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09강(마28:20a)(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26. 09:24

마태복음 강해 제209(28:20a)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66()

 

사도의 역할과 책임; (1) 사도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며 제자의 삶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내용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2) 그리고 사도의 책임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간구하는 것이다(28:20a). (3) 의사 누가는 그와 같은 11사도의 역할과 책임을 속 사도들이 이어받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13:43)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을 본받아 모두가 사도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고전11:1).

 

첫째로, 사도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며 제자의 삶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내용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28:20a). 한 마디로, 사도의 역할은 그 옛날 36개월 동안 12명의 남자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이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대로 온 세상에 가는 곳마다 행하는 것입니다(1:8, 3:1-4:4).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르쳐주신 복음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예수님의 생애로 그것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일, 곧 말씀사역에 전념을 했습니다(6:4b). 그래서 구제와 봉사 등 기타의 일들은 집사를 선출하여 그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6:2-3). 또한 사도들은 혹시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잘못 전하여 성도들을 실족시킬까 두려워하여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지도 모릅니다(18:6-10, 6:4a).

단순하게 말로써만 전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23:3). 사도들은 자신들의 삶이 스승이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도록 성화에 진력했습니다(17:17-19). 그렇게 말과 행동이 나아가서 삶의 모습이 일체가 되어야 성도들이 안심하고 믿고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자 하나까지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구원의 복음, 곧 예수님의 교훈과 그 생애의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먼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성도들의 신앙자세는 분명히 전통적으로 율법준수만을 강조하고 있는 유대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예수님의 복음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구체적으로, 복음적인 삶을 생활화하고 있는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지켜 행하는 성도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사도의 책임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28:20a). 성도들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본 받아 금방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믿음의 성숙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믿음이 성장을 할 것입니다. 사도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도들에게 다시 복음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기도를 해주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마침내 예수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생활화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도들의 눈물의 기도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줄기차게 따라가고 있습니다(16:2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11제자가 자신이 승천하고 나면 자기 뒤를 이어서 그와 같은 생애를 살아갈 것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21:18-19). 그리고 그 일은 사람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1:8). 그래서 제자들에게 부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분부하고 있습니다(24:48-53).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셔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고 도움을 주실 때에 비로서 사도들의 눈물의 중보기도와 성도들의 새로운 인생은 모두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4:16-17, 16:13-14).

셋째로, 의사 누가는 그와 같은 11사도의 역할과 책임을 속 사도들이 이어받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13:43)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을 본받아 모두가 사도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고전11:1). 먼저 사도라는 용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사도는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한편 또 일각에서는 20세기 성령운동을 통하여 속() 사도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각각 사도라는 용어를 한번씩만 언급하고 있습니다(10:2, 6:30).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9번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언급이 없습니다. 4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의 다른 정경 23권을 모두 살펴보면, 사도라는 용어가 언급이 되고 있는 구절이 사도행전에서 48구절, 바울서신에서 34구절, 요한서신과 계시록에서 4구절, 그리고 유다서와 히브리서에서 각각 1구절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사도행전에서 의사 누가는 갈릴리의 산에서 사도로 임명을 받은 11명의 제자 외에 맛디아가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의 직(, position)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6). 그리고 제1차 세계선교에 나선 바나바와 바울이 후속사도로 불리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3:43). (2) ‘사도라는 용어를 애용하고 있는 정경의 저자는 단연코 의사 누가와 사도 바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의사 누가와 사도 바울이 어째서 사도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복음의 해외선교를 위하여 평생을 바친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도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 이유는 선교의 목적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방 땅에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바른 복음에 대한 성도들의 갈급함은 여전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해줄 수 있는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사도들만큼 정확하게 복음을 해석하여 설명해주고 가르쳐줄 수 있는 사도성(使徒性)을 지닌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사도들이 수명을 다하고 사라진 다음에는 후자에 대한 수요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약의 정경 27권을 결정할 때에도 사도의 저작이냐 아니면 사도의 저작에 견줄 수 있는 사도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의 글이냐 혹은 그와 필적할 수 있는 사도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그와 같은 문제가 장래에 발생할 것임을 예수님께서 벌써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0-21).

과연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만 사도들과 사도성을 지닌 인물들이 배출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11명의 사도들, 그리고 가룟 유다 대신에 선출된 맛디아, 나아가서 후속사도로 사도행전에 기록이 되고 있는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자신의 서신서를 성경에 남기고 있는 소수의 장로들만 사도이거나 사도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위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참조한다면 결론이 달라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이거나 제자이거나 성도이거나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 삶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에 의하여 온 세상에 복음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만약 바울의 모습 가운데서 예수님의 모습이 발견이 된다면 그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3:9). 예수님의 모습과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받지 아니하고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3:8).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2천년 전에 승천하신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는 메시아로 인정을 하지 아니했던 사람입니다(8:1-3). 그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나서 이 세상에 특별히 바울 자신 앞에 잠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시는 그 모습을 보고서 영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입니다(9:1-7).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평생 연구하고 복음을 깨달아서 세상에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후세대를 향하여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처럼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보지를 못하고 영적으로 보면서 믿고 있는 후세의 사람들은 나를 본받기를 바랍니다.  내가 말씀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그 생애를 본받아 살아갔더니 이렇게 사도적인 인생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저와 같은 사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