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65강(마24:32-3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2. 09:58

마태복음 강해 제165(24:32-3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14()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저주사건에서 배워야만 하는 깊은 뜻(24:32-39, 21:7-19)

 

사도 마태는 무화과나무를 두고 예수님이 한 가지 저주와 한 가지 비유를 하셨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21:19),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24:32-34).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사건은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셔서 그 유명한 성전청결사건을 재현(再現, recreate)하신 다음에 발생하고 있습니다(21:7-11). 사도 요한의 기록을 참조하면 예수님의 첫 번째 성전청결사건은 공생애 첫해에 이미 발생하고 있습니다(2:13-22). 그리고 사도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성전청결사건은 공생애 마지막 해 유월절 직전이므로 3년 후가 됩니다(21:12-17). 그렇다면 예수님은 똑 같은 사건을 왜 공생애 시작과 끝 무렵에 두 번이나 일으키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처음도 끝도 모두 성전청결사건의 의미와 상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그렇게나 질책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보고 계시는 마음속 중심을 도무지 청결하게 만들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삼상16:7, 23:25-28). 그렇다면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마음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예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1)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만 합니다(17:20-21).  그런데 사람들 눈에 마음속의 더러움과 악함이 보이지 아니한다고 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7:20-21).

(2)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밭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야만 합니다(13:23). 그런데 세상적인 이익과 안전에 지나치게 집착하여(13:18-22) 그 마음 밭이 옥토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씨를 복음으로 뿌려도 도무지 발아를 하지도 않고 자라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3) 장차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회개하는 그 심령 속에 성령의 전이 세워질 것입니다(고전6:19).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회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외식하고 있는 신앙인들도 자신의 잘못된 신앙생활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회개가 필요합니다.

(4)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오늘도 두드리고 계십니다(24:33, 3:20).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지금이라도 열게 되면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생활화하는 영적인 공생애가 시작이 됩니다. 그와 같이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 곧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성도들에게 천국입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21:27).

(5) 그런데 율법선생이며 학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자신들의 마음 속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18:11-14).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고 계시는 인생의 열매를 전혀 맺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15:1-6).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외식하는 신앙인들을 대신하여 상징적으로 저주를 받아서 말라 죽게 되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1:19).

지금까지 살펴본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본문의 무화과나무 비유에 대하여 함께 묵상을 해보게 되면 그 깊은 뜻이 다음과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24:32)라고 말문을 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권면하십니다;

(1)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지만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특이한 나무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꽃이 없지만 주님이 영적으로 찾으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익한 나무입니다(21:18-19). 그러므로 외식하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의 야단을 무지하게 맞고 있는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과는 정반대입니다(23:25-28).

(2)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진다는 것은 봄을 맞이하여 새로운 가지가 생겨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한 가지에서 싹이 나고 잎사귀가 많이 생기게 되면 무성한 여름을 맞이하게 됩니다. 새로운 가지가 새로운 잎을 만들고 그 잎들이 탄소동화작용’(炭素同化作用, 잎 파랑이에서 탄수화물을 만들어내는 화학작용, carbon dioxide assimilation)을 열심히 하게 되면 나무에게 필요한 양분이 만들어집니다. 양분은 두 가지 작용을 합니다; 첫째, 그 양분을 태워서 나무가 성장을 합니다. 둘째, 그 양분을 저장하여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3)  겨우내 죽은 것과 같던 무화과나무가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여 새로운 가지가 생겨나고 잎을 만들어서 자신의 성장은 물론 열매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를 예로 들어서 예수님이 자신의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4)  무엇을 그 비유에서 배우라고 하는 것일까요? 첫째, 나무가 봄을 맞이하여 새로운 가지를 내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나무의 잎이 탄소동화작용을 하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생애를 결합하여서 양분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처럼 실천을 한다면 그렇게 생성된 양분은 자신을 성화시키는 한편 이웃을 구원할 수 있는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24:33)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1) 종말에 이루어지는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다고 대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은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24:34)는 바로 다음 구절 때문에 설명력이 부족합니다. (2) 그래서 유력하게 떠오르게 되는 해석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부디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성화와 전도의 열매를 맺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그 이하의 구절들이 다음과 같이 한결 풀이하기가 쉬워집니다;

(1)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자신의 인생 가운데 주님의 복음을 듣고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한번씩은 제공해준다는 예수님의 철석 같은 약속이 다음과 같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4:35).

(2)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 가운데 언제 예수님께서 그 마음 속에 찾아오시는 것일까요? 그 시간과 때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예수님이 모르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아버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3)  구체적으로 사도 요한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6:37-3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한 마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이끌어다 자기에게 보내어주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과 생명을 살리는 일만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과 때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1) 무관심하게 됩니다. 어차피 모르는 것이기에 별도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제 임할지도 모르는 종말과 심판에 대하여 평소에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귀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쇄매체와 영상매체가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이 자신의 주위에 가득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한번만 주의를 기울이고 유인물이나 영상물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인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풍성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찮게 생각하고서 그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기회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그와 같은 사람들의 무관심 그리고 영적인 무지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비록 과학적인 지식이 많이 성장을 하고 물질문명이 눈부시게 발전을 했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인류가 여전히 유치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지적 그대로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이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7-39).

결론적으로, 본문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류의 종말과 그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풀이가 되는 한편 개인적인 인생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무화과나무같이 새로운 풍성한 삶과 열매 맺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특별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24:34)라는 언급이 있기에 각자의 인생에게 주어지고 있는 말씀으로 그 비유의 깊은 뜻을 헤아려봅니다. 그렇지만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의 예를 들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종말심판에 대한 내용으로도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종말을 잘 준비하고 동시에 바람직한 인류역사의 종말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전도하는 귀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