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6강(마22:33-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1. 00:26

마태복음 강해 제146(22:33-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5()

 

예수님이 부활의 능력과 관련하여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자 사두개인들이 크게 놀라 감히 예수님을 더 시험하지 못하고 물러나다(22:33-34).

 

사두개인들이 물러난 이유는 예수님의 답변 가운데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는 말씀과 관련된 사항. (2)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30)는 말씀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첫째로, 사두개인들은 유대교의 교권을 쥐고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명실공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유대교의 기초가 되고 있는 히브리정경에 대해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지적에 대해서 그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동안 모세오경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지도자 행세를 버젓이 했던 그들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정경에는 모세오경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서, 역사서, 시가서 또는 성문서가 많이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부분만을 알고 있으니 지도자 행세를 하기에는 성경말씀에 있어서 부족하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부활의 이슈가 그러합니다. 그들 사두개인들은 선지서와 시가서에 실려 있는 그 내용을 아예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욥기 제19, 에스겔 제37, 시편 제116편 등만 간단히 살펴보아도 부활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대목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신앙은 결국 모세오경의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창세기를 믿지 아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창세기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력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가 계속 자신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창조만 해놓고 그냥 물러나서 간섭을 일체 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특히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을 감찰하고 규제하는 모든 권한을 자신들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전부 위임을 시켜놓고 그냥 두 손을 놓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그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더 이상 세상일에 간섭을 아니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두개인들이기에 당연히 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두개인들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대하여 일침을 놓고 있습니다; “부활을 하게 되면 여러 남편을 섬긴 적이 있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자손들에게 이미 상속이 되어버린 재산은 또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대혼란이 야기되는 세상을 질서의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다”(22:24-28).

사두개인들이 굉장히 현실적이며 똑똑한 논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러한 논리로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22:23-28) 그들은 평소에도 그 이치로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공박하고 조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감히 예수님 앞에서조차 그들의 논리가 통할 것으로 생각하고서 시험을 한 것이 잘못입니다.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22:29-32). 그들 사두개인들의 하나님 신앙의 허구성이 일시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말문을 닫고서 물러나고 있습니다(22:33-34). 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지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천사들과 같은 영적인 몸을 입고서 부활을 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만드시면 그것은 영적인 몸이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적인 몸을 만드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에 대하여 만약 이의를 제기하게 되면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하나님만을 믿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의 관심은 온통 현실적인 종교적 권력의 장악이며 물질적인 세계를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에게는 영이신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직전입니다. 그래서 아예 말문을 닫고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 더 이상 항변을 하고 시험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오로지 물질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측면에서만 사유하며 고찰해왔던 사두개인들의 신앙상의 허점이 한 없이 부끄럽게 드러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칼날과 같은 지적은 당시에만 국한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들이 만든 별볼일이 없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 그들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라고 사도 마태가 본문을 기록으로 자세히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교대로 예수님에게 보내어주고 계십니다(22:34).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22:35). 그와 같은 어려운 설정(設定, setting)과 무대를 제공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진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문답(問答,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2) 말할 수 있는 상대방,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진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반응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서로 문답을 주고 받으면서 그 진리성이 뚜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흔히 서양철학의 시조가 소크라테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질문과 답변이라는 대화형식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다듬어나가는 방법을 가장 먼저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사람의 지혜는 그렇게 전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소크라테스가 먼저이며 또 체계적인 사유의 결과물이 남아 있으니 그가 비조(鼻祖, 맨 처음 조상)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서 창조가 되어 있는 아담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2:18, 20). 그가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처하고 있는 에덴동산에서도 그러합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서 하나님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방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이 그러합니다(2:19). 그러나 가축이나 동물만으로는 그 허전함을 모두 채울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담과 똑 같은 반려자를 만들어주자 그 허전함을 면하고 있습니다(2:20-25). 과연 아담의 경우에 국한이 되고 있는 이야기일까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그 형상과 모양이 닮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1:26-27, 2:7). 그러므로 아담이 느끼고 있는 그 허전함을 영이신 하나님께서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허전함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채우고 계실까요? 창세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현신을 하시고 있으며 일부러 아브라함을 찾아오고 있습니다(18:1-8). 그리고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18:9-15). 더구나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계획을 일부러 알려주시면서 다시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18:17-32). 아브라함의 중보자적인 입장을 전해 들으시고 하나님은 스스로 정책에 끝까지 반영하고 계십니다(18:32). 그리고 나서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 올라가십니다(18:33).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도 벧엘에서 그러합니다(35:33).

아버지 하나님은 성육신한 아들 예수에게 많은 사람을 붙여주고 있습니다(6:37). 그리고 계속 보내어주고 있습니다(6:39). 그들 모두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 영혼을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6:38, 40). 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제자나 지지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자 나아가서 서로 죽고 죽이자는 반대자도 있습니다(21:23, 22:15, 23, 36).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편하게 만들어주자면 사전에 다른 생각을 가진 자나 반대자를 모조리 제거를 해주면 좋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단순히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가 돋보이게 만들고자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목적 외에도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반응을 살핀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찬성만 하고 지지를 보낸다고 하면 시시하고 허무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때로는 반대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반응이 시끄러울 수록 살아있는 무대입니다. 그와 같은 설정이 진실로 일할 만하고 살 만한 세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지켜보고 계시며 때로는 현신도 하시고 성육신을 하신 이유가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시종일관 이의를 제기하는 자와 반대자를 용납하고 대화하며 포용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