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16강(마19: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7. 01:03

마태복음 강해 제116(19:1-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24()

 

가장 가까운 이웃의 빚을 탕감하고 잘못을 용서하여주자면 어디에서부터 실천을 하여야만 하는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이혼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19:1-9)

 

18장까지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행한 복음사역의 내용입니다. 이제 제19장에 들어오게 되면 소위 홈 그라운드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고자 남하를 하고 있습니다. 흔히 갈릴리 사람들은 요단 강 동쪽 강변 길을 따라서 쭉 남하를 하다가 길갈 지역이 서편에 보이면 도강을 하여 여리고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사도 마태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19:1)라고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요단 강을 건너 서편 유대 지경인 길갈에 도착을 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점이 언제쯤일까요? 요한복음 제7장의 내용을 참조하면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이 시작되기 6개월 전 초막절로 볼 수 있습니다(7:2, 10). 그때부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땅에 계속 머무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십니다. 그리고 겨울 수전절도 보내시고(10:22-23) 이듬해 봄 유월절에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일정입니다. 여기 마태복음 제19장부터는 그 시기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역시 기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복음사역의 장소는 크게 달라지고 있지만 이슈는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천국 임금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기에 이웃의 빚을 탕감해주고 용서를 해주는 것이 옳다는 취지의 말씀이(18:21-35) 19장에서도 계속 적용되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겠다고 들고나온 이혼증서 발부에 대한 문제가 그러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19:3). 예수님의 답변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이므로 용서하고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19:6). 예수님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창세기 제1장과 제2장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의미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서 창조했습니다(1:26-27). 그리고 그들에게 번성의 복과 땅을 지배하는 권세를 골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1:28-31). 남자 한쪽에만 준 것도 아니고 여자 한편에만 준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할 때에 그 복이 완전해지고 땅을 확실하게 지배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사람들이 복을 받아 누리고 땅을 지배할 때에 누구의 뜻을 따라서 실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그러한 청지기로 발탁하여 함께 동거하며 교육을 시키고 있는 대상이 아담입니다(2:8).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기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아담입니다(2:7).

(3)  그러나 영과 육의 합일체로 유일하게 창조가 된 아담이 영이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2:18). 그렇다고 흙으로 만든 동물로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2:19-20). 그 점을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반려자를 만들어서 아담과 짝을 지어주십니다(2:20-23). 아담이 아내 하와와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한 몸이 되었을 때에 참으로 외로움을 이기고 인생의 행복을 맛보고 있습니다(2:24-25). 그것이 결혼제도이며 가정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친정 아버지와 중신아비가 되어서 만들어준 소중한 가정입니다. 부부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그 가정을 지켜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입니다.  

위와 같은 창세기 말씀의 뜻을 바리새인들에게 전하시면서(19:4-5)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19:6).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여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19:7).

참고로, 모세의 신명기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도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24:1-4).

모세의 신명기 율법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아내가 부정을 했을 경우, 그것도 남편이 용서하지 아니할 경우에 국한하여 이혼증서를 주고 부부생활을 끝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은 그 취지를 크게 확대하여 그저 어떤 이유가 있으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릴 수가 있다”(19:3)고 폭넓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그렇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오경의 뜻을 다음과 같이 되살리고 있습니다;

첫째로, 창세기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부부관계를 깨지 말라는 것입니다(19:6, 8b). 그런데 유대인들이 마음이 완악하여 부부관계를 깨고 있습니다(19:8a). 그것은 잘못된 관행입니다.

둘째로, 모세의 신명기 말씀의 뜻 그대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하는 경우는 엄격하게 제한이 되어야 합니다. 음행한 이유 외에는 이혼증서를 발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9:9a). 만약 모세 율법의 취지마저 어기고 함부로 이혼증서를 발부하여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게 되면 그것은 간음에 해당한다고 예수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19:9b).

끝으로, 예수님의 설명은 갈릴리에서부터 말씀하신 탕감과 용서의 취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형제와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고 잘못을 용서해주라고 강조하신 예수님이십니다(18:32-35). 그 이유는 자신의 잘못과 빚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이미 탕감을 받고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동일한 시각에서 이혼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잘못을 용서해주고 함께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맺어주셨기 때문입니다(2:22-23). 한 몸이므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용서의 대상입니다.

한 마디로 결론을 맺어보자면, 가정생활에서부터 용서와 탕감의 원칙이 실현이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을 사랑하는 성도가 아니며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는 이미 아니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