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5강(마22:23-3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1. 00:25

마태복음 강해 제145(22:23-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4()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부활의 의미와 그 특이성(22:23-33)

 

사도 마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한 내용을 본문 마태복음 제22장 제23절과 제33절 사이에 수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사두개인들이라고 하면 전 현직 대제사장들을 포함하여 백성들의 장로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곧 영생이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이 없는 종교는 금생(今生, 이 세상의 삶)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하급종교에 불과합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그들이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단지 피조세계(被造世界, 창조가 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재앙을 면하고 행복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한평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는가에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 바 유대교의 세속화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유일한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기복신앙과 우상문화의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 공회에는 사두개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율법학자로서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23:8).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은 예수님이 믿고 있으며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부활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11장에서 간결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의 입을 통하여 바리새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그것은 인류역사의 종말에 찾아오는 미래적 부활을 믿고 있다는 내용입니다(5:29). 그러한 부활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이 수정을 가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생명에 이르는 부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어야 생명의 부활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금 당장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의 확신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을 통하여 당장 확신 가운데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모두 이해하지를 못한 마르다는 예수님 역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가지고 오시는 미래적인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11:27).

물론 사람에게는 죽은 다음에 죽음의 잠을 깨우러 오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5:25-29). 그런데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죽음과 같은 이 세상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며 실제로 영적인 생명의 능력을 믿음 안에서 공급해주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11:11-15). 그 필요를 아시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현재적인 부활의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마치 확인도장처럼 성도의 심령 속에, 그 속사람 속에 내주하여 역사를 하십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성령님이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고전6:19-20).

그리고 그 성전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적으로 함께 거주하고 있음을 예수님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6-20).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11:32-3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단 베다니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되살려냄으로써 자신에게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11:39-44). 그 다음에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장차 성도들이 얻게 될 부활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 특이성이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지적 그대로 사람들이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부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29).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1:1).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2:4, 7).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면 사람이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말씀을 믿는다면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 제37장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부활하게 되면 그 몸이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22:30b, 20:19). 한 마디로, 부활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게 됩니다(20:19). 그 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마치 천사들과 같이 영적인 몸을 입게 됨으로 부활한 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22:30).

셋째로, 죽은 자의 부활과 산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22:31-33, 5:28-29). 종말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 자는 생명의 부활로, 죽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5:28-29). 여기서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다는 뜻이며 영적인 의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인 그 영혼의 상태를 먼저 보십니다(삼상16:7). 그 영혼이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서 살아 있으면 비록 몸은 죽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비록 그 육체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란 땅에서 60년 동안이나 멀쩡하게 생존하고 있는 데라를 하나님은 집사 스데반의 입을 통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11:26, 32, 12:4, 7:4).

한 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인생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5:22-24, 6:9, 12:4, 17:1, 26:3, 31:3, 46:4).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평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자신을 모세에게 밝히고 있습니다(3:6, 15). 그 점을 예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22:3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부활하게 되면 더 이상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에 억매이지 아니하게 됩니다(22:29-30a, 1:12-13).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것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8:35).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자면 세상을 이겨야만 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21:7). 인간의 역사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이긴 자가 단 한 사람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6:33). 그 이김으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 설명하자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도 요한이 연역적으로 증명하고, 또한 공관복음의 저자들이 귀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네 개의 복음서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을 이긴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7-38).

풀이를 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져야만 하는 십자가는 가족관계와 친지관계 그리고 그 어떠한 사회적인 이익관계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혈연이나 사람의 인정 또는 조직의 이익 등에 이끌리어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할 때에는 그 옛날 베드로에게 떨어졌던 예수님의 불호령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16:23).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환언하면,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산 자의 부활이며 영생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