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59강(마23:29-3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28. 18:12

마태복음 강해 제159(23:29-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7()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예수님의 근거는 또한 무엇인가?(23:29-36)

 

본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23:29a), 곧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결백을 역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바리새파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세워서 그들의 선하고 의로운 행적을 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23:29b). 둘째, 선지자들이 활동했던 그 옛날 시대의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들을 탄압하고 죽였지만 후세대에 속하는 그들은 그러한 잘못을 전혀 행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혹 자신들이 그 옛날 세대에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끔찍한 행위를 결코 범하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소위 확신에 찬 주장입니다(23:30).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예수님의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리새파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유대교지도자들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23:31). 그 말씀은 조상들의 악한 행실을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러하기 때문에 이제 옛날 조상들과 똑같이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23:32). 이미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습니다(23:13, 23, 25, 27). 구체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겉으로만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고 안으로는 모든 더러운 것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27-28). 그 점이 그 옛날 유대교지도자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지금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있으며 장차 그 옛날과 똑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23:32-34).

좀더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1) 사람들은 겉으로는 선하고 의로운 척 행동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끝까지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한 바 있는 옛날 선지자들과 의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서 그 뜻을 크게 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위선적(僞善的, 겉으로만 선한 척하는)인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그 반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여전히 그 마음 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해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원수까지 용서를 하라는 것인데(5:43-48, 12:11-12, 16:24, 6:38-39) 어떻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체적인 경우 이해관계가 상반이 될 때에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만약 선지자들의 주장이 그들의 발목을 잡을 경우에는 아예 죽여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은 옛날 선지자들을 탄압하고 죽인 조상들의 행위와 전혀 무관하다고 발뺌을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사실 근거가 있습니다; “보통 바리새파의 시작을 주전 2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활동한 시기에는 유대 땅에 선지자의 활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선지자를 대항한 적도 박해한 적도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400년이 지나도록 유대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특이한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나지 아니한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선지자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요단 강가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입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이 조용하게 유대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지켜보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없어도 유대교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외에 있는 회당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토 유대인들과 교포들이 모두 율법생활을 예전처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그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심을 끌만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문제점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본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그 질책을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은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누룩과 같다고 보고 있습니다(16:6, 11-12). 그러므로 이제 두 가지 사실을 따져보고자 합니다; 첫째,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앙행태는 왜 위험한 것일까요? 둘째, 예수님은 그것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끝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1)  그와 같은 잘못된 신앙행태는 태초의 타락의 원흉인 뱀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상들을 통하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까지 흘러오고 있는 것입니다(3:1-6, 23:32-33a). 그러므로 종말적인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23:33b). 그만큼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은 위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3:16-17).  

(2)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되면 당장 역사적인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21:37-41, 23:34b). 그 결과 40년 후에 바리새인들의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23:36-38).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부활하신 주님이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예전처럼 선지자들과 지혜자들과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서기관들을 이 세상에 계속 보내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11:27, 23:34a). 그러나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계속 정죄하고 박해를 하게 되면 회개할 때까지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23:39). 아울러 역사적인 처벌도 받게 됩니다. 그때는 그 옛적부터 모든 의인들의 무죄한 피를 흘린 죄값을 한꺼번에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23:34c-35).

(3)   특이하게도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창세기에 기록된 아벨의 피값부터(4:10-11) 역대하에 기록된 사가랴의 피값까지(대하24:17-22) 모두 물리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생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지만 그만 예수님을 그들 선민의 유대교리를 어기고 있는 이단이라고 정죄를 함으로써 십자가처형의 길로 인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생 가운데 만나는 그때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아니하느냐 그 선택에 따라서 인생과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4)  달리 표현하자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들의 종교적인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을 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23:35-36).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바리새파의 논리에 물들어 있는 그러한 세대에 속하지 아니하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을 참고삼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