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36강(마21:23-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5. 16:18

마태복음 강해 제136(21:23-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17()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신 바 있는 예수님이 그것을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공격을 막아내시다(21:23-27, 3:15).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종은 세 종류입니다; (1) , (2) 제사장, (3) 선지자 등입니다. 그 가운데 신분과 정체성이 세상적으로 확실한 부류는 왕과 제사장입니다. 모두 혈통을 따라서 세습제가 원칙이니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왕상1:30, 20:26). 다만 문제가 되고 있는 자들은 선지자입니다. 제대로 능력 있는 선지자가 되자면 두 가지 관문을 거쳐야만 합니다; 첫째, 이름이 알려진 선지자의 문하에서 생도수업을 해야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씀의 위탁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 두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한 대표적인 사례를 사무엘의 경우와 엘리사의 경우에서 잘 엿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에는 실로에 있는 엘리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나실인으로 자라났습니다(삼상1:24-28, 2:11).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생도수업을 확실하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듣고 있으며 또한 그 임재 안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삼상3:3-21). 그러므로 사무엘의 선지자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사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의 문하에 생도로 들어가게 됩니다(왕상19:19-21). 엘리야 선지자가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생도로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왕상19:16). 훗날 스승에 비하여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되는 엘리사의(왕하2:9-14) 선지자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필요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 나타나서 회개의 말씀선포와 물세례를 행할 때까지 약 430년 동안의 공백기간이 문제입니다. 오랜 세월 선지자의 맥이 끊어졌으므로 어느 선지자의 문하이며 생도였다는 신분증명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있어야 역시 누가 자신과 같은 선지자임을 알아보고 그 능력에 대하여 증언을 해줄 터인데 그 증거자가 부재합니다. 오로지 가능한 증거는 백성들의 증언뿐입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16:13-14).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해는 36개월에 이르고 있는 공생애 마지막 해입니다. 이미 두 해 전에 선지자로 불리고 있는 세례 요한이 갈릴리 분봉 왕 헤롯 안디바에 의하여 참수 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14:3-12). 이제 이 세상에 백성들이 선지자로 여기고 있는 자는 나사렛 예수에 불과합니다(21:11).

바로 그와 같은 시기에 예수님이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하며(21:23a) 장애자들을 낫게 해주자(21: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나선 것입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b). 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백성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냐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되묻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1:25a)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최고기관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대 공회입니다. 그들은 종교재판을 행하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유권해석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속국신세이므로 중요한 권한 두 가지가 없습니다; 첫째,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18:31). 둘째,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과 면직의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선지자가 없었기에 산헤드린 대 공회 내에 선지자가 없습니다. 자체 선지자가 없으므로 선지자 후보를 키워낼 수가 없으며 또한 누가 선지자인지 증명할 공식적인 방도가 없습니다. 설혹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세례 요한이나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공포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체 선지자를 보유하고 있지 아니한 대 공회의 발표를 어느 백성이 권위 있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산헤드린 대 공회가 비록 선지자를 양성해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말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예수님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너에게 말씀해석의 권한과 병 고침의 권위를 부여했는지 그 출처를 밝히라는 것입니다”(21:23).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와 능력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수도 없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5:19, 30, 36). 그 이야기를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는 정보원을 통하여 모두 듣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증인으로 불러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있는 교활한 자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바로 그러한 영적으로 교만하고 무례한 자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1:23-25a).   

참으로 지혜스럽게도 예수님의 반문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자신들이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는 사실 그러한 것입니다. 원수가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다윗 왕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7:15-17, 9:15, 35:8, 141:10). 그리고 훗날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하여 더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7:10), “유다 인의 대적 하만이 유다 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멸하려 하였으나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 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9:24-25).

사도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갈등과 고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침례의 권위가)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1:25b-27). 사람의 꾀로 하나님의 아들을 상대하려고 올무를 놓았던 자들이 스스로 그 올무에 발목이 잡히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두려운 심판으로 역사 가운데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교만한 행동이 예수님을 처형하고 훗날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차제에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서 유대교지도자들의 질문의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다고 한다면 정확한 간증을 하라는 것이며 사람으로부터 권위를 받았으면 어느 선지자로부터 양육을 받았는지 밝히라는 것입니다(21:23). 그러한 시비가 있을 것임을 미리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세례 요한을 처음 만나실 때에 물세례를 달라고 요청하십니다(3:13).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영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요한이 정중하게 거절을 합니다(3:1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3:15). 요한이 순종을 하고 세례를 베풀자 성령님이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영적으로 들려왔습니다(3:16-17).

그 대목의 기록이 본문의 내용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바가 있기에 선지자가 선지자를 양성할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유대교지도자들의 시비가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21:23-27).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만 옳다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람과 서로 협조를 하고 동역을 하며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역시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영적인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 권위는 하나님의 일을 올바르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를 대할 때에는 그 말씀의 진리성과 생명력에 유의하여 세상적인 시비를 자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대접하는 방법입니다(10:41).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여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서 강력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능력을 베풀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감히 시비를 걸어온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가 아니고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서 백성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고 하는 술책입니다. 본문은 그 작업을 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시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나 성직자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그 영적인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영적인 것이니 그 정체성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의를 계속 제기하다가 보면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실족하기 쉽습니다. 둘째, 신앙적인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말씀의 진리와 그 체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권을 쥐고 있는 집단들이 단체적으로 특정 종교인이나 성직자에게 종교적인 전통과 교리에 어긋나고 있다고 계속 이의를 제기하게 되면 그것이 이슈화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조직의 힘과 수적인 다수 그리고 장로들의 전통과 분별력 없는 여론에 밀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던 자들이 넘어지고 실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세속적인 도전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