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0강(마23:1-3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3. 15:18

마태복음 강해 제150(23:1-3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9(주일)

 

사도 마태는 왜 그의 복음서 제23장을 온통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질책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가?

 

사도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시점은 주후 60년대입니다. 그 시점은 그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헤어진 지 30년 정도가 지난 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후 30년경에 골고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했으며 40일 후에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1, 16, 1:36, 3:1-3, 23, 24:46-51, 2:13, 5:1, 7:1, 12:1, 1:3). 사도 마태가 예수님과 비슷한 연령이라고 본다면(9:9-10,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 그는 이미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음.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30대로 보임) 그가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때는 이미 60대의 노인입니다. 노인인 마태는 젊은 시절 예수님과 동행했던 36개월 동안의 공생애를 되돌아보면서 과연 무엇을 가장 인상 깊게 추억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사도 마태는 무엇보다도 동족인 유대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던 가버나움 세관의 세리였던 자신을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준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민족의 배신자이며 매국노 죄인으로 취급을 받고 있던 레위’(2:14, 5:27)가 예수님의 놀라운 불러내심’(calling out)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도 마태는 레위라는 옛날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지은 새 이름 마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의인이 되어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인생 가운데 받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하지만 사도 마태는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겠다고 제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그 고난의 세월을 또한 기억하고 있습니다(9:11-14). 선민 유대인들이 사람취급도 하지 아니하고 있는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차별이 없이 치유사역을 해주신 그리스도입니다(8:28-34, 18:21-31).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그들 만민 모두를 구원하라고 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신 예수님이십니다(6:37-40). 그와 같은 만민구원의 복음사역을 반대하고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20:18-19, 21:45-46).

구체적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상이 유대교의 교리를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하여 예수님을 시험한 대목을 사도 마태가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복음서에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자가 서기관입니다(22:35).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란 존재는 유대교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위대한 율법학자입니다. 바리새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로서 마치 가말리엘이나 니고데모 또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자입니다(23:50, 3:1, 10, 5:34). 그렇지만 예수님이 답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 앞에 서기관의 시험마저 별 소득이 없이 끝나자 바리새인들이 더 이상 한 마디도 못하고 물러나고 있습니다(22:46).

셋째로, 그 장면까지 기술한 다음에 사도 마태는 드디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질풍노도(疾風怒濤, 휘몰아치는 바람과 성난 파도)와 같은 말씀을 제23장에 싣고 있습니다. 60대 노인이 된 사도 마태가 그 옛날 30년 전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당했던 그 억울함을 후세의 독자들에게 하소연하고자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비판을 잔뜩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마태는 선민사상에 기반을 두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 제 논에 먼저 물 대기, 자기에게만 유리한 것)격인 율법으로 풀이하고 있는 율법선생과 학자들에 대하여 그 잘못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밝히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복음이 바로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하나님 말씀의 본뜻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자연히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 남의 잘못을 보고 자신을 고쳐나감)으로 하여 하나님 말씀의 본래의 취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겉으로 보면 사도 마태가 그 옛날 예수님 일행을 괴롭혔던 유대교의 이론가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용서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서 집중적으로 제23장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것은 사도 마태가 모든 성도들에게 유대교의 지도자들처럼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만약 선민사상에 젖어서 제사장나라로서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아니하며 만민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성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똑 같은 질책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비판을 받을 만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큰 잘못은 도대체 몇 가지나 되고 있는가?(23:1-39)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23:2). 모세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시내 산에서 율법으로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자입니다(19:3-8, 20:18-19, 24:3, 5:25-27). 둘째, 그 율법의 해석을 가지고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한 사람입니다(18:16). 셋째, 친위부대인 관료조직을 만들어서 열두 지파를 다스린 사람입니다(18:25-26). 그와 같은 영적인 지도자 그리고 종교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12:6-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문제가 거기서부터 발생을 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말과 행동이 다름)가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질책하고 있습니다(23:3-4).

(3)  남의 눈을 의식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만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쇼맨십’(showmanship)에 불과하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23:5).

(4)  윗자리를 좋아하며 명예욕이 대단합니다(23:6-8).

(5)  성도 모두가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똑같이 섬기고 있는 형제이며 자매라는 평등의식이 없습니다(23:8-10). 그러므로 신앙공동체를 수직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6)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결여되어 있습니다(23:11-12).

(7)  교인을 얻기 위하여 열심이지만 바른 신앙생활로 양육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만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23:13-15).

(8)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보다는 성전건물 자체의 화려함을 사랑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제단보다는 값이 비싼 성물(聖物)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23:16-22).

(9)  믿음생활에 있어서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23:23-24).

(10)    외식적인 믿음생활, 가식적인 신앙생활이 가장 큰 문젯거리입니다(23:25-29).

(11)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의 본뜻인 진리를 세상에 전하고 있는 선지자를 조상대대로 핍박하며 죽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지혜자, 또는 복음을 알게 된 일부 서기관을 박해하고 있습니다(23:30-34, 7:48-52, 12:42).

(12)    하나님의 선지자와 무죄한 자를 죽인 피의 값을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23:3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