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60강(마23:36-24: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8. 18:14

마태복음 강해 제160(23:36-24: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8()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과(23:36-24:2) ‘포도원농부의 비유’( 21:33-46)

 

  사도 마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강력하게 질책하신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 제23장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책이 말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에게 위해(危害, 위험과 해로움)를 가하게 되면 역사적인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땅과 성지 예루살렘 그리고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이 모두 황폐화되고 말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근본적으로 무엇을 잘못했기에 회개를 하지 아니하면 그와 같은 엄청난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바 있는 포도원농부의 비유와 더불어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있는 유대교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본래 유대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준 모세의 오경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이후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등장하여 유대교의 뿌리를 튼튼하게 했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교의 전통에 비추어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특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 백성들에게 직접 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만든 히브리정경에 대한 주석과 히브리사상에 비추어서 학문적으로 해석을 하고 실생활에 율법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선지자가 없던 시대에 등장하여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들의 지혜와 학문적인 지식의 체계화로 대신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배우는데 있어서도 사람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지런한 학문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모두 깨닫고 실천할 수가 있다고 자만을 하는데 있습니다.

셋째로, 더 큰 문제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신앙생활이 외식적이라는 것입니다;

(1)   겉으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우러러 섬기고 있으며 그 말씀을 모두 순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겸손하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감히 창조주의 지혜 앞에 내세우는 것은 욥의 깨달음 그대로 죄인의 모습입니다(42:3-6).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2)   어리석은 백성으로부터 율법의 선생이며 학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그 상대적인 우월감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만 눈이 멀어 있습니다(23:16). 그래서 그것을 절대적인 의로움으로 착각을 하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 감히 선민의 특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축복은 모두 선민의 것이며 저주와 멸망은 죄인인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만든 아전인수격인 이분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르짖고 있는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율법해석이 먹히고 있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배척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3)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히브리정경에 모두 들어 있으며 그것을 그들은 사제지간에 백 년 이상 연구하여 이미 주석을 만들었기에 그것만 율법체계로 실생활에 적용시키면 선민으로서 넉넉히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기업을 차지할 수가 있다고 자신만만합니다. 요컨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이 별로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겉으로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척 하고 있을 뿐입니다.

(4)   사람들 눈 앞에서만 거룩하게 보이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극입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이중인격적인 신앙생활은 생각보다 전염성이 강합니다. 마치 전염병과 같은 그것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6:6, 11-12). 크게 오염이 되어 함께 타락하고 있는 유대백성들이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마침내 선지자로 보이는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바리새파 사람들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7-10).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메시아로 백성들에게 소개를 한 바 있는 나사렛 예수도 바리새파 사람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23:25),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3:33),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33:35-36).

예수님의 말씀은 첫째,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생활은 지옥의 판결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둘째, 유대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종교생활을 추종하게 되면 그들이 자랑하는 선민의 예루살렘과 성전이 역사적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을 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23:33-24:2).

다섯째로,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도대체 바리새파 사람들의 종교적인 행위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고 있는 것일까요? 지옥의 판결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그들의 잘못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것일까요?

(1)   외식이라고 하는 것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가식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율법을 철저하게 준행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치고 안식일을 준수합니다. 성전제사도 절기를 따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릅니다. 모든 종교적인 예배와 율법적인 생활이 일종의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그 속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가 들어 있다고 마태복음 제23장에서 예수님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23:25). 여기서 탐욕과 방탕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2)  탐욕은 탐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방탕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휘두르고 낭비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탐을 내지 말아야 되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창조주의 자리입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를 침범하게 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처벌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탕자와 같이 방탕한 존재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15:11-13). 그런데 히브리전승에 따르게 되면, 미와 찬양의 천사장 루시엘이 스스로의 보좌를 창조주만큼 높이고자 하다가 타락을 하고 방탕한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14:13-15).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루시퍼곧 사탄의 탄생입니다.

(3)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탐욕과 방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대신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본래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사자로 사용을 하실 때에 부여하여 주시는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위임, 곧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감동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자로 자처를 하게 될 때에 문제가 크게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가 행하고 있는 일을 바리새파 사람들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4)  사람의 지혜가 집대성되고 사람의 지식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면 능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해석을 할 수가 있다고 자신하면서 속으로는 외식과 방탕한 삶에 빠지게 됩니다(23:27-28, 16:14). 히브리정경에 대한 철저한 주석을 만들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수칙을 상세하게 만들어서 생활화하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모두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5)  그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기 쉽게 예수님께서 이미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포도원농부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원을 건설한 주인이 외국으로 떠나면서 농부들에게 경영을 위탁했습니다. 수확 철이 되자 종을 보내어서 세를 받도록 했습니다. 주인이 멀리 타국에 있으며 돌아오지 아니할 것으로 판단하고서 농부들이 거절을 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종을 해쳐버립니다. 주인이 계속 종들을 보냅니다. 결과는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완벽하게 주인을 대신하고 있으므로 아들의 말은 들을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산입니다. 아예 포도원의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버림으로써 영구히 그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획책을 합니다. 그 반역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21:33-40).

(6)  유대교지도자들의 답변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에게 세로 줄지니이다”(21:41). 그들이 말한 대로 유대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해치게 되면 그와 같은 멸망의 역사가 유대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3:36:39).

(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들이므로 율법을 지키는 시늉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사고와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180도로 회개를 하고서 만민구원을 위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할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들에게 미치게 될 것입니다(23:39). 그때까지는 선민의 전당인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 자랑을 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가 철저하게 붕괴되는 역사만이 되풀이 될 따름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4:1-2).

결론적으로, 예수님 말씀의 여운은 거의 2,100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위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속하는 것을 대신하고자 하는 탐욕이 있는 한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한 역사가 계속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