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2강(마22:15-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9. 17:49

마태복음 강해 제142(22:15-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1()

 

바리새인들의 무서운 흉계와 이를 즉각 간파하시는 예수님(21:43-46, 22:15-18), 그들이 놓은 올무에 역사적으로 그들이 걸리게 되다(24:1-2, 19:11-12).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독실한 유대교인들에게 이른 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21:23, 32-44).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곧 자신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 줄 깨닫고서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처치하기 위하여 체포를 하려고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21:45-46a).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독실한 유대교인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체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21:11, 46b).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의논을 하고 있는 줄 번연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22:18a) 그래도 그들의 깨달음과 회개를 바라는 마음에서 혼인잔치의 비유까지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22:1-14).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1) 선지자들의 외침과 자신들의 유대교리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21:34-36). 그 사실을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22:2-6).

(2) 이제 예수님까지 반(, anti-) 유대교 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처단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21:37-41, 22:12-13). 그 진노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이 유대교와 선민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21:40-43, 22:8-10).

(3) 그 역사의 분기점에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의 멸망이 있을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21:44, 22:7). 특히 돌이 등장하고 예루살렘이 불타게 되고 백성들이 흩어지게 된다는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에 화재와 무너짐이 있게 되면 선민사상 유대교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이 심판을 받고 온 세상에 유민(流民, 떠돌이 백성)이 되고 말 것이라는 역사적인 예언입니다.

그와 같은 섬뜩한 예언까지 듣게 된 유대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나사렛 예수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유대교경전과 히브리 사상에 밝은 바리새인들이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21:45, 22:15-16a).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나사렛 예수를 백성들과 분리시키고 로마의 반역자로 처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이론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 방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를 로마의 반역자 곧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외세를 힘으로 몰아내고자 하는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22:17-18, 26:52, 27:11, 37, 42, 19:12).

사도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마태는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22:15)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자면 예수님이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꼼짝없이 걸려들 수 있는 말의 꼬리를 잡아내어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말에 실수를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체 예수님이 말에 실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외세인 로마의 황제나 로마의 총독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말에 실수를 하지 않고 있다면 실수를 하도록 유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묘한 질문을 던져서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둘째로, 사도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22:16a)라고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 수년간 유대교정경을 공부하고 히브리사상과 전통을 공부하여 랍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보통 40세쯤 되었을 때에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율법선생 곧 랍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랍비 아래에는 율법을 공부하고 있는 많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존경 받는 랍비 가운데 몇 사람이 율법학자로서 산헤드린 대 공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사, 교법사 또는 서기관으로 불리고 있습니다(3:10, 5:34).

본문을 보면, 랍비나 서기관들이 직접 예수님께 찾아와서 시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슬쩍 자신들의 제자인 젊은이 가운데 당시 33세쯤 되는 예수님과 동년배를 골라서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계심을 늦추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묘하게도 헤롯 당원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헤롯 당원은 특이하게도 유대교로 개종하고 있는 이두매인들의 헤롯 왕가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유대교인이 아닌 이교도 로마인들의 지배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는 이유는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은밀한 요청을 듣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안디바는 자기가 처형한 세례 요한의 뒤를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로서 혹시 잇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인물입니다(14:1-2). 그러므로 그를 지지하고 있는 헤롯 당원들에게 나사렛 예수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종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헤롯 안디바는 나중에 체포되어온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자신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반감이 어느 정도이며 선지자의 신기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거듭 확인하고자 합니다(23:6-9).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안디바는 음흉하게도 대제사장과 로마총독의 손으로 예수를 처형하도록 넘겨버립니다(23:9-12). 그와 같이 심계가 깊은 헤롯 안디바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여기고 있는 자들이 바로 헤롯 당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사도 마태는 “(그들이)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22:16b)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스승 랍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바리새파 젊은이들 그리고 은밀하게 헤롯 안디바의 사주를 받고 있는 헤롯 당원들은 결코 예수님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 아부성의 발언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심적으로 경계심을 늦추고 가능하면 무장해제를 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교활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사람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삼상16:7, 4:12-13). 예수님은 진작부터 그들의 시커먼 속과 기름칠한 입술의 번지르르한 말의 정체를 낱낱이 파악하고 계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22:18).

넷째로, 드디어 본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험문제가 출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22:17). 진리를 설파하시는 분이시니 진리에 입각하여 답변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함정입니다. 옳지 않다고 말하게 되면 로마황제에게 세금 납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반역자라고 로마의 총독부에 고발할 것입니다. 또한 옳다고 답변을 하는 경우에는 유대인들의 정서를 외면하고 있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몰아붙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입니다.

그들의 수단을 알면서도 꼼짝없이 그 올무에 걸려들게 생겼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따지자면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시험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특히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곤궁한 형편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번 강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그 올무에 자신들의 발목이 묶이게 됩니다. 연유를 간략하게 살펴보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사형집행권이 없다는 사실을 구실로 삼아 예수님의 신병을 로마총독에게 인계합니다(27:1-2, 18:31).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하면서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18:30, 33, 19:12). 똑똑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보고서 즉각 그 주장이 억지임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무죄로 석방을 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이 한사코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국면을 전환하고자 빌라도가 승부수를 던집니다(27:15)

 빌라도의 승부수는 유대인들이 진짜로 로마에 대하여 무력항쟁을 한 바 있는 죄수 바라바의 석방을 원하는지 아니면 단지 신앙적인 불일치 때문에 미워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의 석방을 원하는지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27:16-18).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게도 유대교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예상과는 달리 바라바를 선택하고 맙니다(27:18, 20-21). 오직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그들이 잘못 선택한 결과는 훗날 로마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의 멸망이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도래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적인 꾀로 의견이 다른 자와 정치적인 반대자를 제거하고자 올무를 설치하거나 함정을 팔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다양성 가운데 일치를 가져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설득을 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올무에 자신이 걸리고 그 함정에 자신이 빠지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의 방향성에 대하여 예수님이 한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