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17강(마19:9-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8. 00:14

마태복음 강해 제117(19:9-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27()

 

예수님이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19:9)고 강력하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의 이유, 그리고 제자들의 처방과 예수님의 처방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19:10-12)

 

먼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절망하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세대의 모습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이 아니면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9:9). 그런데 선민이라고 하는 유다 사회 역시 그 말씀 앞에 죄인의 모습입니다. 음행의 이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흠을 잡아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내를 쉽게 버리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여자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재혼을 하기 위하여 아내를 버릴 여러 가지 구실을 찾거나 만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제사장들이 모세의 지극히 제한적인 이혼증서 발급조항을(24:1-4) 함부로 확대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혼증서를 쉽게 발급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 남편들이 손쉽게 이혼을 하고 아내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고대 가부장 족장사회에 살고 있으니 남자인 가장(家長)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엄청 강화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행태가 하나님 말씀의 본 뜻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므로 제자들이 절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남자들에게만 재산소유권과 상속권이 인정되고 있으므로 여자들은 이혼을 당하게 되면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재혼을 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하여 남의 종이 되거나 몸을 파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선민사회가 구조적으로 음란한 사회로 계속 타락하고 있습니다. 둘째,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의 편의를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적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발급하도록 되어 있는 이혼증서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선민사회가 타락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유대교만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대교는 하나의 사람이 만든 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나름대로 하나의 처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9:10).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 어른을 지칭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족장사회에서 가부장인 어른들이 쉽게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를 버리고 새 여자를 아내로 얻고 있으니 그와 같은 세태에 물들지 아니하고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자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의견입니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 처방입니다. 하지만 좁은 소견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더러운데 자기만 깨끗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세상까지 변화를 시키는 능력으로 터져 나와야만 하는데 그 폭발적인 생명력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겨우 자기 한 몸 거룩하게 지키고 장차 성화의 과정을 밟고 말겠다는 사고방식이니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이기적인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19:11-12).

풀이를 해보자면, 제자들이 말한 바와 같은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지 말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평생 지낼 수 있도록 구별이 되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세 단계로 그러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예수님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 사람은 결혼생활에 연연하지 아니해도 됩니다. (2)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사고나 환경으로 말미암아 고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도 결혼하지 아니하고 혼자서 살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3)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으로 특별히 고자와 같이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그와 같은 독신생활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경우라야 합니다.

왕왕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적극 수행하기 위하여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충만하게 주셨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은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으로 그렇게 밀고 나갔다가는 낭패를 당하기가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말틴 루터의 경우입니다. 그는 정직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독신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성적인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과감하게 결혼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결혼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도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은혜가 주어지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분명할 때에는 무조건 믿는다고 주창하면서 자기 고집으로 밀고 나아갈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믿음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사람의 의지로 막 밀어 부치면 하나님이 그 뒤를 무조건 받쳐주는 것이 큰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4:5-6’절의 시험에 다시 빠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