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1강(마23: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4. 15:24

마태복음 강해 제151(23: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30()

 

예수님이 유대교인들인 백성들 앞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잘못을 강하게 질책하게 되면 어떠한 불이익을 받게 되는가?(23:1-2)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과 처형을 각오하면서 왜 그와 같은  강도 높은 비판을 행하고 있는가?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유대교지도자들의 견제와 이의제기가 얼마나 대단했던가 하는 사실을 제21장과 제22장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면 예수님이 그들을 더 자극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넉넉히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한 판국에 예수님께서는 제23장에서 마치 융단폭격과 같은 공격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퍼붓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자신의 명을 재촉하고 있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왜 그렇게 목숨을 걸어놓고 그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그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자들이 유대교의 이론제공자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목숨을 걸어놓고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부디 깨닫고 바로 잡으라고 애타는 심정으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는 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그 정도입니다(18:11-12, 10:3).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회개하고 고쳐야만 하는 점이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논리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습니다(1:1-2, 4:24, 11:36, 1:8).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은 오늘 날 전 세계의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공간적인 넓이 그리고 선포된 그 순간부터 모든 후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적 길이를 전부 포용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19). 예수님은 그들 모두의 하나님 신앙을 똑바로 세우고 그 생명을 구원하고자 본문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은(4:23) 말씀사역과 이적사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이적사역은 주로 백성들의 병을 고치고 장애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4:24). 그 밖에도 드문 경우이지만 예수님이 하늘곳간을 열어서 먹을 것을 회중들에게 내려주는 기적이 두 번 있으며(14:19-21, 15:36-38) 죽은 자를 살려낸 경우가 세 번 있습니다(9:24-25, 7:11-15, 11:39-44). 그와 같은 이적사역은 창조주의 말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16:20).

이적사역이 말씀사역을 뒷받침하고 있는 증거로서 일종의 수단이라고 한다면 복음사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말씀사역에 있습니다. 그렇게나 중요한 말씀사역은 또 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모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풀이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의 깊은 뜻을 공생애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교육의 경우에는 대외적으로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복음선포의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풀이하여 그것을 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선포하며 가는 곳마다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서 백성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받아온 율법의 가르침과 그 해석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율법선생들인 랍비들이 먼저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해명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주로 이론적인 측면에서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면(15:1-2, 19:3)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같은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측면 곧 이적을 행하는 능력과 그 권위의 기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1. 21:23).

그와 같이 유대교의 지도자 그룹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의제기와 견제가 더 한층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해 동안 변방 갈릴리에서만 복음사역을 하고 있던 나사렛 예수가 돌연 예루살렘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21:1-8). 그리고 대대적으로 복음전파에 나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내에서도 백성들의 지지가 많아지고 있습니다(21:8-11, 46). 인근 마을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되살려낸 이야기가 이미 예루살렘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따르는 표적이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권위 있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12:17-19). 그래서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일행과 백성들을 갈라놓고 예수를 꼼짝없이 체포하여 처치를 할 수 있는 묘수를 발견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26:3-5).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미묘한 시기에 예수님이 목숨을 걸어놓고서 많은 백성들 앞에서 담대하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하는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23:1-2). 마치 그것은 타고 있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