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14강(마18:17, 21-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5. 23:41

마태복음 강해 제114(18:17, 21-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22(주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도의 잘못에 대한 공식적인 용서와(18:17) 사인(私人)간의 개인적인 용서(18:21-22)와의 차이, 그리고 형제의 잘못을 490번이라도 용서를 해줄 수 밖에 없는 이유(18:21-27)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하여 기록함에 있어서 상당히 논리적입니다. 예를 들면, 죄를 범한 형제를 용서함에 있어서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교회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의 과정을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번 강해(113)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핵심사항만 다시 간추려보면, 세 단계를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1) 개인적 심방으로 잘못을 시정하도록 권고함(18:15). (2)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한두 사람의 증인과 함께 심방하여 권고함(18:16). (3) 그래도 말을 듣지 아니하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권면하고 참회의 기회를 줌(18:17). (4) 이상 세 차례의 기회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취급을 하라는 것입니다(18:18).

한편, 교회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도들 사이의 용서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슈는 크게 보아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몇 번까지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하는가?(18:21-22) 둘째, 왜 여러 번 용서를 해주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가?(18:23-27) 이제부터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때에’(18:21a)로 문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그때는 예수님이 교회 내에서 장차 이루어질 죄 범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절차를 말씀하신 바로 그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바깥에서는 장차 몇 번까지 용서를 하면 되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오리이까?”(18:21b). 베드로의 평소 생각이 잘 드러나고 있는 질문입니다. 7번까지 용서를 베풀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는 뜻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뜻도 그러한 것일까요?

둘째로, 예수님의 답변은 제자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7번의 용서가 아니라 7번의 70배라도 용서를 해주라는 것입니다(18:22). 여기서 ‘7’이라고 하는 숫자는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의 숫자에 대한 개념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숫자 ‘3’과 시공간적인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숫자 ‘4’가 더하여진 충분한 수가 바로 ‘7’입니다.

쉽게 이해를 하자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three in one)의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 그리고 생물을 모두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그러므로 ‘3’이라는 수가 어울리고 있습니다. 한편, 사람은 시간적으로 춘, , , 동이라는 네 가지 계절의 영향을 받으며 공간적으로는 동, , , 북이라는 네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4’라는 숫자에 상당히 민감하며 친숙합니다. 또한 ‘10’이라는 수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셈을 할 때에 꽉 찬 숫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7’‘70’을 곱한다고 하는 것은 충분하고도 완전한 용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렇다면 왜 그렇게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용서를 베풀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은 하나의 우화를 통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 하나가 천국의 임금에게 빚진 것이 돈으로 따지자면 일만 달란트나 된다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18:24). 그 돈은 엄청난 금액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화라고 치더라도 만 명의 장정이 평생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만약 금화라고 한다면 그 가치는 15만명의 장정이 평생 노동을 하여 갚아야만 하는 금액입니다. 그 뜻은 한 평생을 살면서 사람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빚을 다 갚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부채를 모두 탕감하여 주신 하나님이십니다(18:27)”.

탕감의 조건은 단 한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너도 남을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황금률이기 때문입니다(7:12). 그렇다면 왜 그렇게 용서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단순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큰 용서의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만 된다는 이유 때문일까요? 다른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까지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5:44). 그 이유는 죄를 범한 형제가 진짜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히려 불쌍한 존재이며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대상입니다. 진짜 원수는 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여 죄를 범하도록 만들고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악한 영들이 행사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어 버리십니다(3:15, 8:2). 그 결과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써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살리고 있는 형제를 예수님의 제자인 성도가 용서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