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3강(마22:18-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0. 08:09

마태복음 강해 제143(22:18-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2(주일)

 

예수님을 시험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하여 보석과 같이 흘러나오자 그만 놀라서 떠나가다(22:18-22). 그 진리의 말씀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2:21)에 대한 묵상

 

유대교의 총본산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 공회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다릅니다. 백성들이 유대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산헤드린 대 공회의 결정에 따라서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은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입니다(26:57). 그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을 모세의 율법으로 지도하고 또한 감찰하고 있던 시대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본뜻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전통적인 유대교리와 상당히 다릅니다. 예를 들면, 오로지 한 분뿐이신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6:4) 전권을 위임 받은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5:17-29). 그 아들이 구원주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왔으며 바로 나사렛 예수 자신이라는 주장입니다(16:15-17, 3:16-18). 나아가서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창조주이며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3, 10:30).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운다는 주장입니다(2:19). 그리고 율법의 핵심규례인 안식일 규정을 예사로 어기고 있습니다(12:1-13).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해치고자 결심하고 모의를 하게 됩니다(12:14, 21:46, 22:15, 26:4, 14-16, 10:31, 11:50, 57).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2년만에 다시 방문한 나사렛 예수를 유대교지도자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에 꼬투리를 잡아서 그것을 빌미로 하여 체포를 하려고 합니다. 유대의 백성들이 누구나 수긍을 할 수 밖에 없는 큰 잘못이 예수의 말 가운데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수가 별로 나타나지를 아니하자 아예 하수인들을 보내어서 예수를 유혹하며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험의 과정 중에 보석과 같은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되 가이사(로마황제의 공통적인 이름, 시저에게서 유래가 되고 있음)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20-22)는 대목이 특히 그러합니다. 이제부터 묵상을 통하여 한번 분설(分設, 나누어서 설명함)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성전세로 내고 있는 은전(銀錢, 은으로 만든 엽전)을 하나 가져오라고 제자와 무리들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22:19a). 그러자 한 데나리온을 가지고 옵니다(22:19b). 그 은전에 어떤 형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지 보고서 누구의 것인지 답변을 해보라고 예수님이 질문을 합니다(22:20). 제자와 무리들은 자신 있게 동일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22:21a). 만약 같은 질문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답변은 어떤 것일까요?

세상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사색을 많이 했습니다. 그 결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는 지혜에 의하여 탄생했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법칙에 의하여 오늘 날도 자연적으로 섭리가 되고 있다”, “보이지 아니하는 도가 보이는 것의 실체이며 본질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도를 깨닫고 그 실상을 보게 됨으로써 득도를 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다”. 구태여 구분을 지어보자면 전자의 진술이 헬라 철학과 학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영지주의적인 내용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진술은 도교와 불교적인 색체가 짙은 것입니다. 하지만 양자가 모두 동일한 사유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제자나 당시의 유대교인들은 보이는 은전의 조각과 글만을 보고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은전 가운데 깃들어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지혜와 도를 전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보이지 아니하는 지혜와 도의 주인에 대해서는 감조차 잡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1-2). 겉으로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예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6:4-9, 22:37-40) 속으로는 그 분이 만물 가운데 항상 존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3:14, 11:6) 까맣게 잊어버리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기대에 너무나 못 미치고 있는 제자들과 유대교인들의 답변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질문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오늘 날에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날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의 것들을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가치를 세상의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돈으로 모두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치부를 하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주님의 실망이 크실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복음을 통하여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성경말씀에 대한 깨달음과(24:44-45) 창조주에 대한 인식이(1:1-14, 11:6) 전혀 없는 무늬에 불과한 성도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믿음이 별로 없는 제자들과 유대교인들의 모습을 보시고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알기 쉽게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1b).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 재화를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로마황제의 법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사용을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구분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나타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며, 세상황제의 것은 무엇일까요?그 구분이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어렵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통하여 생각하고 수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그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화두(話頭,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쥐고 있는 실마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왕 불교계의 수행자들이 좋아하고 있는 화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를 참고 삼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한국 현대불교의 고승(高僧)으로 알려지고 있는 성철 스님이 득도의 경지에서 한 마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마치 오도송(悟道頌, 득도의 경지에서 부르고 있는 깨달음의 노래)과 같은 그 말의 이치는 산과 물의 경계와 구분을 드디어 알았다는 것입니다. 물은 계속 흘러가는 것이지만 산은 세파를 이기면서 그냥 우뚝 버티고 서있는 존재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고승(高僧)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늘의 도를 얻고 싶어하는 수도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세상과 세월 속에 매몰되지 말고 부디 변하지 아니하는 진리를 깨달아서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외침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나 유대교인들은 세상사람들과 달리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계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산 위에 강림하시는 창조주 여호와를 만나고 싶은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백성들이 높은 산 위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후 광야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백성들이 시내 산 위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게 되자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천둥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번개가 땅을 가르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강림을 계속 쳐다보다가는 그 번개가 자신들을 갈라버릴 것만 같습니다. 산 정상에서 갑자기 큰 나팔소리와 같은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귀에 큰 진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 전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백성들은 두렵습니다. 그 음성을 계속 듣고 있다가는 자신들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오장육부와 뼛속을 파고 드는 그 진리의 말씀 앞에 마치 발가숭이와 같은 영혼으로 서있기 때문입니다”(19:16-19, 4:12-13).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지자 모세를 붙들고 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 혼자서 하나님의 산 정상에 올라가서 죽든지 살든지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와서 우리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살겠고 그 전해주는 말씀대로 그대로 틀림없이 지키도록 하겠습니다”(20:18-21). 그 결과 모세만이 높은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비겁하게도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산 아래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24:1-8). 그것은 산이 아니라 물에 더 익숙한 세속적인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아니하자 큰 실수를 합니다(32:1).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잘못 섬긴 것입니다(32:2-6).

하나님이 드디어 그 처방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산이 아니라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성막에 거처하시겠다는 것입니다(25:8-9, 22, 40:33-34). 그 성막이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습니다(왕상8:6). 유대교인들은 더 이상 산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왕상8:10-11).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자가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지성소에는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16:29-34). 휘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그 휘장을 젖히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다가는 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시자 그 휘장이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27:51). 대제사장과 제사장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서 남은 인생을 주님을 모시고 그 지체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습니다(2:1-4, 고전6:19-20). 지성소가 아예 성도의 속사람 속에, 그 영혼 속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8:9-17).

그와 같은 역사가 있을 것임을 모세가 이미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 죽기 전에 그의 유언과 같은 글 신명기를 기록하면서도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라 할 것이 아니오,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라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30:11-14). 예수님의 공로로 성령님이 오셔서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임재하셔서 오늘 날도 역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모세가 벌써 미래를 내다보고서 예언을 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것 가운데 가이사의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도 포함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이 다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가이사에게 세금으로 바쳐야 되는 부분이 있고 또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내놓아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서 재화를 사용하게 됩니다. 국가에 내는 세금을 아까워하지를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재화를 아까워하지 않게 됩니다. 성도의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이 그와 같은 입장에서 달란트의 비유’(25:14-30)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상세는 앞으로 저술하게 될 그 대목에 대한 강해내용을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자 합니다. 성도들은 처음에는 산과 물이 다르듯이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인 줄 알고서 성도의 삶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깊어지고 자신의 인생이 종말을 향하여 달려갈수록 가이사의 것인 줄 알았던 것들조차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드디어 자신의 인생과 생명조차 모두 하나님의 것인 줄 알게 되면 마침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 하나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성화의 과정이 깊어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영혼 속에 내주(內住)하여 성도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주하심이라고 하는 임마누엘의 은혜 그리고 겨리라고 하는 멍에를 예수님과 같이 매고서 발걸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인생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동행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있습니다(11:28-30, 8:35-39).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성도들의 삶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