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4강(마22:23-2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0. 08:11

마태복음 강해 제144(22:23-2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3()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차이(22:23-28, 23:6-9)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에는 두 파벌이 있습니다. 주로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파와 율법해석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 바리새파입니다. 구성원을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사두개파이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입니다. 두 파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1)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2:23).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23:8). 그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사두개인들은 권력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의 최고지도자인 대제사장의 자리와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 공회를 자신들이 차지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외세와도 타협을 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전통의 시작은 벌써 느헤미아 총독의 통치말기 때부터 싹수를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외세와 타협하여 자신의 교권을 사수하고자 획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7).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릅니다. 주전 140년경 레위인 제사장들이 앞장을 서서 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출범시킬 때에 그들은 권력을 내려놓고 낙향한 사람들입니다. 그 후 그들은 초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유다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데 전념했습니다.

(3) 사두개인들은 히브리정경에 대한 지식이 짧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학문적으로는 겨우 모세의 오경만을 익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오히려 다른 명분으로 덮고 있습니다. 모세오경만 공부하고 적용해도 율법생활은 충분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에 나타나고 있는 부활의 사상, 천사의 존재, 영의 존재 등에 대해서는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23:8). 나아가서 역사서와 시가서에 대해서도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4)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39권 히브리정경은 물론 기타 히브리 사상과 전통을 모두 공부하고 연구하여 주석까지 만들어 대대로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랍비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랍비는 율법선생인데 특히 열정적인 히브리 학문의 성취를 이루어 독자적으로 백성들에게 히브리정경을 율법으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한 사람의 랍비가 되자면 적어도 십 년 이상 유명한 랍비를 스승으로 삼아서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22:3, 3:5). 보통 40세 정도가 되어야 어엿한 한 사람의 랍비로 홀로 서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메섹 도상의 사울도 그 정도의 연령대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9:1-9).

(5)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위와 같이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교리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호협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나타나서 성전의 권위를 손상하고 율법에 규정된 안식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자 그들은 분노합니다. 더구나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설파하자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를 선지자이며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백성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예수를 그들과 분리시킬 수가 있을까요? 예수로부터 엄청난 약점과 잘못을 끄집어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백성들이 등을 돌리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6) 그런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그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방법이 달리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예수님의 생각을 묻고 있습니다(22:15-18). 어떠한 답변이 나오든지 간에 로마의 반역자 또는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몰아갈 수 있는 절묘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론과 사상을 취급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질문이 교묘하며 그 속에 사람을 벨 수 있는 무서운 칼날을 숨기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을 바리새파와 입장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추어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처리를 하도록 유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은(22:23) 부활에 관하여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족장사회에서 형성된 모세의 율법은 소위 수혼제도’(嫂婚制度, 형이 죽으면 아들이 없는 과부인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취하여 합방하고 아들을 낳아주어 형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살 길을 마련해주고 동시에 집안의 재산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조치하고 있는 고대의 사회제도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6:5). 그런데 장자가 죽고 형수가 무자식으로 과부가 되었습니다. 시동생과 합방을 합니다. 그러나 6명의 시동생들이 모두 아들을 낳아주지 아니하고 죽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만 합니까?”(22:24-28).

왜 그러한 질문을 사두개인들이 일부러 예수님을 찾아와서 던지고 있을까요? 그 저의(底意, 아래에 숨어 있는 의도)는 우선 예수님의 복음사상이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가까운지 아닌지부터 확인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바리새파의 하나로 몰아서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나사렛 예수파를 처리하도록 하면 될 것으로 그들은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청결사건을 일으켰으며(21:12-13) 또 몇 해 전에는 그 성전이 무너지면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 바가 있습니다(2:19). 그와 같이 대제사장의 성전운영방침에 대하여 이의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친 사두개파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리새파로 몰아붙여서 처리를 해버리면 될 것입니다. 사두개파의 뛰어난 정치적인 술수가 돋보이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파는 이론적인 측면과 신학적인 측면이 뛰어납니다. 반면에 사두개파는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합니다. 평상시 그 두 집단이 상호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산헤드린 대 공회를 잘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를 처단하는데 있어서는 두 집단이 입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집단 모두 예수님에 의하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선생과 학자로서의 권위에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경영에 있어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그 두 집단의 날카로운 시간차 공격이 집요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제21장과 제22장에서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