 다음에 허장령은 동쪽으로 달려서 고향 김해를 방문한다.

일년에 10월 중순이 되어야 한번씩 아들 허굉필의 얼굴을 보는 부모이다. 따라서 그를 만나자 작년과 똑같은 말을 한다; “굉필이, 너는 어째 혼인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냐? 네 형은 벌써 자식이 주렁주렁한데 너는 혼자서 지방수령으로 떠돌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 없다. 아직도 딸을 주겠다고 하는 집안이 여럿 있다. 부디 마음을 정하여 다음번에는 꼭 알려 다오!... ”.

고향의 선산까지 다녀온 허굉필은 곧장 동래의 초량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왜국 말 통역인 김준우 부부가 경영하고 있는 료칸에서 장남 허지동을 만나고 그들 부부에게 충분한 사례를 하고자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허선비는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귀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가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