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61강(마23:38-24: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30. 00:32

마태복음 강해 제161(23:38-24: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9()

 

마태복음 제23장 제38절 및 제39절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예레미야 제25장 제29절과의 관계에 대하여(23:38-24:3)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에서 서기관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벌인 대 논쟁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때로부터 3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사도 마태가 그때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제22장 제34절에서부터 제23장 끝까지 그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끝내시고 성전을 나서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또한 인상적이기에 제241-2절에 추가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자들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는 내용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예루살렘성과 성전의 멸망은 언제 임하는 것입니까?(24:3b) (2)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는 이 세상에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24:3ce) (3) 세상의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24:3de)그와 같은 질문은 격론을 벌인 그날 숙소가 있는 베다니로 가는 도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감람 산을 통과하시면서 숨을 고르기 위하여 산 위에서 잠시 쉬고 계시는데 제자들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여쭈어보고 있는 것입니다(24:3a).

그런데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은 이해가 가능합니다. 앞부분에 기술한 내용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질문은 엉뚱합니다. 사도 마태의 기록을 쭉 읽어오고 있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 대목에 뛰어들어오고 있는 질문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마태가 왜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주후 21세기에 살고 있는 제 자신은 이해하기 힘들어서 당혹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연히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그 가운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마태가 구태여 부연설명을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다윗 왕조 말기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 한 토막을 함께 묵상해보면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그의 예언은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인을 칠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29).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모든 이방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신호탄이 된다고 하는 내용이며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예언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은 물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 성전마저 완전붕괴가 되고 만다고 예언을 하고 계시니(24:1-2) 제자들은 세상의 멸망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멸망이 바로 세상 끝 날이 시작되고 있는 징조가 아닌지 예수님으로부터 확인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상당히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24:3).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제자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미워하여 세상을 멸망시키는 끝 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에게 끝까지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말세가 오래 계속이 될 것이라는 답변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상세한 설명은 다음 번 강해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이제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이 나타나고 있는 배경과 그 속에 담겨있는 교훈을 본문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24:3b)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이 황폐해지고(23:38)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성전이 붕괴가 되는 때가(24:1-2) 언제가 될 것인지를 묻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구절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스승이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진심으로 여쭈어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그것은 예수님이 세 번이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언을 한 바가 있는데(16:21, 17:22-23, 20:18-19) 제자들이 그것이 언제인가를 정확하게 묻고 있지를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와 같은 사건이 발생을 한다고 두 차례나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16:21, 20:18). 그런데 이미 예루살렘에 들어 왔으며 유월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21:10-11, 11:18, 14:1-2). 이제는 정확하게 그때가 언제인지를 확실하게 물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3)  그 대신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붕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엄청 큽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모두가 유대인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무너진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과 가족들에게 위험이 닥친다고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난리통에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스승 예수님이 언제 살해를 당하느냐는 것보다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하느냐가 더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제 살기에 바빠서 끝까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되지를 못합니다. 그 사실을 실토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까지 성도들에게 가슴이 먹먹하도록 안타깝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13:7) 하였음이니라”(14:27),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시더라”(8:20).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고 있는 모든 제자들의 세상살이에 있어서는 그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고 있는 두 번째의 질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24:3ce)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3일만에 부활하여(20:19) 제자들을 다시 만나는 때를 염두에 두고서 그들이 그때의 징조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제23장 마지막 말씀, 곧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3:38-39). 요컨대,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유대인들이 회심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6)  사도 마태는 이 글을 주후 60년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30여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고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여 40일 후에 베다니에서 승천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28:1, 6, 17, 24:50-51, 1:3).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은 망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인이 된 사도 마태는 언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무너진 성전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을 짓는 심정으로 마태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과 같은 그 말씀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28:18-20).

(7)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나면 과연 모든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회개를 하는 역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시고 나서 열흘 후에 성령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을 하셨습니다(2:1-4). 그때까지 만사를 젖혀놓고 끝까지 기도하고 있던 약 120명의 성도들에게(1:15)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이 시작이 되었습니다(2:3-40). 그때부터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고 유대인들의 회심이 시작이 되었습니다(2:41-47). 하지만 30년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 유대인들의 시선이 차갑고 예루살렘의 멸망도 도래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8)  사도 마태는 동족인 유대인들이 모두 회개를 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의 골육이며 친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심정은 후속사도인 바울의 글이 웅변적으로 대변을 해주고 있습니다(9:1-5, 10:1, 11:13-15). 동족들의 구원을 희구하는 마음으로 유대인 제자들은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성전은 짓는 심정으로 마태 역시 스승이신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과 같은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28:18-20).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에도 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9)  그런데 이방 땅에서의 전도와 선교 그리고 양육의 삶은 고되고도 힘든 일입니다. 목숨을 걸어야만 실천이 가능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주님께서 다시 오실지 그 날이 기다려집니다. 사도 마태가 한창 활동하고 있던 당시 주후 50년대와 60년 대에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핍박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징조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태는 그 옛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그 내용을 다시금 기억하고서 여기에 생생하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기 위하여 사도 마태의 글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 후에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그 끝부분에 적고 있는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우호적이지 아니한 현실에서 외롭게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오직 한길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주후 1948 5월에는 팔레스타인 땅에 현대이스라엘 국가가 탄생을 했지만 아직도 유대인들의 완전한 회심은 이루어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도 이루어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마태를 비롯한 제자들이 2천년 전에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내용이 오늘 날에도 똑 같은 질문으로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