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38강(마21:33-3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6. 23:37

마태복음 강해 제138(21:33-3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18()

 

예수님이 유대인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보다 더 강력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다(21:33-39)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결심하시고 있습니다(20:17). 그때 무리들을 떠나서 따로 열두 제자와 함께 길을 가시면서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16:21, 17:22-23, 20:18-19). 그런데 그 세 번째의 예언의 내용이, 앞선 두 차례에 이르는 예언과 비교해볼 때, 다음과 같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더욱 구체적입니다(20:17-19); (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2) 그들이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3) 예수님의 신변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들 유대교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 것입니다. (4) 그러나 예수님은 삼일만에 죽음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요컨대, 이방인들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게 만들 것이라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얼마나 교활하며 그 음모가 치밀한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의 손에는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묻히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모를 꾸미고 남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처단하게 만드는 그 과정이 끔직한 것입니다. 따져보면, 일반형법에서 살인교사자(殺人敎唆者, 살인을 지시한 사람)와 그 하수인으로서 살인행위자가 따로 있다고 할 때에 그들 양자를 모두 공동정범(共同正犯, joint principal offender)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은 그리스도를 살해함에 있어서 공동정범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살해함에 있어서 교묘하게도 유대교지도자들의 이름은 빠지고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만이 들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립 이후 오늘 날까지 성도들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만이 단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것으로 신앙고백하고 있는 셈이니 그것은 문제의 본질을 절반이나 흐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실수를 하고 착각을 할지 몰라도 절대로 그 판단을 흐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로마총독인) 네게 넘겨준 자 (유대교지도자들)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한 마디로, 진리에 입각하여 진실을 모두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의 예언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20:18-19). 그리고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운데 적나라하게 들어 있습니다(21:33-39). 유대교지도자들의 탐욕과 교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까지 음모를 꾸며서 처단한 반역의 죄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매우 생생하게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있습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있는 집주인의 솜씨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 가운데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21:33a).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해준 세상은 완벽한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를 길러서 그 열매를 얻어 즙을 짜서 포도주라고 하는 생산품을 얻고자 하는 것이 포도원을 창설한 집주인의 의도라고 하는 사실도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라는 대목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좋은 포도주를 만들 때까지 포도나무가 잘 자라고 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포도원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설비가 산울타리와 망대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집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21:33b). 여기서 창조주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천지만물과 온갖 생명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1:26-27). 그 이유는 사람을 창조하여 피조 세계를 대신 경영하고 돌보는 충실한 청지기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1:28-30)”. 따라서 창조주의 뜻을 존중하여 청지기인 사람들이 계약조건에 맞게 신실하게 세상을 경영한다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최상품의 포도주를 계속 생산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1:31).

셋째로, 집주인이 포도원을 대리 경영하고 있는 농부들에게 수확물을 나누고자 자기 종들을 보내고 있습니다(21:34). 하지만 농부들이 포도원주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수확을 전부 차지하고자 주인이 파견한 종들을 해치고 있습니다(21:35). 그와 같은 배신행위를 하게 되는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오래 위탁경영을 하다가 보니까 어느 사이에 마치 포도원이 자신의 것인 줄 여기게 된 것입니다. 피땀 흘려 포도원을 가꾼 당사자는 집주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농부들 자신입니다. 포도원을 창설한 집주인은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를 않습니다. 멀리 외국에 나가 있다고는 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아예 이제는 자신들의 포도원으로 인식하고서 열심히 경작을 하면서 풍년을 구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멀리 외국에 나가있는 집주인이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수확의 계절이 가까워지자 집주인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21:34). 농부들은 현재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규약에 따라서 포도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그 종들은 다른 계약서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잊어버렸으며 또한 잊어버리기를 원하고 있는 당초 집주인과의 계약의 조건들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따로 있으며 농부들은 모두 일꾼에 불과하다는 내용입니다.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크게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크게 반발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다음과 같습니다;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21:35).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일찍이 하란과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것입니다(12:1-3, 19:3-8). 이방 땅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창조주의 뜻을 존중하라는 선지자들의 말씀선포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 못하게 선지자들을 핍박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살해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방법이 백성들로 하여금 돌로 쳐서 죽이게 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서 죽이는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해친 소에게 내리는 처형의 방법입니다(21:29, 32). 그런데 그 방법이 훗날 선지자를 처형하는 방법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일반백성들이 왜 그와 같이 끔직한 처형에 참여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집사 스데반을 처형하는 대목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를 상대하고자 유대교의 젊은 랍비들이 나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서 많은 능력을 행하고 있는 스데반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는 스데반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 흑색선전에 현혹이 된 유대교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6:10-13, 7:57-58). 요컨대, 하나님의 종을 짐승으로 취급하고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돌로 쳐죽이고 있는 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53:1-11).

  다섯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계속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본문의 비유 가운데 농부들이 종을 죽여도 집주인이 계속 종을 더 많이 보낸 것과 같습니다(21:36).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전혀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종들의 죽음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계속 희생이 되고만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와 같습니다.

끝으로, 이제 집주인이 외국에서 돌아오게 되면 포도원의 역사는 달라지게 됩니다. 반역한 농부들은 처형이 될 것이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21:40-41). 그와 같은 처절한 심판을 집주인이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통첩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을 직접 자신을 대신하여 포도원의 농부들에게 보낸 것입니다(21:37).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결론적으로, 상속자만 처치하고 나면 영구히 포도원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살해하고자 합의를 하고 있습니다(21:38). 그리고 교활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처형한 것입니다”(21:39). 그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처형할 것임을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기 전에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20:17-19). 세 번째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본문의 비유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