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05강(마28:18a)(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23. 15:40

마태복음 강해 제205(28:18a)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62()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으로 (새로운 세상을 제자들을 통하여) 창조하시고자 하다(28:18a).

 

흔히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그 전달의 과정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므로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神秘, mystery)가 사람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할까요? 한 가지 실례(實例, a practical example)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의 구조가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나아말씀하여 이르시되”(28:18a). 비록 간단한 단락이지만 구체적으로 다른 의미를 각각 지니고 있는 네 가지의 조각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각각 그 의미의 대강을 쪼개어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 정체가 제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스승님 곧 예수님이십니다. (2) 제자들 앞에 나아와서 인격적인 만남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3) 그 입에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 제자들에게 도달함으로써 역사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각각의 의미를 상세하게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 정체가 제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스승님 곧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마태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28:17). 그것은 정확한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참조하면 사도 도마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20:25). 그러나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주후 60년대에 있어서는 의심이 사라지고 분명합니다; “그때 갈릴리의 산으로 제자들을 다시 찾아와서 말씀하시던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8:18a).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죽어서 무덤 속에 안치가 된 시신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사실은 믿기가 힘듭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를 무덤에서 되살려내시는 장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부활을 인정하고 있습니다(11:38-44).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이 전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  예를 들면, 예수님이 갑자기 부활의 몸을 입고 나타나서 벽과 창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그냥 통과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20:19). 그러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20:20). 그것은 일종의 신분증과 같습니다. 손목에는 못 자국이(27:35) 그리고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19:34)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동일인물이라는 그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그 흔적을 보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20:25).

(3)  도마의 경우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20:14-17).

(4)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못 자국과 창 자국으로 증명하는 소위 스티그마(stigma)’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그리고 큰 변화에 의하여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유일하게 달라지지 아니하고 그 정체성을 유지해주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함께 36개월 동안 공생애를 보낸 사실입니다. 그 기억과 추억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으로 제자들이 확인을 하고서 기뻐한 것입니다(20:19-21).

(5)  구체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정체성과 신분을 확인해주고 기억을 보전해줄 수 있는 방법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0:22),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6:13-14).

(6)  모든 진리는 쉽게 이해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뿐만 아니라 사람의 개인적인 정체성과 신분까지 당사자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개인적인 정체성의 확립에서부터 하나님과 모든 타인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이 되어나간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소년 예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12세의 소년 예수는 드디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성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이심을 발견한 것입니다(2:49). 목수 요셉은 의붓 아버지에 불과합니다. 거기서부터 예수님의 정체성과 신분 그리고 복음에 대한 깨달음과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이 출발하고 있습니다.

(7)  생전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다음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일성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여 보전해주고 또한 제자들에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의식을 이어주고 있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도 그 기억도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제자들 앞에 나아와서 인격적인 만남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뜻을 풀어서 말하자면,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서 다시 부활의 몸을 입고서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1:14) 제자들 앞에 버젓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1)  그 대목에 대한 설명의 원형은 벌써 창세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After that the word of God came to Abram and said in a vision)”(15:1). 이미 눈치를 채셨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그 옛날부터 모세에 의하여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부터 독자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자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브람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존재입니다(15:1). 선지자 이사야도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38:4).

(2)  그 사실을 훗날에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그의 독특한 로고스 기독론(Logos Christology)으로 풀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

(3)  풀이를 해보자면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본체에서 이탈하여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며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위 독생자’(1:14-15)입니다. 그리고 독생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서 삼위일체(28:19, 4:6, 고후13:13)이신 창조주 사이에 합의한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생명을 창조하고 그 생명에게 생명의 기운을 영적인 빛으로 계속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 입에서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씀이 영원성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독생자의 영광을 회복하셨기에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이론’(the theory of trinity, three in one) 곧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지만 삼위의 위격을 지니고 계신다고 하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차제에 삼위일체이론에 대하여 조금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삼위일체의 하나님 모습은 벌써 창세기에서 복수의 개념으로 때로는 단수로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하나님의 존재론적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렇다면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 자체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천지와 만물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이미 합의한 그대로 창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창조주로부터 피조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또한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1:3, 11).

(3)  선지자 이사야의 증언 그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냥 허사가 되고 무위(無爲, nothing)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40:5),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8).

(4)  결론삼아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생명력과 전능성(全能性, almightiness) 그리고 영원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8:3),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넷째로, 제자들에게 도달함으로써 역사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입에서 말씀이 나타나고 그것이 제자들에게 도달함으로써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그 변화는 당장에는 심령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생각하는 방법과 가치관의 기준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속 사람의 변화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당장은 인식의 변화와 사고방식의 변화 그리고 말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2)  그 다음에는 속 사람의 변화가 겉 사람의 변화를 초래합니다.  ,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 변화는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의 상식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제자들의 삶이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  목숨을 걸어놓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는 사도들의 기이한 변화를 적고 있는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적이라고는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렇게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시작하고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의 산에서 11명의 제자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성부터 확인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스승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어떻게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방법이 바로 자신들의 추억이 함께 남아 있는 그 산에서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변화가 발생했으며 예수님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어 있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아니하고 있는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기억과 의식이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여 그것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몸이 아니라 영적인 부활의 몸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승 예수라는 그 동일성과 정체성이 인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님은 제자들과 성도들도 그와 같은 동일성과 정체성을 영원한 생명으로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20: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