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6강(마23:13-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6. 20:07

마태복음 강해 제156(23:13-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4()

 

자신도 실족하고 남도 실족시키는 신앙생활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지적(23:13-22)

 

본문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그 천국에 자신들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고자 하는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들고 있다고 강하게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23:13). 그와 같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은 사제간(師弟間, 스승과 제자 사이)에 대를 이어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폐해(弊害, 폐습에 따른 피해)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지적입니다(23:15).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가말리엘과 같은 율법학자들입니다(5:34). 그들은 바리새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큰 스승입니다. 그들의 문하에서 제자들이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백성들에게 독자적으로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의 자격을 인정받았을 때에 랍비라고 불리게 됩니다. ‘랍비들은 매주 토요일 안식일에 국내외의 회당’(會堂, synagogue)에서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유대교인인 백성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랍비에 대한 수요는 큽니다. 다윗 왕조의 제사장나라가 망한지 600년이 지났지만 유대인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는 중근동과 유럽 땅에서는 여전히 회당에서 토요일 안식일마다 예배가 드려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이 똘똘 뭉쳐서 그들끼리 율법생활을 착실하게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남자 어른 10명만 모여도 회당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날 한국사람이 가는 곳마다 예배당을 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이방인사회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에 그들 유대인들을 세상에 민들레 씨처럼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살아있는 씨앗들’(scattered seeds)이라는 의미로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칭찬을 받아도 좋을 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한 시절은 그래도 다니엘(bc605), 에스겔(bc597), 예레미야(bc586), 스룹바벨(bc536), 예수아(bc536), 모르드개(bc483), 에스더(bc483), 에스라(bc458), 느헤미야(bc444), 말라기(bc420) 등의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의 하나님신앙을 지도하고 좋은 모범을 보였을 때입니다. 주전 430년경 느헤미아의 마지막 종교개혁이 있었지만 당시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타락으로 말미암아(13:7) 허망하게 끝나고 백성들은 하나님신앙에서 서서히 떠나게 됩니다. 당시의 안타까운 모습이 구약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3:5-15).

말리기 선지자 이후 무려 4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땅에 선지자를 보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전 2세기 중반부터 제사장들이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우고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사상과 전승을 집대성하여 히브리정경을 해석할 수 있는 주석을 만들게 됩니다. 그들의 문헌연구와 역사연구를 통하여 히브리학문이 발달하게 됩니다. 마침내 주전 1세기말경 가말리엘과 같은 율법의 대학자가 등장하자 국내외에서 유대인 젊은이들이 큰 스승 아래로 몰려들게 됩니다(22:3).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에는 율법학자들이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백성들에게는 훌륭한 율법선생인 랍비들이 매주 히브리정경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별안간 요단 강가에 선지자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외치면서 메시아을 맞이하고자 회개하는 자에게 물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3:1-12). 뒤이어 6개월 후에는 세례 요한의 소개로 백성들에게 메시아라고 알려지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3:13-17, 1:29, 36)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찾아와서  다짜고짜 성전청결운동부터 벌이고 있습니다(2:13-22). 그 두 선지자의 출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교지도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1:19-28, 2:18, 3:1-2).

특히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히브리선민사상과 율법생활의 꽃을 피우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그렇게 백성들을 잘 지도하고 있는 시절에 왜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 또는 메시아라고 외치면서 나타나서 자신들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비난을 하고 있는지 그 속내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반응입니다(15:1-2, 22:34-36).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가장 강도가 높은 비판을 마치 폭포수와 같이 쏟아놓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23:13-22).

바리새인들이 도저히 각성하지를 못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잘못이 예수님에 의하여 본문에서 명쾌하게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가증스럽게도 외식’(外飾, 바깥만 아름답게 꾸미는 것)적인 신앙생활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23:13-15). 외식적이라는 것은 진리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1) 겉과 속이 똑 같습니다(23:26). (2) 처음과 나중이 꼭 같습니다(1:8). (3) 누구의 입에서 나오든지 그 뜻이 하나입니다(10:30, 38, 4:5-6). 그런데 외식이라고 하는 것은 안팎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시커먼데 바깥에는 하얗게 회칠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7-28).

둘째로, 예수님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돈에 눈이 멀어 있다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23:16-17). 참고로, 의사 누가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16:13-15a).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왜 돈을 좋아하고 있으며 황금에 눈이 멀어 있을까요? 묵상이 필요합니다;

(1)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교권을 쥐고 있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과는 다릅니다. 그들 사두개인들처럼 정치적인 권력이나 종교적인 권력을 탐하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히브리사상과 전승을 연구하고 그것을 하나의 학문으로 집대성하여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학문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재정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재정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이 관리하고 있는 재정 곧 백성들로부터 거둔 성전세나 기타 성전이용자에게 거둔 헌금을 지원받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2)  그러므로 오로지 바리새인들이 알아서 자금조달을 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구비용과 교육비용을 마련하고 또 자신들의 생계비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 옛날 십이지파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아서 자신들의 생계비와 성전관리비 그리고 종교교육의 비용으로 사용을 했지만 그러한 시대가 이미 아닙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와 선생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던 다윗왕조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경제적으로 막막한 시대입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서기관이나 랍비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스스로 알아서 재정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3)  그 결과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문하생으로부터 수업료를 받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스승을 모시자면 또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학비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청소년 사울이었던 학창시절에 예루살렘에서 유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소아시아 다소에 살고 있는 독실한 유대교인인 부모님이 그 비용을 지원한 것으로 보입니다(22:3, 3:5). 사울의 부모님이 부자였기에 망정이지 그러하지 아니했으면 그가 아무리 영특해도 예루살렘 유학은 불가능했다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예루살렘 유학은 어려운 것이 당시의 형편입니다. 참고로, 오늘날은 상당히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세계도처에서 부자로 살고 있으며 회당에 많은 기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유대인 젊은이들을 재정적으로 크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뒷받침에서 제도적인 지원으로 발전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4)  많은 돈을 들여서 히브리정경을 공부하고 나이 40이 되면 비로서 한 사람의 랍비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정생활을 해야 하고 또한 부모의 빚도 갚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돈이 더 필요하게 됩니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만 할까요? 그때부터는 진리를 추구하기에 바쁜 구도자가 아니라 남이 보기에만 겉으로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는 모양만 유지한 채 내심으로는 돈을 만들기에 바쁜 바리새인의 생활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유대교의 선생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돈에 눈이 멀게 됨으로써 유대교와 백성들이 얼마나 타락을 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몇 가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1)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23:1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제단보다는 그 제단에 바쳐지고 있는 예물이 더 존귀함을 받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바리새인들이 말씀보다는 예물에 신경을 더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더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이 바친 예물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배금주의(拜金主義)에 물들어 있는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의 신앙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23:19). 유대교의 시작은 히브리정경 첫머리 창세기에서부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피조물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보다 더 귀한 것은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이치를 잊어버리고 제단에 예물을 드리고 있으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에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야단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23:13).

(3)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23:20-22). 예수님은 진리를 참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물질인 예물보다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제단이 더욱 중요합니다. 둘째,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제단이나 성전보다는 그곳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셋째, 하늘이 높고 넓으며 크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바깥에 보좌를 펴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더 광대하시고 귀하시다고 하는 자상한 설명입니다.

넷째로,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연구비와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문하생으로부터 적정한 학비를 받고 있는 경우에는 별로 허물이 될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돈을 만지다가 보니까 그만 생도들이 학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돈을 조달하는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종교가 세속화되고 타락하면 마찬가지입니다;

(1)  유대교인들인 백성들이 율법교육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돈을 가지고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어떻게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율법의 본뜻으로 백성들에게 밝히 가르쳐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더 많은 돈을 기부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  그 수단이 기복신앙과 무당신앙의 방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복을 대신 나누어주고 또한 저주 대신에 복을 받도록 대신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 일에 도움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은 두려우신 하나님, 잘못 섬기면 무서운 진노와 재앙을 내리시는 율법적인 하나님임이 틀림없습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유대교는 세속화되고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사상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러한 물질주의에 젖어 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물질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명예를 얻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사탄의 술책이며 유혹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6:16)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6-7). 하나님은 사람의 종이 아니고 주인이며 인생살이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유일한 목적입니다. 부디 그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생활을 영위하지 말라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그 진리를 여전히 선포하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