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2강(마23: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4. 15:26

마태복음 강해 제152(23: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31()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모세가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와 모세의 마지막 깨달음(23:2)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모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독특합니다; (1) 출애굽의 지도자입니다. (2) 광야생활의 지도자입니다. (3) 하나님과 대면했던 지도자입니다. (4) 모세와 같은 또 다른 지도자가 오기를 백성들이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민족을 애굽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민족의 해방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물론 그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갈라지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그 일을 대행한 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세입니다(4:12-17, 12:28-42, 14:15-18).

둘째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의 지도자입니다. 여기서 광야라고 하는 장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먹이고 입히며 율법교육을 시키고 또한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임재하시고 동행하셨기에 가능했습니다(3:12, 4:15-17, 33:13-16). 구체적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은혜(13:20-22),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같이 주심(16:12-16), 모세를 통하여 율법과(19:3-8) 성막을 주심(25:8-9),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심(17:11, 2:13-18, 24-25) 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라고 하는 특별한 장소에서 무려 40년 동안 공을 들여서 240만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서 애굽의 노예라는 의식을 철저하게 청산하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실질적으로 제사장나라의 왕, 거룩한 백성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한 마디로,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권력을 통합하여 그 정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권력은 정치적으로 삼권(三權, 입법권 및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의 수장(首長, 우두머리)이며 동시에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셋째로,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면했던 지도자입니다(33:11, 34:10). 그 점에서 일반선지자와 다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33:22-23).  피조물이 창조주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되면 모든 체질은 녹아 내리게 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33:20, 벧후3:10-14). 그러므로 모세 역시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과 대면하고 대화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12:8). 하지만 그것은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기타 선지자들과는 주로 꿈이나 환상 가운데 만나셨다고 하나님께서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2:6).

넷째로, 모세와 같은 또 다른 지도자가 오기를 백성들이 바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와 같이 소망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모세의 예언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18:15), “(여호와)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메시아)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18:18-19).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사상은 벌써 모세의 예언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출애굽의 역사가 다시 발생할 것입니다.

모세의 예언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메시아사상은 그 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더하여짐으로써 더욱 정교하게 됩니다. 메시아는 다윗대왕의 후계자로서 새로운 유대인의 왕으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2:2). 구체적으로, 메시아는 이새의 아들 다윗처럼 선민을 위하여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하고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친다는 내용입니다(11:1-10). 그 메시아사상이 오랜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민족적인 유일한 소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을 깊이 묵상해보면 더 깊은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120세가 된 모세가 자신의 향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서 더 큰 소망 두 가지를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모두 다 모세 자신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70인의 장로들에게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 요컨대, 간접신앙에서 직접신앙으로 나아가라는 요청입니다.

(2) 모세 자신이 얻은 마지막 깨달음을 성도 모두가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 가나안에서 백성들이 오히려 실족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31:16). 둘째로, 그러므로 광야생활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8:11-18). 그 뜻은 세상의 풍요로움에 취하여 하나님신앙을 잊어버리지 말고 부디 그리스도를 바라며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천국의 상급인 영생을 반드시 얻으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30:6, 20, 11:11-16, 26).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구약의 끝과 신약의 시작 사이 수백 년 동안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주시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랍비들이 모세의 자리만을 탐하여 그것을 차지하고서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여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율법적인 강론을 회당에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폐단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23:2-3)

 

장차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가 있음을 알고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벌써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18:20-22).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가짜 선지자들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마침내 그들이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지자가 진짜 선지자일까요? 두 가지 선지자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둘째,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고 역사적인 성취로 반드시 증명이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피조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정확한 창조주의 말씀을 사람이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20),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여호와 하나님을 생명의 아버지로 알고서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 성도를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말씀 가운데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11-14).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대면하여 만나고 직접 대화를 나눈 바가 있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모세와 같지는 않지만 일반선지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습니다(11:25-26, 12:6). 그래서 그들 선지자는 꿈이나 환상 가운데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이 유대 땅에 선지자로 올 때까지 그 땅에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혀 나타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서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선지자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스승들인 서기관이나 랍비들이 겸손하게 말씀의 뜻을 가르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으면 진짜 선지자가 될 수도 있고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전승되고 있는 율법적 지식체계입니다”. 그 결과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 가운데 오직 니고데모만이 찾아와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을 뿐입니다(3:1-10). 그리고 후에는 그의 친구이며 역시 서기관인 아리마대 요셉이 니고데모와 행동을 함께하고 있습니다(19:38-41).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후안무치(厚顔無恥, 얼굴이 두껍게도 수치를 모르고 있음)하게도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 앞에서조차 인정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19:1-12, 22:15-22, 34-46).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말씀을 가르쳐달라고 매어 달리지 아니해도 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이미 스승으로부터 대대로 제자에게 내려오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주석과 히브리사상 및 전승에 대한 가르침들 그리고 기타 장로들의 율법적인 생활수칙 곧 전통적인 유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젊은이들이 그러한 내용을 십 수년간 공부하게 되면 랍비가 되고 또 명망이 높아지면 서기관으로 출세를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전통적인 학문과 강론을 통해서 백성들로부터 100년 이상 의인이며 선생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다가 보니까 그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서 직접 배움을 얻게 되는 기회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스승들은 선지자의 자리가 아니라 이제는 모세의 자리까지 그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정치적인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모세나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게 되면 그와 힘을 합하여 외세를 몰아내고서 선민의 나라 율법국가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낼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하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메시아와 주종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동업관계”(partnership)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나 주님 섬김의 도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로 그 뜻을 깨달아 실천하고 있지를 않는데 어떻게 모세의 역할과 선지자의 역할을 그들이 조금이라도 수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계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배척하고서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됩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그와 같은 역사가 중세와 근대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중세시대 스콜라철학자들이 철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의 틀 안에서만 사유하고 분석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무리한 시도였습니다. 마침내 형식적인 논리가 성행하게 되고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공격함으로써 스스로 정통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득세를 하게 됩니다. 소위 마녀사냥이 그 부산물로서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2)  근대에 들어와서는 과학지상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득세를 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인 실증주의가 종교적인 신비를 벗기고 진리를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도움이 없이 인간이 교만하게 발전시킨 과학이 양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오늘 날에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성(自省, 스스로 반성함)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이성과 지성의 한계를 일찍 깨닫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역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그 자리를 파수하고 있을 때에 진리에 붙잡힌 영적인 삶이 가능해집니다. 본문에 비추어보게 되면, 그러한 자가 바리새인의 경지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사도라고 결론 삼아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