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5강(마23:13-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6. 20:06

마태복음 강해 제155(23:13-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23:13, 15, 23, 25, 27, 29)라고 하는 표현이 의미하고 있는 것들

 

첫째로, 그 표현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가운데 외식하는 자와 외식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전자에 해당하는 자 곧 외식하고 있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마태는 이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선지자나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그들에 대한 흔적을 복음서에서 찾아보면, 먼저 서기관들 가운데에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있습니다(27:57, 3:1-21, 7:50, 19:38-41). 그리고 일반 바리새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믿거나 호의적인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역시 복음서가 시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13:3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14:1),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예수님)를 믿는 자가 있느냐?”(7:48).

둘째로, 사도 마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호명함으로써 산헤드린 대 공회에 참석하고 있는 율법학자 서기관을 일반 바리새인들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구분입니다. 사실은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이나 율법선생인 랍비들 그리고 그들의 생도들인 젊은이들이 모두 바리새파 사람들이므로 그들 모두를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사도 마태는 구태여 바리새인들 가운데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이 되고 있는 서기관들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더 무거운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소속이 되어 있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예수님이 유죄판결을 받고 결국에는 십자가 처형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인 서기관들에게는 예수님의 처형에 대하여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와 같은 분석적인 표현은 사도 마태의 경험과 학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가버나움 세관원이었기에 관료적인 감각을 가지고 서기관과 일반 바리새인들이 권한과 책임에 있어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마태는 헬라어로 복음서를 저술할 정도로 학식을 갖추고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예리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는 무리들을 분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예수님 처형에 있어서 서기관들이 참여하고 있는 산헤드린 대 공회의 역할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유대교의 최고기관이 산헤드린 대 공회입니다. 대제사장과 70명의 장로 및 서기관들이 그 구성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종교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유대교리를 어기고 다른 주장을 하여 백성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과 그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죄명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됩니다(26:57-68). 그리고 산헤드린 대 공회는 자신들에게 처형의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이유로 로마총독에게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18:31).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무죄한 피의 값을 이방인에게 떠다 넘기려고 하는 약은 수에 불과합니다(20:19). 왜냐하면, 몇 년 후 집사 스데반을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정죄하고 백성들에게 내주어 돌로 쳐죽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6:10-15, 7:1, 54, 57-60).

(2)  산헤드린 대 공회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골치 아픈 유대인들의 내부적인 종교적 분쟁에 휘말리지 아니하려고 하자 유대 백성들을 동원하여(27:20)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압박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하면서 로마에 반역을 하고자 민심을 끌어 모으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석방시키면 빌라도 역시 충신이 아니고 로마황제에게 역심(逆心, 반역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이다”(19:12). 그 결과 본디오 빌라도가 당시 로마황제에게 반역하는 주모자에게 가하고 있는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선포하게 됩니다(19:14-16).

셋째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23:13, 15, 16, 23, 25, 27, 29,  11:43, 43, 44, 46, 47, 52) 또는 독사의 자식들아”(3:7, 12:34, 23:33, 3:7)라는 등 독설을 퍼붓고 있는 대목은 4복음서 가운데 유독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가 왜 마가나 사도 요한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반감이 더 클까요?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들의 출신성분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와 요한은 부잣집 도령들입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큰 저택을 지니고 있는 마리아의 아들입니다(14:51-52). 그 집의 다락방을 빌려서 예수님 일행이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가지기도 했으며(26:18-19, 14:12-16)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2:1). 평소에는 그 큰 다락방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구브로(오늘 날의 키프러스) 섬 출신 레위인인 그들 집안은 예루살렘에서 키프러스와의 무역을 하였으며 객점으로(14:14) 그 큰 집의 다락방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마가는 부잣집 아들입니다.

(2)  사도 요한 역시 부잣집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세베대는 갈릴리의 유지입니다. 예루살렘 유대교의 실세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각별한 친분이 있을 정도로(18:15-16) 지방의 레위인이며 부자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대제사장이나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소속되어 있는 산헤드린 대 공회에 대하여 극단적인 비난을 하지는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예루살렘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는 집안 출신인 마가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3)  그러나 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는 사업가 집안도 아니고 지방의 유지집안출신도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교지도자들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냉정한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유대교인들로부터 평소에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관원 세리출신이 마태입니다(9:9-11). 그리고 의사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의원행세를 하고 있지만 내밀하게는 유대교지도자들의 동향을 살펴서 시리아 총독부에 보고를 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1:3-4, 1:1-2). 그러하기에 그들이 산헤드린 대 공회나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꾸지람을 강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3:13-36, 11:42-52).

(4)  나이와 경험의 차이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 마가와 사도 요한은 청소년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사도 마태는 30대로 보입니다(9:10). 그리고 제1대 제자는 아니지만 의사 누가 역시 전문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30대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마찰과 알력에 대해서 청소년인 제자들보다는 30대의 나이가 된 노숙한 제자들이 더 민감하고 분석적인 이해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마태는 관료의 경험을 가진 자이고 누가는 정보수집과 분석에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들의 인식이 더 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고 있는 그들의 문장이 더 신랄하다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라진 23:14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본에는 12:40또는 20:47과 유사한 구절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20:47). 사도 마태 역시 의사 누가처럼 마가복음을 참조하여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대목을 고의로 빠뜨린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본에는 그 대목이 들어 있고 어떤 사본에는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경을 편집할 때에 왜 생략을 하고 있는 쪽으로 선택을 했을까요? 그 의문에 대해서는 바로 앞 절과 후 절을 참조하여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못하게 하는 도다”(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23:15).

(1)  전후 절 모두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23:13). 그 말은 곧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23:15).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자들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비록 사람들 보기에 거룩해 보이는 신앙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지옥에 들어간다는 단언입니다.

(2)  그렇게 영생이 아니고 영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라는 극언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과부의 재산을 털어먹고 외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는 행태 등 구체적인 지적(指摘)사항이 세밀하게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영 문장의 표현상 어울리지 아니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표현, “화 있을진저라고 쭉 연결이 되고 있는 제13절부터 제16절 사이에 맥을 끊지 아니하기 위하여 제14절을 생략하고 있는 사본을 채택하여 정경으로 편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그렇지만 과부의 가산(家産, 집 재산)을 삼키는 행위”(12:40, 20:47)가 작은 잘못은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아들이 없는 과부는 생계가 막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더불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도움의 대상이며 생계의 보조를 받아야만 하는 계층입니다(10:18, 16:14). 그런데 거룩한 율법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축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범죄행위입니다.

(4)  그와 같은 관점에서 예수님은 과부에게도 성전의 사용료를 헌금으로 받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주시하고 계십니다(12:41-44, 21:1-4). 따라서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모든 일꾼에게 지불함으로써 가정의 생계를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에(20:1-15) 생계비까지 거두어서 하나님의 일이나 국가의 큰 일을 수행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근절의 대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극단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빠져있는 구절에 대해서도 한번 더 그 본래의 뜻을 새겨보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문장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문맥의 뜻을 파악하고 글자와 글자로 표현이 되고 있는 그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의미를 파악해내는 노력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래 존재했다가 나중에 생략을 하고 있는 구절에 대해서도 세심한 관찰과 묵상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는 열심히 캐내는 자들의 것이며(13:44) 더 많이 추구하는 자에게 그 빛은 더욱 찬란할 것입니다(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