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48강(마22:34-40, 막12:28-3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1. 23:01

마태복음 강해 제148(22:34-40, 12:28-3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27()

 

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하고 있는가? (22:34-40, 12:28-34, 10:25-28).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끈질기게 시험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복음운동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율법해석과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는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의 해석이 다르다고 하면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이 되어버리게 되면 처단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감히 나서서 예수님을 지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율법의 대가(大家, 뛰어난 성취자, a great master)인 율법사를 시험의 대표로 예수님께 보내어(22:34-35) 율법의 근본취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답변이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 및 계명을 중시하는 관점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서기관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은 심히 만족해하고 있습니다(22:35-40).

그 사실을 공관복음의 저자 세 사람이 모두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된 내용이 상당히 다릅니다. 왜 그렇게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술을 하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같은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공관복음 세 저자의 입장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2:34-40, 12:28-34, 10:25-28). 그 점에 대해서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공관복음 가운데 마가복음의 기록이 그 사건의 진술에 있어서 가장 완벽합니다; (1) 서기관이 나서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12:28). (2) 예수님이 신명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 쉐마의 말씀을 가지고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6:4-5, 12:29-30). 그 다음에는 레위기 제19장의 말씀을 가지고 이웃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9:18, 12:31). (3) 서기관이 대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 사무엘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옳다고 맞장구를 치고 있습니다(삼상15:22, 12:33).  (4) 예수님의 칭찬이 뒤따르고 있습니다(12:34).

더 이상 빼거나 보탤 필요가 없는 완벽한 기록입니다. 그 이유는 마가가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며(벧전5:13) 사도 바나바와 바울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13:4-5, 15:37마가라 하는 요한).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도들에 의하여 양육이 되었기에 마가의 기록은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편파적이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장 처음 저술된 마가복음의 기록을 참고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서로 다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둘째로, 사도 마태는 마가복음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1) 서기관을 율법사라고 적고 있습니다(22:35). (2) 예수님이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쉐마를 빼고서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22:37). 그리고 역시 레위기 제19장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22:39). (3) 두 계명에 대한 강조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있습니다(22:38, 40).

따라서 세 가지 의문사항이 드러납니다; 첫째, 왜 서기관을 율법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둘째, ‘쉐마의 첫머리를 왜 생략하고 있을까요? 셋째, 서기관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까지 마가복음에서는 밝히고 있는데 사도 마태는 왜 그 사실을 생략하고 있는 것일까요?

(1)  당시 서기관이라는 용어와 율법사라는 용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의사 누가가 서기관을 율법교사’(10:25) 또는 교법사’(5:34)라고 부르고 있으며 예수님은 서기관인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3:10)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어의 통일을 기한다고 한다면, 일반적인 율법선생을 랍비, 랍비로서 명망이 높아 산헤드린 대 공회에 참여하고 있는 율법학자를 서기관으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  사도 마태는 쉐마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6:4)라는 구절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마태가 이미 선민사상과 유대교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스승 예수님과 함께 36개월간의 공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목격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체험하고서 초대교회의 형성에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마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사실은 그들만의 여호와가 아니고 만민의 여호와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3)  사도 마태는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꼽고 있는 산술적인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까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설명하고 나아가서 진리의 성령님이 오셔서 성부와 성자의 말씀을 하나의 진리로 증거하는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환언하면 사도 마태는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을 가지시고 삼위일체의 신비로 존재하고 동시에 역사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산술을 초월하고 있는 차원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쉐마의 첫 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  예수님의 답변은 서기관이나 율법선생들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이나 계명의 뜻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경지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서기관의 확인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 넘쳐 나오고 있는 이웃사랑의 경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율법행위의 경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가운데 그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10:29-37). 따라서 율법과 계명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진리의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진리의 성령님의 능력주심이 필요합니다(24:49, 16:13-14, 1:8). 그러한 고차원적인 복음의 이해를 가지고서 사도 마태가 벌써 율법에 그치고 있는 서기관의 동의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의사 누가는 어떻게 적고 있는 것일까요? 그 특징이 무엇일까요? 의사 누가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물으면서 율법과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시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10:25). 그 순간 예수님의 지혜가 번쩍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에 앞서서 상대방의 견해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10:26). 율법교사는 자신의 견해를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습니다; “마음, 목숨, , 그리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10:27). 예수님이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10:28). 조금 더 따져보고자 합니다;

(1)  의사 누가는 교포 유대인입니다. 시리아 안디옥 출신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는 헬라세계에서 의학을 공부한 의사입니다. 한 사람의 과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저서가 뛰어난 증거력과 문장력을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의사 누가는 헬라의 철학과 학문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와 신앙에 있어서도 일반성과 객관성을 중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답답한 유대인들만의 국수주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니라 헬라인이나 로마제국의 여러 민족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만민구원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의사 누가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면 과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고 있는 영생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질문을 대신하고 있는 자가 본문에서 어떤 율법교사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문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쉐마의 본론(6:5)에 없는 용어가 더하여져 있습니다; “그 용어가 바로 목숨입니다”(10:27). 그 용어는 같은 대목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마태의 글과 마가의 글에도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22:37, 12:30).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끔찍한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3)  이 세상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영생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 교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16:26). 그것이 바로 사람이 목숨을 바치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점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끝으로, 바리새인들의 히브리정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과 달라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바리새인들은 평생 동안 히브리정경을 연구하고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정경연구에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히브리의 전승 특히 위대한 조상들의 신앙과 깨달음의 내용들을 참조하여 정경본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풍성한 주석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히브리정경을 해석하는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2)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오는 동안에 그들의 히브리정경의 기록보다 더 풍성한 자료를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39권 히브리정경 외에도 하나님을 경험했던 수 많은 조상들의 이야기가 단지 암기력으로 또는 기록으로 전승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경험의 이야기도 있지만 히브리민족인 이스라엘이 떠돌이 민족으로서 경험했던 수 많은 이야기들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3)  그런데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선지자적인 삶을 살아갔던 조상들이 이방인인 원주민들의 도전을 어떻게 극복해내었던가 하는 내용은 시간이 지나자 하나의 선민사상으로 변질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경험했던 출애굽의 기적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특별한 선민의 나라의 탄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어느 사이에 이방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제국의 건설로 왜곡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와 같은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까지 500년 이상 외세의 지배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나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유대 땅에 보내어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00년 이상 메시아는 물론이고 선지자조차 보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선민사상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한 미묘한 시기에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세간(世間, 세상 중)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가는 곳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5)  하지만 엄청난 문제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신앙상의 불일치가 발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민에게 주신 독특한 하나님의 선물, 예를 들면 할례, 율법, 성전, 안식일 등의 의미를 나사렛 예수가 달리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선물을 풍성하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만민의 생명을 구하며 대속의 제사를 드려주라는 것이라는 외침입니다”(9:13, 25:40, 3:4, 3:16-17).

(6)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사상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어긋나고 있는 창조주의 만민구원사상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정서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치유사역을 해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선민의 독립과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 온 메시아가 아닙니다. 자칭 메시아라고 하지만 가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체를 밝혀서 모든 유대인들이 알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당면과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