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24(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8. 19. 01:49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24(손진길 소설)

 

수원 유수부에 허굉필최선미가 도착한 때가 저녁 늦은 시간이다. 최다모의 부친인 최대환과 저녁식사를 일찍 하고 수원관청으로 말을 타고 왔지만 그만 늦은 시간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떻게 하면 최선미의 모친인 하수련을 은밀하게 만날 수가 있을까?...

역시 기지를 발휘하는데 있어서는 최다모가 허좌랑보다는 한 수 위이다. 특히 관비들의 생활에 있어서는 체험적으로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미가 문지기에게 다가가서 슬쩍 엽전을 쥐어 주고서 부탁한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절절하다; “저의 모친이 여기서 침모로 일하고 있는 관비 하수련입니다. 제가 오래간만에 한성부에서 볼 일이 있어 수원에 온 김에 한번 만나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주막에 모시고 가서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고 싶습니다. 편의를 좀 보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그 말이 통하고 있다. 최다모가 문지기에게 찔러준 돈이 적지 아니한 모양이다. 3사람의 문지기 가운데 상관인 듯한 인물이 한사람의 수하에게 지시한다; “자네가 안에 들어가서 하수련 침모를 모시고 나오게. 오늘 따님이 이곳에 왔으니 바깥 주막에라도 가서 저녁식사도 함께하고 정다운 이야기도 나누시도록 하라고 말하면 될 것이야. 잠시 다녀오도록 하게!”.

한식경도 지나지 아니하여 하수련이 문지기를 따라 관아문으로 나온다. 그녀를 보자 얼른 최다모가 뛰어가서 팔짱을 끼고 말한다; “어머니, 오늘은 저하고 같이 주막에 가서 따뜻한 국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제가 돈이 있어요!”. 오래간만에 딸을 만나자 하수련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렇게 모녀가 만나는 모습을 보더니 나이가 좀 든 중년의 문지기가 웃으면서 하수련에게 말한다; “침모, 오늘은 따님과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세요.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내가 알아서 잘 조치해 두겠습니다, 하하하… “.

역시 관노비의 신세를 알고서 나름대로 동정하고 있는 자들이 지방관청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하급 문지기들인가 보다. 그들은 서로 그렇게 상부상조하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날 허좌랑이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다.

하수련은 오래간만에 딸 최다모와 같이 걷고 있으니 그것이 좋다. 그런데 말 2필을 끌고서 잘 생긴 선비 한사람이 끝까지 동행하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그러나 함부로 딸에게 묻지 아니하고 주막까지 줄곧 걸어가고 있다;

주막에 도착하자 허좌랑이 주모에게 방을 둘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국밥 2그릇을 방안으로 가져다 달라고 말하고서 방값과 국밥 값을 그 자리에서 미리 지불한다. 그 다음에는 돈을 더 주고서 마구간에 말 2필을 매어 놓고 말먹이를 충분히 달라고 요청한다.

따뜻하게 군불을 지펴 놓은 방이 두개나 그들에게 제공된다. 그 가운데 좀더 넓어 보이는 방을 허굉필하수련 모녀에게 배정한다. 그리고 그도 그 방에 들어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가장 먼저 그가 그 방에서 하고 있는 일은 최선미와 함께 하수련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다.

딸과 잘 생긴 젊은 선비의 큰 절을 받으면서 하수련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그녀가 허굉필을 향하여 반절을 하면서 말한다; “젊은 선비가 갑자기 나같은 관비에게 큰 절을 하는 것을 보니 이상하군요. 선미야,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

그 말을 듣자 최선미가 생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어머니도, . 24살이나 된 과년한 딸이 이제서야 25살 서방을 모시고 와서 처음으로 큰 절을 올리고 있는데 그것이 무어가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이 선비는 이제 어머니의 사위가 되는 허서방이지요, 호호호… “.  

그 말이 끝나자 마자 허좌랑이 하수련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어머님, 제 이름은 허굉필입니다. 김해 허가입니다. 고향도 김해이고요.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공무가 바빠서 그만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랜 세월 지방 관아에서 노비로 살아온 하수련은 어리둥절하다. 그래서 급히 물어본다; “내 눈에는 공직을 맡고 있는 양반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관노비인 내 딸 선미하고 허물없이 내외처럼 여행을 하고 있습니까?... “.

그 말을 듣자 허좌랑이 조용히 설명한다; “정식 혼례가 어렵다고 하면 저는 댁의 따님과 은밀하게 부부의 연을 맺고서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저는 한성부를 떠나 이제는 지방수령을 맡아 최다모와 함께 그곳 임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생 따님만 아내로 데리고 살 생각입니다”.

하수련이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그것이 어디 조선천지에서 가능하겠습니까? 그저 지방수령이 현지에서 데리고 사는 관비라면 몰라도 정식 아내는 결코 될 수가 없지요. 내 딸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은 고맙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말씀이지요!... “.

그 말에 최선미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한숨을 쉬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허좌랑이 자신의 계획의 일단을 말한다; “당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정식부부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제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 오래 사시면서 그날을 한번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하수련은 그날 밤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천지가 개벽할 것만 같은 이야기를 허굉필이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조선천지에서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때 다음과 같은 허굉필의 질문이 들려온다; “장모님, 이 사위에게 이제는 친정 집안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십시오. 어째서 장모님은 처녀시절에 관노비가 되신 것입니까?... “.

그 말을 듣자 하수련은 만감이 교차한다. 따라서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천천히 말해 주고 싶군요. 그러니 우선 요기부터 하도록 합시다”. 그 말이 맞다. 금방 그 방으로 국밥 2그릇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 그릇은 하수련에게 주고 나머지 한 그릇은 최선미허굉필과 나누어서 먹는다. 그 이유는 두사람이 벌써 최대환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일찍 당겨서 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 사정을 듣고서 하수련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저녁상을 바깥의 평상으로 물리고서 그때부터 천천히 하수련이 친정의 몰락과정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미처 딸 최선미에게도 자세하게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서 허굉필은 자신의 머리속에 다음과 같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오래 기억하고 있다;  

첫째, 하수련의 부친 하용만(河勇萬)은 강화도에서 누대를 살아오고 있는 양반가문의 자손이다. 그는 일찍 무과에 합격하여 충청도 마량진(오늘날의 서천 지역)에서 오래 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순조 16년인 18169월 초순에 갑자기 이양선이 출몰하자 상관인 조대복(趙大) 첨사를 모시고 그 배에 올라 내부를 구경했다;

 서양인들이 호의적으로 내부를 보여주었는데 그곳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있는 것과 해도를 작성하고 있는 그들의 기술을 보고서 판관 하용만은 깜짝 놀랐다. 굉장히 앞선 문명이었던 것이다.

둘째, 그때부터 판관 하용만은 서양의 앞선 문명을 알기 위하여 천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고향 강화도를 방문할 때에는 가까운 벗들에게 은밀하게 서양의 학문과 산업기술이 뛰어나다는 것과 서양인들이 천주학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에는 강화도에 귀양 와서 살고 있는 왕족 이성득(李成得, 1775 - 1817)도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문제가 되고 만 것이다.

셋째, 왕족 이성득의 부친이 은언군인데 그가 바로 정조 임금의 바로 아래 이복 동생이다. 정조 임금이 승하하자 영조의 후비였던 정순왕후가 얼른 10살짜리 어린 세자를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그녀는 조선의 미풍양속을 파괴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천주학에 물든 무리들을 배척하면서 어린 임금의 숙부인 은언군 집안을 제거한 것이다;

 마침 강화도에 유배를 보내 놓은 40세 초반의 왕족 이성득이 눈에 가시였는데 차제에 판관 하용만에게 포섭된 천주교도로 그를 몰아서 아예 없애고자 한다. 이성득이 이듬해에 고문 끝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에게 포교하였다는 죄목으로 판관 하용만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그에 따라 1817년에 그만 하용만의 어린 딸 하수련10살의 나이에 관비가 되고 만 것이다.

넷째, 하수련이 용인현에서 관비로 살고 있을 때에 현령 최대환을 만났다. 16세의 처녀 하수련을 좋아한 최대환이 그녀와 현지에서 살게 되면서 이듬해 1824년에 딸 최선미를 낳은 것이다;

 몇 년 후 최대환이 승진하여 정랑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는 하수련을 연모하여 그녀를 용인현에서 수원 유수부의 관비로 옮겼다. 그리고 딸 최선미를 자신이 키우면서 한성부의 관비로 넣어주었다. 물론 사전에 스승을 붙여서 학문과 무예를 익히도록 배려하여 그녀를 한성부의 다모(茶母)로 만든 것이다.

이제 허굉필하수련최선미 모녀를 관비에서 빼내어 양민으로 만들어 주고자 한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그 방도를 반드시 찾아서 그렇게 조치하고자 한다. 과연 그러한 놀라운 신분변화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하수련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허굉필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과연 그가 모색하고 있는 정치적인 방법이 무엇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