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8강(마23:2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8. 06:21

마태복음 강해 제158(23: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6()

 

유대교 역사에 있어서 누가 가해자이며 누가 피해자인가?(23:29)

 

본문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역사적인 가해자이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피해자임을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23:29). 도대체 그들이 어떠한 신앙생활의 모습으로 살아갔기에 피해자와 가해자로 확연하게 구분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사용이 되고 있는 기본용어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아울러 예수님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가해자인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1)  바리새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스승과 제자로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에 참여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구분을 하게 되면 대 공회의 구성원이 되고 있는 서기관들과 구성원이 되고 있지 못한 일반 바리새인들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일반 바리새인들은 또 랍비와 생도로 구분이 됩니다.

(2)  서기관들은 백성들에게 히브리정경을 가르치는 율법선생인 랍비들 가운데 크게 명성을 얻어서 율법학자로 불리게 된 사람들로서 산헤드린 대 공회의 회원이라는 명예를 얻은 자들입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대 공회 내에서 율법사 또는 교법사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22:35, 12:28, 5:34). 유대교리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대두하게 되면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그들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유권해석의 권한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유대교의 큰 스승인 가말리엘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존재입니다(5:34).

(3)  큰 스승 아래에는 많은 제자들이 배우고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왕국시대와 비슷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름난 선지자들이 많은 생도들을 선지동산에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시키고 성령의 감동을 받도록 하여 후계 선지자로 양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사무엘이 고향 나욧에서 선지자학교를 열었습니다(삼상19:18-20). 엘리야가 엘리사와 여러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왕상19:16-21, 왕하2:3). 그리고 엘리사 역시 많은 생도들을 거느리며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왕하6:1).

(4)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율법선생으로서의 자격을 인정 받은 자들이 소위  랍비들입니다. 한 사람의 랍비로 홀로 서게 되는 나이가 대략 40세 정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니 그들이 오랜 세월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공부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랍비가 되면 그때부터 백성들에게 히브리정경을 독자적으로 가르치게 됩니다. 그들은 국내외에 산재하고 있는 수많은 회당에서 매주 토요일 안식일에 설교를 하게 되며 또한 회중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하여 히브리정경의 내용을 더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4:16-28, 6:9). 그러므로 훌륭한 국내외 랍비의 문하에도 배움을 얻고자 하는 생도들이 많이 있게 됩니다.

(5)  그러면 랍비들은 더 최신의 내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절기가 끝난 후에도 한두 달 정도 더 머물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큰 스승인 서기관들에게서 다시 배움을 얻습니다. 그들이 소위 천하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입니다(2:5).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을 모아 복음을 다시 가르친 경우와 유사합니다(1:3).

(6)  생도들은 서기관들이나 랍비들의 문하에 제자로 입문을 하여 랍비가 될 때까지 수업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 랍비들 그리고 생도들 모두가 바리새인들이며 바리새파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전통은 한 마디로 성령의 감동이 없더라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학문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7)  바리새파 사람들은 스승에서 제자로 대를 이어 백 년 이상 공을 들여서 히브리정경에 대한 주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주석에는 전통적인 히브리 사상과 전승 그리고 고대언어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주석의 도움을 받아서 율법을 공부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의 뜻을 얼마든지 배우고 깨달을 수가 있다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인본주의(人本主義,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관념) 사상이며 자력구원(自力救援, self-salvation)적인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8)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이성(理性, reason)과 판단력 그리고 학문적인 노력에 의하여 대대로 다듬어지고 체계화되어 나가는 사람의 지식과 지혜가 꾸준히 성장하게 되면 마침내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에 다다를 수가 있다고 하는 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교만이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고 있는 선지자나 의인에 대하여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 피해자가 되고 있는 선지자와 의인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과연 선지자와 의인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왜 유대교 역사에 있어서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일까요?

(1)  선지자’(先知者)는 한 마디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진면목을 피조물인 인간이 직면하게 되면 체질이 녹아버리고 맙니다(33:20, 벧후3: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실 때에는 선지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였다고 하는 의미도 그러한 것입니다(12:8, 34:10). 그리고 선지자는 꿈이나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12:6). 또 하나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벧후1:21).

(2)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강림하여 말씀의 뜻을 풀어주실 때에는 마치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그 마음이 뜨거워집니다(24:32, 45, 16:13-15).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말씀의 뜻을 깊이 있게 깨닫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하여 창조가 되고 섭리가 되어나가는 미래지사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그와 같이 장래 일을 미리 알게 되는 선지(先知)의 지혜가 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선지자’(先知者) 또는 선견자’(先見者)라고 불리고 있습니다(삼상9:9).

(3)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서 선지자로 세우시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주기 위함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뜻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부르짖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의 말씀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전통적인 교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선지자는 자신들의 율법체계를 지키고자 하는 랍비 및 서기관들과 이론적으로 대립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갈등이 증폭하게 되면 마침내 폭력사태를 초래합니다. 그렇다면, 유대백성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바리새인들과 창조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는 선지자들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을 지지할까요? 결과는 보나마나 뻔합니다. 백성들 역시 자신들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율법의 해석을 선호합니다. 그 결과 선지자들이 피해를 받게 됩니다. 배척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본문에서 의인’(義人, a righteous man)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23:29). 그 의미는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정신입니다(11:3-5). 그것은 모든 피조물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모두가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본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그러하지가 않습니다. 이기주의 또는 집단이기주의가 앞서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 집단을 차별합니다. 선민사상이 그러합니다(4:9). 그리고 인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자연과 만물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축과 식물의 유전자는 변형이 되고 동물의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5)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정의’(正義, justice)입니다. 자기들에게만 바람직하면 그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 판정은 자신들의 공동체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항상 자신들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 시대에 미개한 원주민에 대해서 교계의 지도자들이 사람이 아니고 가축과 같다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합니다.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가축이나 짐승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6)  그렇게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사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말자고 부르짖고 있는 의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웃음거리가 되고 묵살이 됩니다. 계속 떠들게 되면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