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4강(마23:8-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6. 01:52

마태복음 강해 제154(23:8-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2()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아니하자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수님의 처방이 선생, 아버지, 지도자, 큰 자에 대한 개념풀이로 나타나다(23:8-13).

 

한 마디로 참 쉽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자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반대로 행동을 하면 된다고 예수님께서 간단명료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행태가 먼저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기에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을 이해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신앙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타산지석의 배움이 그 가운데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우리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게 되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이 되고 있는 올바른 신앙이면 그대로 따라서 하면 됩니다. 완전히 어긋나있는 신앙행태이면 그 반대로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설명은 선생, 아버지, 지도자, 큰 자라고 하는 개념부터 똑바로 가지라는 것입니다(23:8-11). 본문의 올바른 개념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23:8).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가 되어 있는 한 형제입니다(1:26-27). 하나님이 선생과 제자로 창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배워야만 합니다. 배움이 이미 끝나고 선생으로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영원히 서게 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선생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2)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23:9). 이 땅과 보이는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은 모두 피조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땅에 있는 자는 피조된 세계에 속하는 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주 바깥 보이지 아니하고 있는 하늘에 여전히 운행을 하고 계십니다(1:1-2, 4:6a). 그러므로 창조가 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을 땅에서 조물주(造物主, 물질적인 세상을 만드신 주인) 아버지라고 부르며 섬기고 있는 것은 창세기 제1장에 비추어보더라도 이미 하나님신앙이 아닙니다. 아울러 흙으로 만들어진(2:7a)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하여 그리고 잠시 살고 있는 땅에서 기대이상의 이익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소위 땅에 속한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3)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23:10). 그리스도는 영적인 스승이자 진정한 세상의 임금이십니다(1:49).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적으로 제자와 성도들에게 성령님 안에서 임재를 하여 남은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14:16-20). 그렇게 주님을 자신의 임금으로 삼게 되면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게 되고(12:31) 그 자리에 주님이 지도자로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4)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23:11). 오늘 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종(1:1)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낮추며 성도들을 끝까지 옥중에서도 섬기고 있는 사도가 바로 바울입니다(3:1, 4:1, 1:1, 13-14, 2:7, 4:18, 1:1). ‘바울이란 이름의 뜻은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자가 사울 왕보다 더 위대한 생애를 주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성도들도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서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고전11:1).

  둘째로, 그런데 만약 개념을 거꾸로 가지고서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자기 편하게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계속 영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도 마태는 그것을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징계가 역사 가운데 반드시 임하게 될 것임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바로잡으시는 것일까요?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과정 중에 바로 잡지 않으면 인생이 끝난 다음에라도 반드시 바로 잡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나누어서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인생 가운데 그러한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자신의 평생에 대하여 후회하는지 아니면 만족을 하는지는 그 관 뚜껑을 덮어보아야 알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세상이 모순투성이인 것 같지만 끝까지 살아보게 되면 반드시 그 끝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렇지만 그렇지가 아니한 경우도 많습니다. 본인 당사자의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세상사(世上事, 세상의 일)를 보면 악한 자가 계속 잘 살다가 편히 눈을 감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살던 자가 한번도 그 형편이 좋아지지를 못하고 그렇게 눈을 감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잘못 살았다고 땅을 치며 뉘우치고 후회를 하는 자가 별로 없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세상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설명이 되는 것일까요?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아니하면 분명히 그러합니다.

(3) 여기서 믿음의 눈이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심을 보는 눈을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그러므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포착할 수 있는 눈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의 육적인 눈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은 과거를 보고 그 경험에 의존하여 현재를 보고 있는 눈에 불과합니다. 그와 달리 믿음의 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꺼번에 주관하고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를(4:24)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게 해주고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4) 믿음의 선진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의 눈에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비치고 있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선진들이 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11:6a). 둘째,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상급으로 주시고 또한 주실 것임을 이미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11:6b).

(5) 하지만 역시 더 구체적인 해답은 본문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직접 들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23:13).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중의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 천국 문을 닫고서 자신들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문을 닫았다고 하는 것은 현세만 바라보고서 믿음생활을 율법적으로 영위했다고 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는 신앙생활 또한 현세구복적인 신앙생활을 제례적(祭禮的, 제사의 방법)으로 그리고 율법적으로 가르친 결과 자신도 백성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예수님의 우려가 탄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여기서 누가복음의 기록 하나를 더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 장차 어떻게 되며 천시를 받던 자가 어떻게 높임을 받게 되는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기 쉽게 하나의 우화(寓話, 교훈을 주고자 재미있게 꾸민 이야기)를 가지고 알기 쉽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름하여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16:19-31).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두 가지입니다;

(1)   거지 나사로는 병자이며 장애자입니다. 평생을 부잣집 문간에 누워서 구걸을 하여 연명을 하다가 죽고 맙니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16:22). 반대로, 그 집 주인은 부자입니다. 한 평생 화려하게 즐기면서 살다가 지옥에 들어갑니다(16:23). 그것은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판정과 보상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 보이는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이유 그리고 왜 부자가 억울하게 지옥에 떨어진 것인지 그 이유가 암암리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거지 나사로가 어째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부터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지체장애자이며 병자인 거지 나사로는 평생을 그 집 문간에서 밥을 빌어먹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써는 움직일 수도 걸어 다닐 수도 없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고 있는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과 같습니다(10:30)”.

(3)   그런데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 또는 여리고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는 자신도 모르게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거지 나사로는 집주인인 부자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자신도 모르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고난을 받고 있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과 같습니다(53:2-9). 그러나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한번도 인간답게 대접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4)   그 우화의 결론은 의미심장합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26). 회개하고 주님의 명령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이 세상에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디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이웃에게 특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영적으로 복음을 전해서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물질적으로도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것을 희생하고 봉사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헌신의 결과를 가지고 영생이냐 영벌이냐를 결정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25:45-46).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답게 용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제시해주고 있는 개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본문에서 선생, 아버지, 지도자, 큰 자 등의 개념이 그러한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그 인생살이가 천국 행이냐 아니냐를 결정짓게 되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입니다(23:13). 아무쪼록 그와 같은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16: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