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비 이야기(손진길 소설)

허굉필(許宏弼) 허선비 이야기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3. 7. 14. 15:52

허굉필() 허선비 이야기1(손진길 소설)

 

1.    허선비라고 자신의 이름을 개명하고 있는 허굉필()

 

허선비의 본명은 허굉필()이며 그의 본관은 김해이다. 그런데 그는 40대 중반의 한창 나이에 과감하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낙향을 한다. 그리고 고향 김해를 떠나 당시 경주로 불리고 있는 그 옛날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로 이주하여 오래 살고 있다.

당시 19세기 후반 경주에는 김해 허씨가 하나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러나 허굉필은 경주의 친척들과 전혀 내왕을 하지 아니하면서 시골로 들어가 산으로 둘러싸인 월성지역 내남에서 은둔생활을 고집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본명을 감추고 그 대신에 허선비라고 이웃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 점이 이상하여 이웃들이 처음에는 그에게 본명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허굉필은 정색을 하고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저는 김해 허씨입니다. 부모님이 조선말로 선비라고 작명하여 주었기에 지금도 그렇게 이름자를 사용하고 있지요!... ”.

당사자가 그와 같이 대답하고 있으므로 이웃사람들이 허선비라고 그를 불러오고 있다. 그렇게 경주 월성의 시골 내남에서 35년 세월을 선비답게 지낸 허굉필80세를 향유하고 190312월 하순에 별세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허굉필은 조선조 순조 시대인 182311월 하순에 김해에서 태어났으며 고종 시대인 1903년에 별세한 것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허굉필은 조선의 헌종 10년인 1844년에 약관이 겨우 지난 젊은 나이로 과거시험을 치르고 당당하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렇지만 한양의 조정에서는 임금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대단하기에 중앙에 발판이 없는 허굉필은 한성부에서 미관말직으로 지내다가 나중에 먼 지방의 수령으로 전전하게 된다.

그렇게 20여년의 관료생활을 지낸 허굉필은 모종의 결심을 하고서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만 관직을 버리고 경주 월성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시골 내남(內南) 지역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쭈욱 살아간 것이다. 참고로 내남의 앞산을 넘어가면 울주군이 나타난다.

그렇게 조선시대 말엽을 살아간 허선비 허굉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유는 21세기가 시작되자 그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서적 한권이 세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름하여 허선비 이야기이다. 한글로 기록되어 있는 허굉필의 비망록에 과연 어떠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일까?

가장 먼저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목이 허선비가 주장하고 있는 자신의 등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1844년 가을 한양에서 개최가 되는 대과에 응시했다. 그해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알려지지 아니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에 남는 인물이 그해의 급제자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남해안에 가까운 허굉필의 고향 김해에서 천리길이 넘는 조선의 왕도인 한양까지 도보로 가는 것은 매우 고단한 일정이다. 서두르면 20일 천천히 가면 한달을 잡는 긴 여정이다.

그렇지만 20세가 겨우 지난 젊은 선비인 허굉필은 청운의 꿈을 품고 있기에 험한 추풍령을 넘어서 줄곧 한양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결과 그는 20일만에 한양 땅을 밟는다.

막상 왕궁에 들어가서 대과를 치르게 되자 허굉필은 쾌재를 불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제가 우연히 시제로 출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객관적인 자료를 먼저 제시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피력하고 일목요연하게 결론을 맺었기에 당시에 장원급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채점결과는 차석에 머물고 말았다. 장원은 안동 김씨 가문의 젊은 선비 김호선(金好善)이다. 그해 22세인 김호선은 장원을 하였으며 그 집안의 위세가 대단하다. 그가 처음 받은 품계는 종6품인 참상관이다. 그에 비해 한양에 별다른 뒷배가 없던 허선비는 전체 차석이라고는 하지만 그 품계가 종8품에 불과한 참하관이다.

쉽게 말하자면 김호선주부(主簿)로서 그 벼슬이 외직이면 현감(縣監)에 해당한다. 그와 달리 허선비봉사(奉事)로서 그가 장차 주부가 되자면 4단계나 승진을 거듭해야 한다;

 따라서 허선비는 한성부에서 근무하면서 착실하게 승진을 계속하고자 필사적이다.

그런데 허선비가 한양에 살면서 한성부에서 관료생활을 하게 되자 좋은 벗들을 사귀게 된다. 그 가운데 같은 해에 등과한 심한수(沈漢秀)와 절친이 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심한수의 입을 통하여 허선비는 대과에서 발생한 하나의 비화를 전해 듣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자신을 제치고 김호선이 장원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취중에 발설하고 있는 심한수의 이야기가 대충 다음과 같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굉필이 자네가 장원이야. 하지만 안동 김씨가 대과의 시제를 미리 빼돌려 자기 가문의 젊은이들에게 제공했기에 김호선이 장원이 된 것이지. 결국 굉필이 자네는 종8품에 불과하지만 김호선이는 초장에 종6품 주부자리를 꿰찬 것이야. 지방에 나가면 그는 어엿한 현감이지, 허허허“.  

그날 심한수의 이야기를 들은 허굉필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한성부에서 큰 공을 세워 가장 빨리 진급하는 기록을 세우고자 그가 결심한 것이다; “앞으로 그 누구도 나의 공을 깎아내릴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뛰어넘어 나는 나의 아성을 이곳 조선에 세우고 말 것이다!... “.

허선비는 22세가 되기 한달 전부터 한성부에서 봉사(奉事)로 근무했다. 과거에 급제하고나서 일년을 기다린 끝에 관직을 얻은 것이다. 그는 매년 승진을 거듭하여 26세가 되자 종6품 주부의 벼슬에 올랐다. 그 내용이 그의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