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3강(마23: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6. 01:51

마태복음 강해 제153(23: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를 탐하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모순에 대하여(23:2-7)

 

예수님은 새로운 포도주와 새로운 가죽부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9:17). 그 비유의 뜻은 새로운 그릇이 준비가 되어야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담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비유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제자와 모인 무리들에게 주고 계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23:1-7)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1)   제멋대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낡은 가죽부대에 해당이 됩니다(23:2). 그러므로 그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옛날 언약과 구별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공생애와 대속의 죽으심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새로운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선민과 이방인 구별이 없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는 자를 모두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의 뜻을 따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권능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시키듯이 자신을 부인하고 남은 인생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부활시킨다는 약속입니다(16:24, 고전15:20-23). 셋째, 그와 같은 사실을 성도들이 진리로 믿고서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 일이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가능해진다는 예언입니다(24:49, 14:16-20, 16:13-16).

(3)   그렇지만 오래된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라고 하여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말씀을 파수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쓸모가 충분히 있습니다(9:4-5, 15:27). 그 점을 알고서 그들의 율법선생들인 바리새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23:3a).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를 말아야 합니다(23:3b).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말씀과 행동의 불일치라는 모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상과 같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서 본문의 말씀을 다시 들여다보면 서기관과 랍비들의 행태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언행(言行, 말씀과 행동)의 불일치(不一致, 서로 맞지가 않음)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23:3).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그 말씀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키지 아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를 상정할 수가 있습니다;

(1) 학문과 삶과의 분리현상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승으로부터 하나의 종교적인 학문의 체계로서 배우고 있습니다. 사실 방대한 규모의 히브리 사상과 전승 그리고 고대 언어학적인 해석까지 두루 반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해석과 주석은 젊음을 바쳐서 배우고 그 성취를 자랑할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대학에서 박사들이 학문을 다루듯이 랍비들이 배우고 터득한 그대로 율법을 백성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학문이 자신의 삶의 태도까지 지배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렇다면 언제 학문의 대상이 아닌 영적인 진리가 나타나서 구도자의 삶까지 지배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와 같은 삶의 모범을 보여야만 합니다. 그때까지는 유대교 내에서 말씀의 육신화가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1:14).

(2) 선생역할을 오래 담당하다가 보니까 그만 일종의 좌식계급’(坐食階級, 차려다 주는 밥상만 받고 있는 양반계급)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동시에 그것을 준수하는지 아니하는지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일에는 능숙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는데 있어서는 서투르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선생이니까 항상 예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위 좌식계급이라는 특권을 가진 부류 곧 종교적인 귀족이 되고 만 것입니다.

둘째로, 책임을 회피하고 권리만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23:4).

(1)    좋은 예가 있습니다; “지휘관이 참모로부터 결재서류를 받아서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기안의 내용대로 시행은 하여야 하겠는데 잘못되는 경우에는 돌아올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래서 한 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결재는 내가 하지만 시행에 대한 책임은 귀하가 지도록 하게!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책임과 권한의 분리현상이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2)    실제로 서기관과 랍비들이 유대교인인 백성들에게 율법교육을 시키고 있는 대목이 그러합니다. 모든 율법내용을 전부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전부 준수하라고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지식을 전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준행의 무거운 책임은 전부 백성들에게만 지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율법을 위반했을 경우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그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외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만 율법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신들은 감독과 심판의 권리를 누리고 있으니 권리와 의무 사이의 불균형이 심각한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을 포장하는 외식주의(外飾主義, 겉만 치장한 것)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經文, 쉐마)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23:5).

(1)  종교적 외식주의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 속 하나님 경외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신앙과 종교적 행위를 중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 곧 율법선생과 학자들이 백성들 보기에 믿음이 좋고 신앙심이 깊다고 하는 평가를 받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는 이레(7일 또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2).

(2)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속이 텅 빈 사람일수록 화려하게 차려 입고서 출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선생과 학자들이 그러합니다. 제사장과 같은 거룩해 보이는 옷술을 단 긴 옷을 입고 쉐마를 넣은 상자를 넓은 띠로 휘감고서 백성들 앞에 나서고 있습니다(23:5).

(3)  오늘 날은 개인의 신분이나 출신성분보다는 능력과 실적을 중시하는 사회이므로 소위 스펙’(specification의 준말, 학력이나 경력을 말함)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가짜 학위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영적인 지도자들까지 그러한 세태에 휘말리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오늘날에도 종교계가 외식주의에 물이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출세지상주의(出世至上主義,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출세를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23:6). 잔치의 윗자리는 상석(上席, head-table)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회당의 높은 자리는 종교적으로 가장 존경을 받는 장로의 자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동시에 종교적으로 장로의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명예욕과 더불어 출세욕이 대단합니다. 기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에 전심전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그들은 사회적인 세력과 종교적인 영향력을 크게 갖고 싶어하고 있으니 그것이 이른 바 외화내빈’(外華內賓,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빈약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원로와 선생으로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7).

(1)  시장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문안인사를 먼저 받는 사람이 지역사회의 원로입니다. 그리고 랍비는 유대교의 선생이므로 회당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율법선생의 칭호입니다. 지역사회에서는 원로대접을 받고 회당 내에서는 율법선생으로 불리고 있으니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기에 열심이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대신에 스승으로부터 유대교의 학풍을 물려받기에 열심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극이 있습니다.  유대교의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이라는 풍성한 꼴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0:10). 그 대신에 바리새인 랍비들로부터 율법교육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을 존경하고 있으니 그것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