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24강(마20:13-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10. 04:42

마태복음 강해 제124(20:13-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35()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20:13-19)

 

북방도시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시몬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스승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16:16). 그때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 복이 있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16:17a). 그 이유는 그와 같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정확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복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16:17b).

그런데 그 다음에 느닷없이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과 삼일만의 부활사건이 이미 계획되어 있다고 예언을 하시고 있습니다(16:21). 동일한 예언이 두 번 더 나타나고 있습니다(17:22-23, 20:17-19).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언이 그 세 번째의 것으로서 소위 마지막 예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이 예비되고 있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서 비장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품꾼의 비유’(20:1-16)를 말씀하신 다음에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20:17-19).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삼일만의 부활이라고 하는 시나리오는 예수님의 정체성 및 사명과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삼일만의 부활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설명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마는 같은 뜻을 가진 용어이지만 히브리어 메시아와 헬라어 그리스도는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인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해방자이며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의 능력으로는 중근동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대를 이어서 진행되고 있는 강력한 외세 패권국들의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어주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옛날 모세가 애굽 제국을 물리쳤듯이,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했듯이 그렇게 그들을 해방시키고 선민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국사람들이 옛날에 지니고 있었던 장군사상이나 미륵사상과 비슷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선민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만민을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의 히브리어 메시아가 아니고 세계어인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표기하는 것이 여기서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그들만의 해방자이며 구원자인 메시아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살고 있는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특징인 만민구원사상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민족종교인 유대교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마침내 처형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이 만민구원의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탄생시키고 있는 출발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의 그리스도 처형이 없었더라면 만민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를 아니했을 것입니다(11:12). 그리고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십자가 대속의 효과가 그렇게 즉시에 미치지를 아니했을 것입니다(2:36-42).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가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구현하고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노동한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가족의 하루치 생계비에 해당하는 1데나리온을 똑같이 지급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20:13-14). 그것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복을 공급하시며 생명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1:22, 28-31). 둘째, 선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20:15). 여기서 선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3:4).

요컨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이 땅에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임하게 됩니다. 그것이 삼일만의 부활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만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다고 한다면(12:1-2)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며(1:12-13) 죽음에서 부활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6:4, 고전15:20-23).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달리 황금률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그 말씀의 원형을 출애굽기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너는 이방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22:21-24).

한 마디로, 학대를 하는 자는 나중에 학대를 받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자는 나중에 자신이 그러한 처지에 빠졌을 때에 동일하게 도움을 얻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20:16). 한자(漢字, Chinese character)로 사자성어(四字成語,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네 글자의 조합)새옹지마’(塞翁之馬, 복이 화가 될 수도 있으며 화가 복이 될 수도 있다)도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0:17-19). 몇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올라가고 내려가며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그 다음에는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어 죽음의 세계 음부로 내려갑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살아나게 되고 하나님께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올라가는 그것이 바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가게 됩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임을 받게 되고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돌아보게 합니다(23:12).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고난 다음에 영광이 있으며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라고 새겨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8:17-18).

(2)  인자’(20:18)’(20:19)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자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구약에서는 선지자나(2:1-3)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을(7:13, 10:16)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가리킬 때에 사용한 용어입니다(16:13, 20:18, 3:13-14). 그리고 예수님이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로마의 총독에게 넘겨지고부터는 자신에 대하여 3인칭 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자신에 대하여 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가 않습니다.

(3)  자신을 삼인칭화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때부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다루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완벽히 그 장래를 맡겼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그 험난한 고난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십니다. 사람의 몸으로서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그 기간을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하셔서 견디게 하시고 죽음 후에 부활과 승천을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동 시스템이 작동이 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시간과 같습니다. 온전히 맡겨버린 인생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다루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유대교지도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 다음 순서 곧 그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십자가 처형에 넘겨지는 것부터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이라고 하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용어의 사용이라고 하겠습니다.

(4)  여기서 유대교지도자들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20:18)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산헤드린 대 공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제사장과 장로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대표자로서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대표자로서 서기관들을 거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이며 실세는 전직 대제사장이며 그의 장인인 안나스라고 하겠습니다(18: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