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0강(마22: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8. 21:24

마태복음 강해 제140(22: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0()

 

예수님이 유대교지도자들 앞에서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독실한 유대교인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혼인잔치 비유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21:23, 22:1-6)

 

예수님은 자신이 금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처참한 최후를 마치실 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20:17-19). 모든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저지르고 있는 그 죄악 때문에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것입니다(1:29). 도대체 인간의 죄악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야만 되는 것일까요? 비록 창세기 제3장에서부터 원죄를 말하고 있으며 제4장에서부터는 계속되는 원죄의 대물림과 인류의 죄악의 확대재생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로써는 정확한 수긍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그 정도로 쉽사리 이해가 가능한 문제였다면 애초부터 유대교지도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긴장과 갈등도 없었을 것입니다.

죄악의 정체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지도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지금 서 있습니다(21:23). 마치 천치와 같이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닫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 모습을 딱하게 보시고서 예수님이 마지막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22:1-14). 그런데 그 내용은 시작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어째서 임금을 싫어하고 있을까요?”(22:2-3). 보통사람의 초청이 아니고 그 나라의 임금입니다. 그것도 왕자의 혼인잔치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구동성으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불참사유는 언뜻 보면, “농사일 또는 사업상의 일 등으로 바빠서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다는 것”(22:5)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급해진 임금이 다시 종을 보내어 부디 참석을 해달라고 간청을 할 때에 그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22:4-6); “임금이라는 존재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 초청을 무시하고서 제 볼일을 보러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아예 임금을 너무 미워하고 있으므로 심부름 온 종들을 잡아 죽이기도 합니다”(22:5-6).

그와 같은 이상한 비유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비근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전설과 같은 시대에 요순(堯舜)시절이 있습니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은 얼마나 정치를 잘했는지 태평성대가 계속이 되었습니다. 임금의 수고로 백성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기에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임금이 암행에 나섰습니다. 내심(內心, 마음 속)으로는 백성들이 하나같이 임금의 덕을 칭송하면서 성군(聖君, the holy king)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였습니다. 너무나 태평성대가 계속이 되다가 보니까 그만 백성들이 임금의 존재까지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요순시대의 의미입니다”.

동일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1:26-27).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세상만물을 잘 다스리도록 엄청나게 축복하셨습니다(1:28-30). 그 결과 사람들이 번영을 누리면서 천하만물과 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서 크게 만족을 하십니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너무 좋아서 아담에게 아름다운 아내 하와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2:20-25). 그러자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그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따르게 된 것입니다(2:23-25, 3:6).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하와 없이는 못 살게 된 것을 보고서 사탄의 유혹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하나님 간섭을 받지 않고서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3:1-5)

제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그것이 죄악입니다(1:28).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은 것, 그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1:15). 단 하루를 살아도 이 세상의 주인으로 그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어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세상적인 지혜에 의존하여 영생을 추구하는 그것이 저주이며 영원한 형벌이라고 하겠습니다(3:22). 그렇지만 사람은 창조주의 종으로 이 세상을 대리 경영하는 제2인자로 그렇게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심성을 가지게 된 인간을 어떻게 하면 구원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생을 통해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남은 인생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 다음에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5:9, 45, 20:23, 8:35, 15:15, 8:14-15, 21:7).

구체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머리와 심장을 그 속사람 속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하겠습니다(3:18-19, 2:5-11).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새로운 처방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서 부활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6:4, 8:1-6, 고전6: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