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7강(마22:34-4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1. 22:59

마태복음 강해 제147(22:34-4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6()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전략을 논의하고 율법의 대가(大家, 뛰어난 성취자, a great master)인 율법사를 시험의 대표로 예수님께 보내어(22:34-35) 율법의 근본취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 답변이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 및 계명을 중시하는 관점과 별로 다르지 아니한 줄 알고 만족해하고 있습니다(22:35-40). 그러나 실제로는 엄청 다릅니다. 왜 그러할까요? 그리고 그 사실을 적고 있는 공관복음 세 저자의 입장의 차이는 무엇일까요?(22:34-40, 12:28-34, 10:25-28). 마지막 의문사항에 대해서는 다음 번 강해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율법의 근본취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유도하고 있는가?(22:34-35)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인 서기관, 율법선생인 랍비, 그리고 그들의 문하생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뛰어난 율법학자로서 명망이 자자한 자는 산헤드린 대 공회에 참석하며 서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리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은 개인적으로 학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국내외에서 그들의 명성을 듣고서 수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백성들에게 독자적으로 히브리정경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고 있는 자들이 소위 율법선생인 랍비들입니다. 그들도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문하생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정경과 히브리 사상 및 전통을 공부하고자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학생은 많은데 서기관들이 소수이므로 전부 수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국내외에서 왜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히브리 종교와 학문을 공부하고자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레위인들이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회당(會堂, synagogue)이 국내외에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국제화된 지 오래된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많은 회당을 가는 곳마다 지니고 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독특한 민족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만 살고 있지를 않습니다.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고향을 떠나서 헬라의 세계와 로마제국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교포의 수가 더 많습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오래된 것입니다. 주전 586년에 다윗 왕조의 유다 나라가 망하자 대부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주전 538년경부터 페르샤 황제 고레스의 호의로 유대인들이 자유민이 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대열에 참여한 수는 전체의 1할 정도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페르샤 제국에 흩어져 살다가 헬라와 로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교포 유대인들은 현지의 120개 다른 종족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특이하게도 유일신 여호와만을 섬기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선민사상은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중근동과 유럽 땅에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살고 있습니다. 남자 어른 열 명만 모이면 회당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고달픈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리고 수백년이 지나도 그들의 독특한 유일신 종교와 언어 그리고 문화를 잊어버리지 아니하기 위하여 머리가 비상한 자손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이론적 기여를 하고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과 히브리 사상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는 유대인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사렛 예수가 나타나서 그들의 율법해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해놓고서 다른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12:1-13). 그냥 무시하려고 해도 그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를 통하여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12:15, 14:19-21, 15:31).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복음사역이 이단적인 것이라고 정죄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근본취지에 대한 예수님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청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22:34). 아주 중요한 사항이므로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이 되고 있는 서기관이 대표로 나서고 있습니다(22:35, 12:28).

 

바리새인을 만족시키고 있는 예수님의 답변(22:35-40)

 

예수님의 답변은 십계명을 압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 사랑입니다(20:2-11). 그리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가 이웃사랑입니다(20:12-17). 예수님의 답변은 서기관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모세의 율법의 모든 취지가 십계명에 그대로 담겨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웃사랑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진술을 했기 때문입니다(22:37-40).

바리새인들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마가와 의사 누가가 더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진술(12:29-31) 다음에 질문을 했던 서기관이 똑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2:32-33). 그리고 예수님과 의기투합함으로써 시험이 끝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34). 의사 누가는 아예 서기관의 답변만을 싣고 있습니다(10:27).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서기관에게 먼저 진술을 해보라고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10:26). 그 다음에 예수님은 그렇게만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칭찬을 해주고 있습니다(10:28).

 

예수님의 답변 속에 실제로 담겨있는 내용들

 

예수님의 답변은 사실 구원과 영생의 문제와 직결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의사 누가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시니”(10:25-28).

이 세상에서의 구원과 영생은 피조물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말씀에 순종을 할 때에 비로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첫걸음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복음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이웃사랑이 바로 하나님사랑이라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듯이 그렇게 정성스럽게 섬길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율법선생이며 학자들인 바리새인들이 그렇게나 외식주의에 빠져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질책을 당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15:5-7).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흘러나올 수가 있을까요? 정답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을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님을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8:1-4);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복음으로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진리의 성령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대속의 삶, 중보자의 삶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의 모습입니다(3:18).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상호협력하고 단결하여 그 일을 집단적으로 행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 유식한 말을 덧붙인다면, 신본주의에 해당하는 하나님 사랑이 인본주의인 이웃사랑으로 흘러 넘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