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10강(마17:22-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7. 4. 09:16

마태복음 강해 제110(17:22-2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220()

 

성도가 하나님께 바쳐야만 되는 것과 세상임금에게 바쳐야만 하는 것(17:22-26, 22:21) 그리고 하나님께 먼저 제대로 바친 자에게 하나님이 보태어 주시는 방법(6:33, 17:27)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3년 이상의 공생애를 살고 계십니다. 예수님 일행은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백성들 가운데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에 어떠한 사건이 발생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일차 예언을 갈릴리를 벗어난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하신(16:21) 다음에 그것을 확인하는 예언을 갈릴리에 돌아와서 재차 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17:22-23).

예수님의 예언으로 미루어보면, 공생애 36개월의 대미(大尾, 큰 꼬리)를 실로 의미 깊게 십자가 죽음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희생 그리고 헌신된 삶의 절정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내놓는 것입니다(26:39, 6:39). 세상사람 모두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완전한 제물로 자신의 몸을 내어 놓는 행위입니다(1:29, 3:14). 그렇게 되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공로로 예수님에게 부활의 날이 있게 됩니다(2:23-24, 2:8-11).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재차 예언을 하고 난 직후에(17:22-23) 가버나움에서 성전세를 바치는 장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17:24-27).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도 마태는 왜 그와 같은 순서로 사건을 나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관련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훗날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로마제국의 지배는 반대하지만 헤롯 왕가의 통치는 지지하고 있는 유대인 세력)들과 함께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22:17). 만약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답변을 하게 되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자로 낙인이 찍히고 로마제국에 의하여 처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옳다고 말할 경우에는 유대인들의 민족정서에 반하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여 하나의 원칙을 선포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1). 그것은 성도의 삶의 대원칙을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하여 그리고 그 마지막에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년반 동안의 헌신, 십자가의 희생, 그 길에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웃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산 제사입니다(12:1-2).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임금에게는 무엇을 바쳐야만 하는 것일까요? 가이사의 것은 무엇일까요?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둘째로, 가이사의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것입니다. 여기 예문에서는 가이사에게 바치게 되는 세금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제는 내국세와 관세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내국세는 속국인 유다 땅에서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사용이 되는 세금입니다. 하지만 관세는 다릅니다. 전액 로마황제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이사는 세상의 황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임금도 그 휘하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헤롯 왕가나 로마총독이 거두고 있는 세금도 넓은 의미에서는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세가 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세금입니다. 매년 반 세겔씩 내어야만 합니다(30:13, 17:24).

예수님이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성전의 출입세와 성전세 자체입니다. 성전의 출입세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나이든 과부가 자신의 생계비를 쪼개어 두 렙돈을 내는 것을 보고서 가슴 아파하십니다(12:42-43). 아버지 집에 출입을 하면서 그 자녀가 돈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시각입니다. 마찬가지 경우가 또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전에 왜 세금을 내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17:25-26). 하지만 그렇게 반대의견을 계속 피력하게 되면 시끄러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따라서 실족하는 자를 예방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고자 작심하십니다(17:27ac).

그런데 문제는 성전세를 누가 부담하게 되는가? 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대신 부담을 해주십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지극히 기적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물고기 입속에서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그것을 예수님과 베드로 몫의 성전세로 당국에 바치라고 합니다”(17:27bc).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예수님을 위하여 기타 세금과 같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제공하여 주신다는 사상이 그 기저에 깔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33).

동일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전심전력으로 일하자 그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 아버지가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친지를 회심시켜주시는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9:1-3, 16:1-23).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는 자에게 충만한 세상적인 은혜까지 더하여 주시는 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살롬!