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39강(마21:40-4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8. 21:22

마태복음 강해 제139(21:40-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19()

 

포도원 농부 비유의 결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접하는가에 따라서 앞날의 역사가 달라지고 있다(21:40-46)

 

포도원’(21:33, 39-41)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히 보고 있는 포도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인 세상의 개념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육적(肉的, fleshly or physical)인 것이라고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은 또한 영적(靈的, spiritual)인 개념에서 포도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서는 선민 이스라엘’(5:7, 27:3), 신약에서는 의미상 선민과 이방인을 망라하는 모든 사람’(15:1-11)입니다.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지키시고 가꾸시는 분이 포도원지기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7:3). 신약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만민을 포도원에 비유하면서 자신은 포도나무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고 지키시는 농부가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5:1). 그런데 본문의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완벽하게)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21:33)라고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잘 관리하도록 선민 이스라엘에게 맡겼더니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영적인 위탁에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포도원을 대신 관리하게 된 농부들처럼 유대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피땀 흘려 포도농사를 대대로 짓다가 보니까 어느 사이에 그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설혹 창조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사는 자연환경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을 뿐 하나님이 개입하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인의 뜻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들이 역사 가운데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크게 반발합니다. 애꿎게 선지자들이 마치 함흥차사처럼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21:35-36). 드디어 심판을 앞두고서 포도원 주인이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농부들은 영구히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이방인의 손으로 처형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21:39). 여기까지의 비유적인 설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지혜롭게도 유대교지도자들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고서 그 나머지 역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세 가지 대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신실한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 경영을 맡기게 됩니다(21:40-41). 예수님의 이야기가 자신들에 대한 비유인 줄 미처 몰랐던 유대교지도자들이 그것이 포도원 주인의 당연한 조치라고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2) 유대교의 기초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민 이스라엘이 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21:42-43a). 그 나라는 선민이라고 하여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21:43b). (3)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하고 생활화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남을 것입니다(21:44).

조금만 더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인을 대신하여 포도원을 경영하도록 위탁을 받은 자들이 농부들입니다. 그들은 한 해 포도농사를 열심히 지은 다음에 주인과 수확을 나누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합당한 세를 내지 아니하고 주인의 종을 때려 죽이고 있으니 그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예수님의 질문에 유대교지도자들이 스스로 올바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패역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다른 신실한 농부들에게 다시 포도원을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21:40-41). 예수님은 그들의 답변이 옳다고 전제하면서 그 다음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전개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다가 보니까 유대교지도자들은 그 농부들이 바로 자신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인 줄 깨닫게 됩니다(21:45).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잡아서 분풀이를 하고자 합니다(21:46a). 그러나 뜻을 이루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었던 많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21:23, 46b).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서 그를 선지자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21:46c).

둘째로, 유대교가 성립된 기반을 두 가지입니다; (1)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계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 말씀을 율법으로 지키고 있는 유일한 언약의 백성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들인 자신들을 영원히 보호하실 것이라는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의 상징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21:42, 118:22)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창하고 있던 그 노래가 예언으로서 이제 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이 밝혀지고 있으며 그 취지를 무시하고서 선민사상만 강조해왔던 유대교인들에게 징계가 임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이제 혈통적인 구원만을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21:43a). 그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쫓아 말씀을 바로 보고 만민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것입니다(21:43b).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기초석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받치고 있었던 기초석과 다릅니다. 그 기초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2:36, 2:20).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선민사상에 물들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뜨리고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19-22).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수행하고 있는 두 가지 역할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집단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새로운 성전의 건축에 참여하도록 해주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21:44). 이 말씀은 개인에게만 적용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견고한 나라 세상적인 제국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가 뜨인 돌을 가지고 그 점을 이미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45).

끝으로, 예수님은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부디 열매 맺는 백성이 되라고 간곡하게 말하고 있습니다(21:43).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 받았으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하여 선민의 특권과 특혜만을 주장해왔으니 유대인들이 무슨 열매를 맺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디 회개를 하고서 초심으로 돌아오라는 호소입니다. 그 옛날을 돌이켜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의 노예와 다름없이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해방시키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19:3-8). 하나님의 말씀으로 광야에서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살만한 땅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신을 섬기는 원주민과 적당히 타협하고 점점 우상을 섬기면서 그들을 닮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다하는 거룩한 백성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동족인 유대인들의 회개를 끝까지 원하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21:43-44). 사도 바울도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있다고 하겠습니다(9:1-5, 10:1-4).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곤욕을 당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숨이 남아 있는 동안에 끝까지 동족들을 일깨워주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21:31-32, 22:15-16). 그러나 그 진심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처치하려고 본문에서 더욱 결심을 굳히고 있을 따름입니다(21:4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